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좋아하지만 잘하지는 못한다. 무생채 담그기를 다섯 번 정도 실패했던가. 처음엔 유튜브로 다음엔 지인의 손맛을 베꼈다. 내 무생채는 번번이 싱겁거나 부족한 맛이 났다. 이제 진짜 안 해야지. 다시는 무생채를 하지 않겠어.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다짐했건만.
어제는 마트에 갔다. 간판 스탠드에 적혀있는 무 980원. 심지어 1480원짜리 무를 500원이나 세일한단다. 단단히 쌓여있는 무. 뭐? 얼른 데려가 달라고? 결국 손에 쥐어진 무-우 한 덩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죠. 네, 제가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엄마가 떠올랐다. 전라도 출신 외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손맛을 이어받은 나의 엄마. 엄마 도대체 뭘 넣어야 해? "일단 무를 절여야 돼. 굵은소금 세 숟갈 설탕 두 숟갈만 넣고 절여." 응 엄마.
45분간의 특급강의 후 앞치마를 둘렀다. 그런데 세상에.
30분 후에 깨달았지. 설탕은 안 넣고 소금을 네 스푼이나 넣었다는 걸. 간을 보는 순간 나는 염전에 온 것만 같았어. 아 여기가 바다인가?-
호기롭게 시작한 여섯 번째 생채는 단무지 맛이 났다. 현애인은 소금맛이 난다고 했다. 간을 보라며 먹여주던 나도. 기대하며 받아먹던 그도. 우리는 눈으로 욕을 나눴다. 잔뜩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 속이 상해 민아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오빠가 소금맛이 난대.
-민아: 입에 소금 와르르 부어주고 먹여봐
그럴걸 그랬나 봐.
한 시간 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무생채의 안부를 물었다. '나 정말 망했어 엄마'라며 울분을 토했다. 엄마는 별거 아니라고 했다.
"별거 아니야. 방법은 있어."
엄마의 별거 아니야. 는 그만의 위로법이다. 내가 속이 상할 때면 엄마는 늘 '별것도 아닌 걸로, 별것도 아닌데.'같은 말로 운을 뗀다. 사실 별것이었던 일들이 별게 아닌 일이 되는 것만큼 안정되는 게 없다.
엄마 나 오늘 어떤 사람 때문에 속상했어 → 별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라. 엄마 시험을 망쳤어(한창 자격증 시험 볼 때) → 별것도 아닌 걸로 속상해하지 마라.
그건 마치 재활용된 감정 같다. 나의 부정적인 감각을 잘 가꾸어서 새로 내보이는 마음이랄까. '긍정을 만들어드립니다.'라는 기계가 있다면, 그건50대 어느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로움이 아닐까. 감정을 다스리는 일, 어른이 되는 일은 어렵다. 잘못 뿌린 소금처럼 넘치면 짜고 부족하면 싱거운 어리고 여린 감정일랑 접어둬야지.
짜면 물에 씻어서 다시 하면 돼
아무튼 무생채는 염전에서 돌아왔다. 소금맛이 난다던 그도 적당해진 맛에 만족했다. 서운한 마음이 무와 함께 씻겨졌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감정을 두지 말 것. 이탈한 것들이 적정한 궤도에서 적당해졌다. 나의 음식도, 나의 감정도. 엄마와의 통화 끝은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로 맺었다.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해 본다. 기다려라 내 일곱 번째 무생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