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교육철학은 줄탁동시와 교학상장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어미닭은 알을 품고 있다 일정한 시간(약 3주)이 되면 밖에서 알 껍질을 쪼는다. 어미닭은 병아리가 알 껍질을 잘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미닭의 쪼는 모습을 보면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날 정도다. 어미닭의 날카로운 부리가 어린 병아리를 졸까 봐서다. 밖에서 어미닭만 알을 쪼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도 어린 병아리가 여린 부리로 껍질을 깬다. 안팎에서 알을 깨는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연출된다. 어미닭과 병아리가 껍질을 사이에 두고 '줄~탁~'이라는 소리를 내는 듯싶다. 부화(孵化, incubation)의 다른 동의어는 '줄탁'이다['줄탁동시(啐啄同時)'에서 줄(啐)은 쵀('부르다')의 의미로 사용할 때는 '쵀탁동시'로 적기도 하고 간혹 줄탁동기(啐啄同機)로도 쓴다].
닭 알은 두 단계의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1차 방어막이 알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라면, 2차 방어막은 흰자다. 알 안으로 어떤 세균도 침투할 수 없도록 철통 방어를 하고 있다. 물론 꽉 막혀 있는 건 아니다. 껍질 안의 생명이 숨을 쉬어야 하기 숨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닭 알 껍데기에는 수많은 구멍을 뚫어져 있다. 2천 개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알 한 개 무게가 무려 2kg가 되고 달걀 20개가 훨씬 넘는 크기의 타조 알에는 무려 3만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불가사의 한 세계다. 자연계의 생명체를 놓고 인간의 눈으로 쉽게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과 오묘함 그 자체다.
줄탁동시는 교육의 영역에서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을 비유하는 말로 널리 사용한다. 어미닭은 교사요 병아리는 학생에 비유할 수 있다. 학생은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는데 교사가 밀어붙이는 식의 교육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또 학생은 준비가 되었는데, 교사가 이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학생의 기대에 맞추지 못해도 효과는 떨어질 것이다. 누군가를 교육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교사는 어미닭처럼 본능적으로 병아리가 밖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줄탁동시의 중요성이다. 줄탁동시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강의 중에 줄탁동시를 강조하다 보니 저자의 애칭은 '줄탁동시 교수'다. 저자의 이름 석자는 몰라도 줄탁동시 교수하면 '아, 그 교수님!'하고 알아챈다. 학생들이 부르는 이 호칭이 싫지 않다. 저자 자신도 호칭에 맡는 역할을 기꺼이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매주 월요일 저자의 교과목을 수강하는 학생(학습자)에게 문자를 보낸다. 내 과목을 수강하는 학습자와 한 번이라도 더 교육적 상호작용을 하기 위함이다. 20년 넘게 해오고 있다. 문자는 계절적 요인, 시험이나 과제 등 학습자가 극복해야 하는 학습부담감, 학습설계 혹은 학습전략 등 학습자가 직면한 내면적, 외부적 조건이나 환경을 고려하여 주제를 정하고 내용을 채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난 학기에 보낸 문자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다. 문자에 삼감(감동, 감화, 감탄)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어쩌다 깜빡하고 문자를 보내지 않는 날에는 학생들로부터 연락이 온다. "교수님, 어디 편찮으세요?" 저자는 정신이 번쩍 든다. 그 학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저자의 문자를 기다리는 학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다. 문자를 보내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새벽같이 문자를 보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거나 문자를 보고 힘을 얻길 바라는 성큼한 기대로 새벽에 보냈다(사실, 더 일찍 보내고 싶었지만 아침 6시가 되길 기다렸다가 보냈다). 어떤 학생이 피드백을 보내왔다. "교수님, 이른 시간에 문자 보내지 마세요. 저는 무슨 긴급한 내용인가 하고 내심 긴장했습니다. 요즘 민감한 일이 많아서요. 송구합니다." 아무리 교수가 좋은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줄탁동시를 하려고 해도 학습자가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학습 환경이 여의치 않으면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심리적 긴장감과 부담만 주게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최상의 시간대는 월요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다. 이 시간대는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의 번잡함을 해소하고 차분하게 자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4년 4월 29일 월요일에 보낸 문자다.
반갑습니다.
바야흐로 산과 들은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입니다. 계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채로운 색깔로 변하는데, 여러분이 학습에 임하는 의지와 마음은 어떤 색깔인지 궁금합니다. 입학할 때와 학기를 시작할 때 가졌던 초심대로 뜨거운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빨간색을 유지하는 학습자도 있을 것입니다. 강도가 약해진 노란색으로 바뀐 학습자도 있을 것입니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열기가 차갑게 식어버린 파란색이 되어 학습무기력에서 허덕이는 학습자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나 의지는 외부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누구든 초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문자로 상호작용을 하고, 여러분은 멘토링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다양한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학습에 필요한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다양한 노력을 하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는 마라톤으로 비유하자면 반환점을 돌고 맞닥뜨리는 하트브레이크(심장이 깨질 듯이 코스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를 앞두고 있는 시점입니다. 부디 호흡과 보폭을 조절하면서 난코스를 이겨내기 바랍니다. 저를 여러분 곁에서 함께 뛰고 있는 그림자 선수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모두 파이팅~입니다.
