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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l 28. 2023

우리집에는 '아내'가 없다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을 읽고

#아내가뭄 #애너벨크랩 



"A 차장님, 화장실에서 얼마나 통화 자주 하는지 알아? 애 학원에선가 자꾸 연락 오는 거 같더라고. 집에 일 생겼다고 갑자기 휴가나 쓰고."

오래전, 회사의 어느 직원이 말했다. 그는 물론 '애 엄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A는 유독 심하다고 덧붙였다. 나도 A가 전화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후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둘 낳았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과거 A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 나도 A처럼 사적인 통화를 할 일이 잦았고, 당일에 급하게 휴가를 올리고 있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다니던 우리 아이들은 어린 만큼 열도 자주 났다. 심지어 코로나가 창궐할 때라 열이 37도 중반이 넘으면 무조건 귀가해야 했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출근했는데, 오전부터 핸드폰 화면에 돌봄 기관 선생님 전화번호가 뜨면 한숨부터 나왔다. 아무리 어린이용 비타민을 잘 먹이고, 잠을 잘 재우며 컨디션 관리를 해주려고 노력해도 아이에게 찾아오는 질병이란 통제 불가능한 변수였다. 




애너벨 크랩은 호주의 정치부 기자 출신 정치평론가이자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다. 그는 《아내 가뭄》에서 집 밖으로 출퇴근하며 일하는 사람에게 '아내'가 있고 없음에 따라 어떤 차이가 나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내'란 '집 안 여기저기 쌓여가는 무급 노동을 더 많이 하려고 유급 노동을 그만둔 사람이다.'(p.30) 아내가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이가 태어나도 전혀 회사 업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직장과 병행하려고 스케줄 조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과부하가 걸려 있어 언제 툭 하고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야'(p.239) 직장을 다닐 수 있다. 여자인 친구들 중에는 출산 후 돌봄을 대신해 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결국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직장에 다니는 유자녀 여성과 남성에게는 동일한 가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거나 앞으로 그럴 거라는 예상 때문에 소리 없이 감점을 당한다. 그래서 평생 더 적게 번다. 아버지들은 자발적으로 사표를 쓸 가능성이 훨씬 낮다고 여겨 임금을 더 많이 받는다. 그리고 임금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사표를 쓸 가능성도 더욱 낮아지고, 앞으로도 계속 아내들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게 된다. 반면 아내들은 그만둘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여기며 곧잘 기대대로 그만두고 그래서 임금도 더욱 적게 받는다.'(p.127) 남성에게는 '아내'가 있고, 여성에게는 '아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아내'가 없음에도 일을 놓지 않으려는 여성에게는 편견이 따라붙는다. 특히 "그런데 애들은 어디 있어요?"(p.368)라는 질문은 항상 주어진다. '아이들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어머니는 정계에서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같은 상황에 처한 아버지보다 훨씬 모질다고 평가받을 것이다'(p.343)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깔끔하게 일을 해내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지표를 찾느라 혈안이 된 자들의 깐깐한 시선을 받아야만 한다.'(p.334) 사회는 일 가정 양립을 꿈꾸는 여성에게 '일을 해도 좋다. 다만 조건이 따라붙을 것이며 그러한 조건을 떼어내기는 죽을 만큼 힘들 것이다.(p.343)라고 말한다.




나도 이러한 사회의 시선에서 살아남고 싶어 발버둥 쳤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전화가 오면 티 안 나게 몰래 받고 끊으려고 애썼다. 재택근무 중에 아이가 열이 치솟아 병원에 갔을 때,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미안하다, 병원에 있다'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항상 상주하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상황일 것이다. 때때로 '아내'가 갖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배우자와 내가 둘 다 유급노동을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일방적으로 '아내 가뭄'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우리 집은 '아내'를 없앴다. 남편과 나는 시차 출퇴근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나는 8시부터 5시까지, 남편은 10시부터 7시까지 근무한다. 남편이 등원과 등교를 맡고,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의 오후 시간은 (물론 유급으로) 부모님께 돌봄을 부탁드린다. 나는 저녁때 숙제를 봐주고 아이들을 씻기고 잘 준비를 시킨다. 첫째 학교에서 오는 연락은 남편이, 둘째 유치원 연락은 내가 받는다. 정희진 선생님 말씀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아내를 가질' 특권은 없다.(p.13) 우리 집에서 '아내'가 사라진 덕분에, 나는 예전보다 조금 무능해지고 훨씬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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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짙은 회색 천 위에 책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위쪽에는 큰 솔방울 작은 솔방울이 하나씩 있고, 책 오른쪽에는 흰색 꽃이 세 송이 놓여 있다. 책 표지 우측 상단에도 흰색 꽃이 한 송이 올려져 있다. 책 표지는 연한 분홍색이다. 표지 가운데 집 그림이 있고, 집 안쪽에 집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다. 집의 한가운데에 제목 '아내 가뭄'이 굵은 색 검정 글자로 쓰여 있다. 책 표지 상단 중앙에는 "무엇이 여성을 분노케 하는가?" '애너밸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가 있다. 책 표지 하단 중앙에는 '모든 문제는 가사 노동에서 출발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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