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명
외국물도 두어 잔 마셔봤고 미국드라마 보느라 밤을 새운 나날도 많았던지라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는데, 뭔가 와닿지 않았다. 내가 무슨 정신과를 가나 싶었다. 가끔 심장도 제멋대로 뛰길래 심장 관련 문제이지 않을까 싶어 유명한 내과를 갔다. 권위가 느껴지던 그 의사선생님은 이런저런 검사를 하시더니 신체 멀쩡하다며 쿨하게 정신과를 가보라고 하셨다. 이쯤 되면 가보는 게 맞겠군 싶어 집 근처 정신과 병원을 알아봤다. 5개나 있었다. 평이 다 좋길래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택해 방문했다.
병원은 아늑했다. 데스크에 계시는 직원분의 미소가 따스했고, 가사 없는 음악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응접실엔 사람이 네댓 명 있었는데, 난 예약을 하고 방문해서 그리 오래 대기하지 않았다. 파워J에게 예약은 미덕이다 (정신과는 웬만하면 예약을 하고 방문하시라. 대기가 길어지면 한도 끝도 없다. 아주 유망한 분야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A4용지 서너 장이었나,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은 설문지를 작성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귀여운 느낌의 중년 남성 의사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검사지를 보시더니 곧바로 ”우울증과 불안증이 있으시네요 “라고 하셨다. 몸속에서 지진 난 것 같은 그 느낌이 불안증의 신체화증상이라는 것이다. 나의 첫 반응은 ”제가요?“ 였다. ”좀 힘든 일이 있긴 했지만 우울증씩이나요? 잘 모르겠는데…? 불안증은 뭐예요?“ 아니 뭐… 전문가가 그렇다 하시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난 잘 모르겠네… 약 먹는 게 좋다고 하시니 뭐 한 번 먹어는 보자 싶었다 (은근히 말 잘 듣는 편).
진료 후 찐친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야 나 우울증이라는데?“라고 했더니 친구들 반응이 대부분 “니가…? 어딜 봐서…?”였다. 내 말이. 불안증은 그렇다 쳐, 듣도보도 못한 증상을 몸소 겪고 있으니까. 그런데 우울증은 뭐람. 그거 되게 심각한 거 아닌가. 그냥 기분 좀 안 좋은 정도인 것 같은데, 병명이 붙을 정도로 점수가 안 좋게 나왔단 말인가. 와닿지가 않는데… 나 안우울한데? 부정의 단계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멍 때리다가 깨달았다. 아, 나 우울증 맞구나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