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화 증상
2020년 9월이었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까진 괜찮았다. 예상치 못한 이별에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경험 없이는 얻지 못했을 배움이 있었고 그간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며 나름 건강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별별 원데이 클래스를 다 들었다). 문제는 직장이었다. 당시 1년 약간 넘게 다니고 있었던 그 산휴대체 계약직을 난 정말로 사랑했었다. 임용고시 공부 하느라 경력이 없다시피 한 내게는 귀한 기회였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산휴 가셨던 분이 퇴사를 결정해서 그 자리에 정규직 채용공고가 났고, 같이 일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뽑히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셨다 (아마도…?). 7년 차 과장급 자리에 경력이 3년도 안 되는 내가 지원하는 것이 무리이긴 했지만, 부장님이 힘써주셔서 면접을 보게 됐다. 그런데 너무 간절했던 나머지 면접을 아주 거창하게 말아먹었고, 한 달간의 긴 희망고문 끝에 어느 밝은 가을날 정신없이 근무하던 중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그때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서있던 위치와 만지고 있던 부품, 창 밖의 햇볕. 심장이 쿵 하고 발밑으로 떨어졌다. 진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타이밍이 희한했다. 당시 집 바로 맞은편에서 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시멘트 바닥을 드릴로 뚫느라 매일 두두두 소리와 땅이 흔들리는 진동에 기상하곤 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불합격 통보로부터 며칠 후 회사에서 가만히 앉아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닥이 흔들리는 거다. 어라 여긴 집이 아닌데, 이 건물도 공사하고 있나 싶어서 맞은편 동료에게 혹시 지금 바닥이 흔들리고 있냐고 물었다. 동료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목소리로 아니요? 라고 했다. 흔들리는 게 바닥이 아니라 나구나 싶었다.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육안으로 봤을 때 난 전혀 떨고 있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는 조금은 우울해 보일지언정 아파 보이진 않았다. 양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봐도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그런데 몸속에서는 지진이 난 것 같았다. 드릴로 바닥을 뚫는듯한 그 진동이 온몸의 혈관을 통해 시도 때도 없이 느껴졌다. 처음엔 그냥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몇 주간 매일 아침 공사장 소리에 잠을 깨곤 했으니 몸에 베여버렸나, 그럴 수도 있겠다, 민원이라도 넣어봐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고 공사장이 조용해져도 몸속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퇴사 후 동료분들과 연말파티를 하던 중 지나가는 소리로 이 요상한 신체증상에 대해 얘기했더니 부장님이 조심스레 정신과를 가보라고 하셨다. 친한 친구분이 비슷한 증상을 겪으셨고, 정신과 약을 복용하셔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