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캥거루족이라면 좀 이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캥거루족이 아니었을까 떠올린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의 명의는 내 이름이다. 집을 구매할 때 들어간 돈도 내 비중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어머니를 쫓아내고 내가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 둘이서 살기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내가 친구와 둘이 살게 되며 '여자 둘'이서 살기의 의미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 후기다.
나이를 먹으며 부모님과 부딪히는 일이 늘어났다.
부모님께서는 자식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늘고 자식의 입장에서는 이제 자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충돌한 결과였다. 회사까지 어머니에게 소개해줘 같은 직장에 다녔던 나는 완전히 자유가 사라짐을 느꼈다. 그래서 통장 잔고를 봤다. 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방이지만 무슨 일인지 좀처럼 싸지 않은 집세들은 내 지갑을 보며 마구마구 비웃는다. 자존심이 상해 흥, 하고 모른 체 하며 지갑을 닫았다. 어쩔 수 없다며 쿨한 척 자신을 위로했다. 이번만 내가 넘어간다며 어머니에게 먼저 화해를 신청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이 한 해, 두 해 지나갔다.
그러다 돌연 사고 하나가 터졌다. 물론 천재지변은 아니었다. 차라리 천재지변이라면 화재나 지진에 대비해 둔 보험금이나 타 먹을 수 있었겠지만 사람의 고의로 일어난 사고였다. 내게는 사고가 아니라 재앙과도 같은 파급력을 가지고 온 사건 하나.
아직은 용기가 부족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사건 하나 탓에 심적으로 견딜 수 없던 나는 회사의 양해를 받아 기차표를 뽑아 들고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 사태가 겹쳤던 덕에 외국으로 도망갈 용기는 없었던 내가 국내를 돌아다닐 좋은 기회였다. 서울로 가 나는 미술 전시회와 뮤지컬, 맛집 등 수도권의 재미를 실컷 맛보았다.
그리고 뷰가 좋은 서울 안테룸에 짐을 풀고 라운지 바에서 술을 홀짝였다. 동행자도 없이 혼자 온 내가 가장 전망 좋은 자리를 선점한 게 시간이 갈수록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내 얼굴은 어차피 철면피였다. 사실 애초에 철면피였던 것에 더해 더 이상 내 행복을 타인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피해의식이 나를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밤이 깊었는데 야근을 하는지, 높은 층의 불들은 꺼지지 않고 자동차 조명은 밤하늘을 밝히며 클락션을 크게 울려댄다. 시끄럽고 밝은 도시, 서울은 내가 도망쳐온 곳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예술가처럼 볼펜을 들어 노트에 풍경을 끄적인 나는 만족스러운 척하며 라운지 바를 빠져나왔다. 사실 충족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방으로 카드키를 찍고 들어오자, 작지만 내겐 안성맞춤인 방이 보였다. 나는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다녀 퉁퉁 부은 발과 다리를 꽉 조이고 있는 양말 고무에서 해방시켰다. 양말 자국으로 발갛게 억눌렸던 부분이 나를 보며 열심히 뛰어놀았다, 칭찬한다. 나는 양말 자국을 얼른 없애려 주무르다, 곧 이렇게 해도 탄력이 사라져 가는 피부가 금세 회복될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지친 몸으로 힘들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들어 누웠다. 부스럭거리는 호텔 특유의 이불이 여행 온 기분을 더욱 고조되게 만든다.
다시 문제의 발생지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때 당시,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 더 신나게 놀고 죽은 듯 쉬고 싶었다. 내일은 무얼 할까?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가기 전까지 내 시간을 미친 듯이 즐겨야지.
아침은 호텔의 조식으로 해결하고 팝업스토어를 갔다가, 전시회를 한 번 더 갈 시간이 되려나?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계산하고 있자 눈이 슬슬 감긴다. 그리고 나를 기다렸던 수면은 나를 죽음과도 같은 안락한 상태로 안도한다.
사실 내게 필요한 건 여행 따위가 아니다. 아침에 깨어나서 그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깨달았다.
잠시 여행을 간다 해서 모든 게 바뀔 수 없다. 여행을 다녀와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는 작가님들처럼 현명한 깨달음을 나는 얻지 못한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언제나 '버티는'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번에도 큰 철학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돌아갈 것이다. 잠시 내 인생을 환기시킬 수 있지만 전쟁터는 따로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발이 왜 그렇게 무겁던지.
더욱이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나를 태워 바람을 세차게 가르고, 목적지로 향한 기차 대신 들려온 전화음은 더욱 충격적인 소리를 내게 고했다.
앞전 사고와 겹치는 음성이었다. 나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속된 말로, 거지같이 인생 더럽게 꼬여도 이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결국 나는 그 인파 많은 서울역에서 혼자 펑펑 울었다. 기차표를 타고 전화의 전원을 껐다. 도착지에 겨우 내린 나는 사건의 시발점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것 대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 참을 다시 울었다.
내 상냥하고 배려심이 많은 친구는 나의 울음소리를 다 들어주고 나서 자신과 함께 살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첫 독립을 친구의 원룸에서 시작했다.
