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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Aug 14. 2023

맹렬하고도 선명한 행복

《돌봄과 작업: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을 읽고 

#돌봄과작업 #돌고래



어? 저자명이 왜 이렇게 쓰여 있지?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저자명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전체 이름 석 자가 두 줄로 나뉘어, 첫 번째 줄에는 성이, 두 번째 줄에는 나머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성과 이름이 삼각형을 이루는 형태였다. 책 표지와 책등, 그리고 내지에도 같은 방식으로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의도 없이 썼을 것 같지 않았다. 저자명을 위에서부터 다시 쭉 읽어보니, 유난히 이름이 도드라졌다. '정서경'이라고 한 줄로 이어 썼을 때 '정'이라는 성에 딸려 있는 존재처럼 '서경'이 다가온다면, '정'과 '서경'이 분리되니 '서경'이 무척 독립적으로 보였다. 아마도 저자들의 성보다 이름을 강조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성은 물려받는 것이지만, 이름은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들이 모두 엄마이고, 이 책이 돌봄과 작업에 대한 내용인 것도 삼각형 표기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는 자주 자기 이름이 지워지는 존재이기에. 물론 아이를 돌보는 일은 그 자체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지원하지 않으면 하나의 생명이 제대로 자랄 수 없다. 아이 돌보기는 보고서 작성처럼 정해진 끝이 없고,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순간 툭하면 자잘한 업무가 수없이 추가되며, 아이가 열이 나는 등의 돌발 상황이 수시로 생긴다. 특히 영유아기에는 하루 24시간을 아이 돌보는데 사용해야 한다. 잠을 잘 때조차 나를 위한 시간이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자기 자신이기보다 아이의 엄마로서만 존재한다. 



때문에 돌봄과 작업은 공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 책은 작업을 '외부의 잣대나 규정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하는 일'(p.18)이라고 정의한다.) 몸은 하나인데, 돌봄과 작업은 항상 거의 동시에 나를 필요로 한다. 나에게 작업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회사 일과 순전히 취미로 하는 글쓰기와 책 읽기가 있다. 나는 내 힘으로 회사에서 일해서 월급을 받는 데서 상당히 보람을 느낀다. 코로나가 극심했을 시기에 재택 할 때에는 돌봄과 작업을 병행하느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민원인과 통화하면서 국을 끓이고, 보고서를 쓰다 말고 아이를 씻겼다. 그러다 보니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하는 법을 깨쳐'(p.146) 갔다. 그러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재택근무를 하지 않지만 돌봄은 여전히 회사 일에 영향을 미친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아프면 조퇴해야 할 때도 있고, 아이가 아파서 학원에 못 가면 여러 학원에 연락하고 보강을 새로 잡아야 한다. 돌봄은 내가 취미로 하는 글쓰기와 책 읽기에는 더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취미이므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 하고 싶기 때문에 잠을 쪼개가면서 할 뿐. 무리해서 아파버리게 되면 더 낭패다. 적절한 수준의 돌봄을 유지하면서, 책 읽고 글 쓰고, 가사일 하고, 회사 출퇴근하면서 컨디션을 잘 유지하는 것이 나의 과제다. 나는 내 손에 있는 공을 최대한 오래 저글링 하고 싶고, 그 과정에서 돌봄과 작업이 '서로를 배려한다고 할 수는 없다.'(p.56)



그럼에도 '아이들이 없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p.41) 출산 전 나는 실력주의에 꽁꽁 묶여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외골수 완벽주의에 가까웠다. 아이를 낳고서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밤새 달래지지 않는 아이 울음에 괴로워하며, 다른 사람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콘도에 놀러 갔다가 아이 열이 치솟아 돌아오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무척 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며 아이들이 보내는 무한한 사랑에는 늘 가슴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이를 돌보면서 사랑을 깨달았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물론 돌봄과 작업의 저글링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맹렬하고도 선명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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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오른쪽 위에는 파란색 꽃이 여섯 송이 있다. 책 표지는 흰색이고 우측에 세로로 제목 '돌봄과 작업'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이 있다. 그 아래 우측 하단에 출판사로고인 돌고래가 있다. 책 표지 중앙에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화를 내고 몸속에서는 까만 말이 요동치는 여성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책 표지 좌측에는 위에서부터 저자명 '정서경 서유미 홍한별 임소연 장하원 전유진 박재연 엄지혜 이설아 김희진 서수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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