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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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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Jun 15. 2024

고발과 고난사이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남기

처벌을 원하십니까?

네...



경찰이 내게 물었고 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아직도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다.


네 고통을 증명하라.

지난 한 달간 모은 자료만 100페이지쯤 되려나. 악성민원인 응대 이후 내 삶은 달라졌다. 아팠고 힘들었고 괴로웠다. 머릿속은 고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이었지만 손과 발은 이미 증거와 자료를 모으느라 바빴다. 가는 병원마다 진료확인서를 받았고 진단서를 요청했고 영수증도 따로 챙겨두었다. 통화기록 파일로 다운로드하여 녹취하고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음성을 문서로 변환하는 앱이 작동하는 동안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용기는 나지 않아 밖으로 나간다.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그 몇 분이 왜 그리도 길던지. 날카로운 음성이 희미하게 들리고 나는 또다시 그날이 생각난다. 머리를 흔들어 흔적을 지우듯 생각을 뿌리치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간다. 흘깃 보이는 글자들 속에서 그 여자의 비난의 말이 둥둥 떠다닌다. 거친 말들을 물리치듯 usb에 저장 버튼을 클릭한다. 저장이 잘 되었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멀리 치워둔다.



난생처음, 경찰서

병가가 끝나는 날, 노란 서류봉투에 증거자료를 차례대로 모으고 병원별로 인덱스를 달고 날짜별로 정리하고 클립으로 모아 흩트러지지않게 묶는다. 한없이 약한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이 모든 과정이 비장함을 담아 진지하게. 그리고 나는 그 문서와 증거자료를 챙겨 들고 경찰서로 향한다.


난생처음 이곳에 왔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옛날 학교처럼 어둑한 공간에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내 사건을 담당한 형사 1팀을 찾아 닫힌 문을 쭈뼛 열고 들어간다. 휑한 사무실에 쪼르르 앉은 네 명의 형사분들 가운에 내 사건을 담당한 형사님을 찾아가 그 앞에 앉는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 자리에 남편도 곁에 자리 잡고 앉는다. 경찰이 묻는다. 대개 성인일 경우 혼자 오는데 보호자를 동행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제가 지금도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라서요.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같이 왔어요.



경찰은 또다시 사건의 정황을 묻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하려 하지만 순간순간 떨리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냉정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대답하려 애쓴다. 담당 경찰은 받아 적은 조사서를 건네며 다시 한번 확인하고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읽고 확인한다. 몇 가지 수정사항을 말하고 경찰은 바로 고쳐 적고 출력한다. 출력한 조사서를 처음부터 한 장 한 장 넘기며 지장을 찍으라며 빨간색 인주를 건네준다. 이 모든 공식적인 과정을 끝내고 경찰이 묻는다. 더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앞으로 어떤 과정이 제게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뜻밖의 지원군

작성한 서류를 책상 한 곳으로 챙겨두고 경찰은 우리 둘을 경찰서 입구 민원실로 안내한다. 그리고 조금 편한 모습으로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을 한다.



처음부터 이런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이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고는 왔지만 경찰의 설명을 다시 한번 귀담아듣는다. 그리고 고백했다. 실은 신원을 감추고 도망간 악성민원인을 다시 고소해서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을 만드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고. 경찰은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악성민원인을 그냥 두면 그런 나쁜 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니냐고, 실제로 악성 민원인의 음성녹음을 같은 팀 경찰들이 같이 들었을 때, 그 정도가 심해서 다들 놀랐다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정말 고생이 많으시다고 공감의 말씀까지 잊지 않으셨다. 악성민원인이 처벌까지 되지는 않더라도 소환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쁜 행동이 자제되는 효과는 있으니 내가 담담히 절차에 응할 용기만 있다면 담당경찰은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딱히 내가 더 할 일은 없다고 하시면서. 기대하지 못한 반응이라 놀랐고 믿음이 가는 솔직 말씀이 또 고마웠다. 


경찰서에 오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지, 고난에 가까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웅얼거리기만 하는 못 미더운 정신과 의사 앞에서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해야 했고  이유와 정당성까지 구구절절 설명 해야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과정은 의사의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설득하고 점검하기 위한 절차였던 것 같다. 이름도 생경한 고소라는 것을 온전히 혼자서 겪어내는 데서 불안감이라고나 할까. 답답한 마음에 지인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렇게 이미 정해진 답에 쓸데없는 걱정더하며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고 있었는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일단 만든 서류가 아까우니 경찰서에 가보자. 가서 담당경찰이 이까짓 사안으로 접수하냐면서 귀찮아하거나 무시하면 못 이기는 척 덮어버리자라고 우왕좌왕하는 마음을 정리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담당경찰은 솔직하고 성의 있는 태도로 내 고민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하루 더 고민해 보겠다는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결국 불필요한 고통의 시간을 하루 더 늘려놓았을 . 다음날, 밤 10시, 연장된 고민의 시간 끝에 고소를 진행하겠다는 짧은 답을 쓰고 지우고 망설이다 결국 전송버튼을 눌렀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었지만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올해, 3월 교육부에서 <학교민원응대자료>가 내려왔었다. 내용은 각 학교에서 민원대응팀을 만들고 민원매뉴얼 작성해서 연수를 진행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학교 공문함을 뒤졌다. 이 공문은 3월에 왔었고 그 이후, 우리 학교는 그 어떤 계획도 매뉴얼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민원 응대자료>에는 똑똑히 적혀있었다.


<학교민원응대자료> 10쪽, 교육부, 2024.03.


나는 그 폭언을 들을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었던 거였다.


참담했다. 이 모든 걸 내가 겪을 필요로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바로 잡고 싶었다.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3주 병가가 끝나고 출근 첫날, 교감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후, 조심스럽게 말씀드린다. 우리가 빠뜨린 게 있습니다라고.


아. 미안해요. 내가 놓쳤어요.



교감선생님은 즉시 실수를 인정하셨다. 나는 바로 민원대응팀을 만들고 계획서를 작성해 선생님들께도 꼭 연수해 주십사 간곡히 부탁했다. 여러 학교에서 수소문해서 얻은 민원대응계획 예시파일도 전해드리면서. 그리고 일주일 만에 우리 학교에서도 민원대응계획서가 만들어졌고 가정통신문으로도 공지되었다. 그리고 지난주에 교직원 연수도 진행되었다. 드디어 한숨 돌렸다.




'피하는 것' 대신 '바로잡기'

나를 걱정하는 지인 중 10에 8,9는 고소하지 말라고 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저 병가를 내고 좀 더 쉬라고. 다들 또 다른 고통을 자처할 수도 있는 행동은 하지 말았으면 했다. 먼저 드는 생각은 나를 걱정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그저 참기만 해서는 세상이 바뀌진 않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받는 일은 멈추게 하고 싶다는 순도  100%의 정의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선 어울리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것이고 어떤 때는 더 많이 다치기도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지만.


'굳이 왜'를 외치는  안의 소리에 '나라도'라고 외치는 마음이 이겼다. 만약 그 반대의 결정을 해도 내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얻은 결과라면 후회 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포기하고 피해서 얻은 안전함은 내겐 비겁함으로 해석되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힐게 뻔했기 때문에. 누가 말릴까. 결국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해내고 마는 고집을. 모르겠다. 일단 최선은 다했고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내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까 오만일까.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데로,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면 그걸로 된 거다. 속으로 되뇌며 불안한 마음을 다잡 교실로 향한다. 오늘은 좀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스스로에게 힘찬 주문을 외우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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