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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얼굴 까고 애기하자

영화 '다음소희' 편

by 별의서랍


“아저씨,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수화기를 뺨에 댄 나는, 내 자신도 어색할 만큼의 고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나만의 첫 매장을 오픈한 감격스런 9월의 초가을이었다.
갑작스레 매장에 전기가 나가더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손님은 계속 밀려들어왔다.
급한 마음에 전기공사를 담당했던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간절한 마음을 담은 통화연결음은 음성사서함에 바턴을 넘겼다.
그렇게 지나간 1시간 , 나는 폭발 직전이었다. 1시간이 10시간 같았다.
통화연결음이 돌림노래처럼 들릴 쯤, 간신히 전기아저씨와 연결되었다.

거칠고 투박한,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
내 마음 속 온도와는 너무나 다른 아저씨의 건조한 목소리는 내 마음 속 트리거를 당겼다.

“아저씨, 왜 전화를 안 받아요! 그리고, 이게 뭐에요. 전기 나가서 손님 하나도 못 받고 있다고요!!

말하면서도 내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난 살면서 누구에게든 그렇게 화를 내 본적이 없다. 이런 소심한 성격의 나한테서 이런 고성이 나갈 수 있다니.

자영업 너, 대단하다.
자영업 너, 정말 쉽지 않구나.

마치 남일을 대하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아저씨가 더 얄미웠다. 난 이렇게 급한데.

바로 그 다음 날,
검게 그을린 얼굴에 포근한 인상의 아저씨 한 분이 매장에 들어온다.
나의 잠자던 고성을 세상에 눈 뜨게 해 준, 바로 그 전기아저씨다.


"안녕하세요."


수더분한 얼굴에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어제, 뭘 한 거지..“ 속으로 생각했다.

”아저씨, 어젠 죄송했어요..그리 급한 일도 아닌 건데..“

대화해 보니, 둘 사이 약간의 오해가 있던 거였다.
아저씨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어제의 오해를 말끔히 해결했다.




영화 ‘다음소희’ 는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콜센터를 배경으로 한다.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라 충격은 더 크다.
밝은 성격의 18세 소희는, 졸업예정자로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되고,
상상할 수 없는 노동착취와 인권침해를 겪으며,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되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사건을 파헤치는 담당형사 ‘유진’의 시야를 따라가며, 비극의 현장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약 1년 정도 콜센터를 경험해 본 내 여동생은,

”오빠, 거기 사람 일할 데 아니야..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야근은 일상이야..“

여동생은 그 후 콜센터와 영원히 작별했다.

길진 않지만, 나 역시 반나절 일한 경험이 있다.
대출업체였는데, 오전 미팅 때 나눠준 고객DB를 활용해 성능 좋은 로봇처럼 전화만 하면 되는 거였다.
시간당 페이도 높았기에 난 망설임 없이 그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근무시간. 3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난, 한통도 걸지 못했다.

그 3시간 동안, 그 전쟁터에선 수많은 폭탄들이 날아들었다.
날 가르치던 담당사수는 고객과 찰진 욕을 섞어가며 사투를 벌이다 자리를 박차고 사라졌고,
나와 동기뻘인 친구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모니터에 두 눈을 파묻은 체 일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난 관리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틈을 타, 그 곳을 탈출했다.




그 순간만큼은, 밤낮으로 나를 조이던 카드연체금도,
두 달 치는 밀려있던 핸드폰 요금도 보이지 않았다.
탈출만이 내 살 길이였다.

사람이라는 존재, 참 신기하다. 평소엔 부드럽고 성실한 사람도, 수화기만 들면 난폭해진다.
평소 성실하기 그지없는 청년도, 예비군에 가기 위해 군복만 입게 되면 동네 한량으로 변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상대방의 존재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더 적나라한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
콜센터 관계자들은 단지 '목소리' 하나로 우리의 표정, 감정, 인상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날카로운 상처로 남는다.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 고통을 조금만 더 이해하자,
조금만 더, 배려하자."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언제나 친절한 미소와 음성으로 하루를 열어주시는 콜센터 관계자님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사는 존재다.
상대방이 혹시 나를 화나게 한다면, 필히 이 한마디만 기억하자.

”일단, 우리 얼굴 보고 애기합시다.“


며칠 뒤,

외근을 하고 집에 가던 중, 아내의 잔소리 속사포랩이 수화기 너머로 내 귀를 찌른다.

강렬한 랩으로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애기한다.


"일단, 집에 가서 애기하자."


그 날, 나는 아내의 런닝타임 3시간 짜리 잔소리랩을 견디고, 또 견뎌야했다.


그렇다.

결혼은, 잔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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