늦은 저녁 짐을 가지고 들이닥친 나를 대수롭지 않게 환영한 친구는 다음날부터 바로 일을 나갔다. 물론 나도 직장이 있으니 회사를 나가야 했겠지만,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유급휴가 기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어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나라면 이유도 안 알려주고 쉬어야겠다는 직원에게 연차도 아닌 회사 재량으로 유급휴가를 내주는 일은 생각하기 힘들었을 텐데, 사장님께서는 해내셨다. 하여튼 사장님의 배려와 친구의 배려로 나는 좁은 단칸방에서 일주일 간 친구가 오기 전까지는 형광등, 선풍기, 에어컨과 같은 전자기기를 틀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저 물만 마시며 반쯤 죽은 것처럼 굴어댔다. 친구는 그런 내게 제발 무서우니 그렇게 하고 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방세를 안내도 좋다 했던 친구의 배려가 공과금이라도 아끼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내 배려가 친구에게 다시 부담으로 돌아가니 우린 어찌 보면 참 안 맞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런 전조를 모두 무시하고, 친구는 첫 청년 전세대출을 받아 내가 빈대 붙은 지 일주일 만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다행히 그 집에는 내가 쓸 방도 있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만 친구가 집을 찾을 때 내가 자동차를 끌고 다니며 함께 집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덕에 함께 살기로 쉽게 마음먹은 것도 있었다. 내 방은 친구의 방에 반에 반 정도 되는, 창고 방이었다. 침대 하나만 들어가면 만사 OK였던 나는 아주 순조롭게 친구의 도움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특히 이미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나와 달리 무주택자인 친구 덕에 청년 전세대출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자와 공과금, 관리비의 반값만 지불하면 되는 내 입장에서는 굉장한 혜택인 것이다.
1주택을 보유하고 있으면 뭐하나, 부모님과 싸우고 나니 팔지도 못하고 묵혀만 두는 것을! 나는 속으로 억울해하며 땅을 쳤지만, 그럼에도 상냥한 친구 덕에 빈대 붙을 집을 얻은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우리가 굉장히 절친한 친구는 맞으나, 학창 시절부터 미친 듯이 싸워 주변의 이골이 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예상처럼 우당탕 갑작스레 시작된 자취는 순탄치는 않았다. 일단 가구를 사는 것부터가 전쟁이었다.
아무거나 싸고, 친환경적인 게 좋은 나와 달리 미적 감각에 예민한 친구에게 구매할 목록을 컨펌받는 것은 회사 상사의 결재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 성질 급한 일처리와 친구의 꼼꼼함 덕분에 우린 대체로 좋은 제품으로 집 안을 2주 안에 모두 채워 사람이 사는 집의 형태를 갖춰냈다.
그 후 청소와 빨래는 당번제로 설거지와 요리는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맞았다. 물론 나는 요리에 재주가 없어 설거지 당번이었다. 청소에 민감한 내 탓에 잔소리를 듣기 지겨웠던 친구가 화를 내면 전쟁의 시작되기도 했다. 서로 훌쩍이고 눈물을 뽑고 나서야 미안해, 라며 신파극을 찍으며 울었던 것은 아직도 민망하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에피소드다. 그 외에도 생활습관으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참 즐거웠다.
자취를 하며 가장 중요한 건 규칙을 만들고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돈도 중요하다. 서로 마음 상하는 일 없도록 잘 조율해 생활비를 측정하고 공동 통장과 카드를 만들어 사용했다. 다행히 내 친구와 나는 마음이 상하는 것보다 서로 조금씩 손해를 봐도 물러서는 스타일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생활비가 아까운 적은 있어도 후회가 된 적은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 때는 가사 비중이 어머니가 많았었으니 노동은 오히려 더 많아졌지만 마음은 편했다. 더 이상 참아내지 않는 것의 기쁨을 온전히 느꼈다. 그리고 좀 더 큰 세상,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 느낀 것도 이때다.
친구와 살기 전부터 <여자 둘이서 살고 있습니다>와 <여성 2인 가구 생활>을 보며 이런 형태의 가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온 내게 그것을 실감하고 증명해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
돈에 민감한 내 입장에서는 부모님에게 맡겼던 자유를 되찾는 대신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친구와 함께 사는 것은 관심 영역에 들어가 있었다. 함께 살면 소분되는 식재료, 월세, 공과금, 관리비는 당연하고 힘들거나 기쁠 때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특혜였다. 물론 단점들도 책에서 기록한 것을 보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도 함께 사는 것에 성공한 요인 중 하나였다.
책들을 먼저 봤던 내가 이런 책들을 읽고 실천할 기회가 생겨 신기하다며 친구에게 하루 종일 쫑알거리는 탓에 친구가 고개를 저었던 일도 있었다.
원해서 독립을 한 게 아니고, 둘이 바란 것도 아니지만 혼자 살게 되는 정처 없는 나그네라면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말하고 싶다.
특히 사랑하는 친구 덕에 함께 살며 덜어낼 수 있었던 집세와 식비, 공과금과 관리비를 비롯해 모든 근심 걱정은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경험일 것이다.
친구와 함께 살기를 2달 남겨둔 입장으로서 한 마디만 더 덧 붙이자면, 정말 완전히 척을 지고 헤어진 게 아니라면 싸웠던 추억마저 미화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