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노동자의 교육학 수업
시작 : 배달이란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었다
나는 ‘배달노동자’다. 또 임용교육학을 가르치는 노량진 강사다. 햇수로 4년, 달수로는 50개월, 날수로는 1500일 넘게 배달을 했다. 4만 건 넘게 음식과 물건을 날랐고, 자전거로 달린 거리가 5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자전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이상을 돈 셈이다. 다섯 번의 가을, 네 번의 겨울, 네 번의 봄, 그리고 네 번의 여름 동안 특별한 몇 날을 빼고 매일 길 위를 누볐다.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설날과 추석에도, 매일을 월요일인 것처럼 달리고 달렸다.
배달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일들도 사라졌다.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대면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정지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찾은 일이 배달이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지고 좌절을 할 때, 일을 할 수 있었고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가졌던 많은 편견들을 떨쳐버리며 살아간 날들이었기에 다행이었다. 전에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였고, 이렇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니세프 아저씨"다. 배달을 하며 새로 얻은 별명이다. 말 그대로 "유니세프(UNICEF) 아저씨"다. 그렇다고 UN 산하 국제기구인 UNICEF와 관련이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도 아니고, 유니세프에 후원금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쓰고 다니는 자전거용 헬멧에 UNICEF 마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자전거용 헬멧에는 머리 통풍을 위한 구멍이 앞, 뒤, 위로 여러 개 나 있다. 바람이 들어와 덥지 말라고 뚫어놓은 것인데,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황소바람이 들이쳐 머리 전체가 얼얼해진다. 그래서 구멍을 막는 용도로 아트박스(ARTBOX)에서 스티커를 샀는데 그것이 UNICEF였다.
배달을 하러 돌아다니며 가게 사장님들과 인사도 하고 가벼운 대화도 나누며 지냈다. 그런데 어떤 가게 사장님들이 나를 "유니세프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로 통성명을 한 것도 아니고 잠깐 인사를 나누는 처지인지라 그 분들이 나를 지칭할 때는 "유니세프"라 불렀다고 한다.
나는 매일 매일을 기록했다. 순간 순간을 기록했다.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배달을 하지만, 길 위를 달리며 많은 것을 보았고 들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수첩에 적었다. 잠시 멈춰선 건널목에서, 배달콜을 기다리는 길가에서 수첩을 꺼내 메모를 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특이한 사물을 찍었고, 평범한 일상을 찍었다. 꽃, 나무, 곤충, 동물들을 찍고, 하늘과 구름, 빌딩과 집들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수많은 사물들은 내가 길 위를 달리며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과 연결되었다. 배달을 하며 생겨난 생각이 내가 본 사물들에 감정이입이 되고, 거기서 또 다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람은 찍지 않았다. 아니 찍을 필요가 없었다. 사람보다 더 진기한 피사체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또 있다. 배달앱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핸드폰의 일반 카메라를 쓰지 못한다. 고객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배달앱에서 핸드폰의 카메라 기능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 하루 얼마나 배달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오늘의 기록>이라는 카메라 기능만 쓸 수 있었다. 날짜와 배달 건수, 달린 거리가 기록되는 기능이다. 지금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그 카메라 기능을 활용한 것이다. 카메라의 각도나 조도 등이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사진은 고퀄리티가 아니다. 아무런 기능도 없는 완전 수동 카메라로, 날 것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더 솔직한 사진이 될 수 있었고, 당시의 감정과 느낌을 나름 온전히 실어낼 수 있었다.
배달을 하면서 수많은 광경을 목격하였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계속 보았다. 그러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진기한 순간들을 마주하기도 하였다. 재미난 일들도 경험하였고, 코가 찡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경험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의 100분지 1, 1000분지 1 정도를 사진으로 옮길 수 있었다.
내가 쓰고 찍은 기록들을 글로 담아내며, 배달을 시작했던 처음 그 때를 되돌아본다. 배달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 있었다. '나에게 배달이란 무엇일까?' '배달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때 무슨 심정이었나?'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지 않는 이 일에 대해서,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
그러면서 문득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난생 처음 생업(生業) 삼아 하게 된 육체노동,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배달일을 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토바이 굉음과 철가방으로 대표되는 이 일을 하려면 창피함을 무릅쓰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내게 필요했던 것은 ‘용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는데 무슨 용기씩이나 필요할까?' '내가 가진 신념을 지키기 위한 "용기"인가?' '무서운 적들을 앞에 둔 "용기"인가?' 아니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었다. 내 안에 또아리를 튼 ‘허위의식’을 던져버리는 일이었다. 부정적 인식을 끄집어내 던져버리고, 내가 가진 잘못된 편견을 억누르고, 선입견을 타파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입을 의식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평가될 지를 두려워했었다. 손가락질을 무서워하고 뒷담화를 무서워하면서 정작 내 앞에 놓인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들을 저지르곤 했었다. 그런데 남겨진 결과는 후회 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과거’뿐이었다.
뒤늦게라도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고 깨닫게 된 것이 이 일로 인해 얻은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편견을 깨고 선입견을 버리고, 더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변화되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나는 길 위에 서서 길을 묻고 있었다. 일을 시작할 때 물었었고, 지금도 묻고 있으며, 내일도 물을 것이다.
배달해야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길을 물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기록할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넓은 도로와 좁은 골목길을 달릴 것이다. 유쾌하게 달릴 것이다. 지금 유쾌하지 않더라도 유쾌해지기 위해 달릴 것이다. 돈을 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삶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달렸던 길로 여러분을 안내하려 한다. 꽤나 엉뚱하고 흥미진진하고 코끼리가 나오고 곰이 나올 것 같은 그 길로, 여러분과 함께 달려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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