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인정하기
내가 우울증임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입맛의 상실 때문이었다. 나는 1년 365일 중 341일은 식욕이 넘쳐나는 인간이다. 배란기 땐 세포 만드느라 입맛이 좋아지고, 생리 기간엔 힘드니까 잘 챙겨 먹고, 끝나면 보상 심리로 입이 터진다. 보통 대출혈 첫날과 이튿날만 (비교적) 식욕이 없으니 한 달에 이틀, 일 년에 341일 정도는 항상 먹고 싶은 게 많은 아주 번거로운 인간이다. 그런 내가 일주일 넘게 물 밖에 마시질 않는 거다. 뭘 먹을 생각이 도통 들지 않아 한 달만에 10키로가 빠졌다. 놀라웠다. 석 달간 헬스장 바닥을 굴러다녀도 8키로 밖에 안 빠졌었는데. 역시 다이어트는 마음고생 다이어트가 최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입맛 상실의 단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신민아는 우울증 환자를 연기했다. 항상 깨발랄하던 배우의 새로운 모습도 놀라웠는데, 우울증 증상을 연출한 장면들에는 쌍따봉을 날렸다. 오, 표현 잘했는데 싶었다. 신민아가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아니 샤워만 하고 나왔는데 하루가 다 가있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힘겹게 일어났는데 몸도 이불도 축축하게 젖어있는 환상을 본다. 나도 비슷한 시간들을 보냈다. 분명 천장을 보며 누워만 있었는데 하루가, 이틀이 그냥 지나갔다. 핸드폰으로 SNS를 본 것도 아니었고, 진짜 그냥 천장만 “잠깐”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창밖을 보면 해가 져있는 나날이 이어졌다. 정말 신기했다. 뭐 대단히 우울한 느낌도 아니었다. 다만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덮고 있는 이불이 물을 머금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날들이 많았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며 무슨 생각이란 걸 하긴 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모아놓은 돈을 까먹으며 8개월간 일을 쉬었다. 일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고 (누군들 하고 싶겠냐마는),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힘들면 사람을 찾고, 사람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었다. 천장만 보고 있다가도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약속을 잡고 나갔고, 의사샘이랑 수다 떨러 병원도 꼬박꼬박 나갔다. 선생님이 햇빛을 많이 봐야 한다고 하셔서 어우 귀찮아 하면서도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길 때마다 꾸역꾸역 기어 나갔다. 은근히 나돌아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저 우울증이래요 헿” 이러고 다녔다. 그 와중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내일배움카드로 귀금속공예도 두어 달 배워봤고 (내 길은 아닌 걸로), 짧지만 새로운 사랑도 해봤다 (고마워 마이클). 친구들은 여전히 “아무리 봐도 너 우울증 아닌데”라고 했다. 나는 심리상태가 얼굴에 혹은 분위기에 다 드러나는 인간인데도 사람들은 내가 우울증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했다. 사람을 좋아해서, 입 터는 걸 좋아해서, 밖에 있으면 조금은 밝아져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어둠 속에서 천장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