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색깔 06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사리 Jan 07. 2024

주인 없는 의자

사라져 가는 발자국

 길을 걷다 멀리서 "안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베란다에 얼굴을 빼꼼 내민 여자아이였다. 나는 아이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깔깔 거리며 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어릴 적 동생은 창문에 붙어 있기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창문에 붙어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일을 좋아했다. 외할머니댁은 빌라 가장 아래층이었는데, 작은방에는 창문 아래에 앞뒤로 흔들거리는 의자가 있었다. 동생은 흔들거리는 의자에서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마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유치부 시절 우리는 웅변을 배웠다. 동생은 그렇게 배운 웅변실력을 이렇게 쓰더라.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그녀의 나이 다섯쨜.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목적지를 물었다. 보다 못한 엄마가 아는 아저씨냐고 물으면 세상 무해한 얼굴로 "모르는 아저씨야"라고 말하던 내 동생. 그때부터 관종끼가 다분했음이 분명하다.




 우리 집 아파트 입구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다. 다리가 아프신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였다. 가끔은 이름 모를 할머니가, 백발의 할아버지가 머물다 가시는 아주 작은 쉼터였다. 동생과 나는 손을 잡고 그곳을 자주 지나다녔다. 초등학교에 나란히 등교를 할 때도, 집 앞 슈퍼에 심부름을 갈 때도, 손을 잡고 걷는 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들. 그 눈을 지울 수가 없어서 꾹꾹 눌러 남겨놓았다.


그들은 우리의 걸음걸이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젊은 날 건강했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렸을까.


훗날 남겨질 젊은 걸음들을 응원했을까.




 이십여 년이 지나 주인 없는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남겨진 것들은 연고 없이 이별하는 누군가의 기별 흔적일까. 시들어버린 꽃이 머물던 화분처럼 새로 피어나 다시 사라지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 속에는 외할머니의 흔들의자가, 어린 우리가, 떠나간 시선들이 모여있다.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경비아저씨에게 인사한다. 집 앞 복도를 지나가다 마주치는 이웃에게도, 주인을 따라 네발로 뛰어가는 강아지에게도 '안녕'하고 인사한다.


남겨진 것들을 볼 때면 미래의 나를 바라본다.

'안녕'은 언젠가 돌아갈 나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다.


요즘은 베란다에 있는 작은 의자에서 여러 걸음들을 구경한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 걸음과, 세월이 담겨있는 어떤 걸음들을 마주한다.

훗날 나는 어떤 걸음을 내보일까 설레면서도 두렵다.


시간은 목적지 없는 기차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나의 발자국은 여전히 사라져 간다.

의자는 새로운 주인을 찾고, 또다시 떠나보내겠지.


내일은 부러 씩씩하게 땅을 디딜 예정이다.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누군가는 나의 씩씩한 발걸음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이전 05화 우리는 모두 생존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