일교차가 크면 호흡기 건강 관리가 필요합니다. 감기 조심하기 바랍니다.
2024년 4월 29일
교육학개론
염철현 교수 드림
문자 분량은 너무 길어도 가독성이 떨어지고 괜한 잔소리처럼 보일 수가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지난 20년간 매 학기 13회를 보냈으니 대략 520회 문자를 보낸 것이다. 저자의 문자를 받은 학생이 나에게 피드백을 할 의무는 없다. 간혹 수백 명의 수강생 중 일부 학생이 학습의 어려움, 인지능력 저하에 따른 좌절감, 과제 해결 방법 등에 대한 문의를 해온다. 저자는 그 학생과 상호작용하면서 친절하게 답변해 준다. 어떤 기회에 대면으로 만날을 때 문자로 대화하면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고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가르치는 본분을 가진 교수로서 가장 보람 있고 가장 행복하다. 거창하게 말하면 줄탁동시의 효과다.
저자가 학생들과 유무형의 상호작용에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1970~80년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했던 헨리 로사브스키(Henry Rosovsky) 교수의 교육철학을 실천하고 싶어서다. 로사브스키 박사는 교사와 학생 간의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교육은 언제나 신비스러운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량화나 과학적 설명 그리고 생산성에 대한 측정을 어렵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항상 존재한다. 교육과정은 골격(뼈대)에 불과하다. 살과 피와 심장은 교수와 학생 사이에 일어나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호작용'에 의해서 형성된다(Curriculum is a skeleton. The flesh, blood, and heart has to come from the rather unpredictable interactions between teachers and students)."
교육의 효과는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도 수치로 표시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영역이다(작물이라면 얼마만큼 뿌리를 내리고 얼마나 열매를 맺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물을 뽑아보거나 열매를 열어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최고의 교육과정을 수립, 편성했더라도 그것은 골격에 불과하다. 골격에 살이 붙고 심장이 작동하면서 피를 돌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간의 '인격적 상호작용'이 필요한 법이다. 중요한 점은 상호작용의 조건이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저자가 알고 있는 중등학교 교사의 회고는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학창 시절 자신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던 제자가 사회에서 성공하여 학교로 찾아온다. 그 제자도 나이 먹으면서 철이 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가 힘들게 했던 은사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 언젠가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라고 회고했다. 인간관계에서 그것도 감수성이 왕성한 청소년 시절에 교사와 학생이 인격적인 만남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감화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영향은 평생 지속된다.
교육의 신비스러운 효과 때문에 교사는 한 명의 학생이라도 포기할 수 없다. 특히 어린아이들일수록 교사가 미치는 영향이나 교육의 파급효과는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 교사의 눈으로 교육의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의 미래를 성급하게 진단하는 것은 그 학생에게는 무서운 낙인이고 형벌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쉬운 문제도 풀지 못하는 너의 앞길은 보지 않아도 훤하다" "멍청한 녀석, 너는 뭐를 해도 안돼" "싹수가 노랗구나" 등의 말은 인격살인이요 저주에 해당하는 말이다. 자기 자식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은 작물이나 화초에 해당하는 말이지,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다. '아이들은 열두 번 바뀐다'라는 말은 현재는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을지 몰라도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는 잠재적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니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이 사례만은 꼭 들고 싶다. 나무 중에 가죽나무(樗, 가죽나무 저)가 있다. 가죽나무(樗樹)는 '가짜 죽나무'라는 뜻으로 식물분류체계로는 소태나무과의 낙엽 활엽 교목이다. 사전에서는 가죽나무를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가죽나무의 효용 가치를 알고 나면 인간의 편견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엉뚱하여 마치 '생사람을 잡듯' 생나무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나 자기를 낮춰 말할 때 저력지재(樗櫟之才)라고 했다. 저(樗)는 가죽나무를, 역(櫟)은 참나무를 말한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 부르는 것은 좋지만 자연계와 인간계에 유용한 나무에게 쓸모없다는 편견의 덫을 씌우는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의 무용지용(無用之用) 고사 중에 가죽나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장자의 죽마고우 혜시(惠施)와의 대화 내용이다.
혜시: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르길 가죽나무라고 하오. 큰 줄기는 울퉁불퉁한 옹종이 있어 먹줄을 칠 수도 없고 작은 가지는 돌돌 말리고 굽어져 그림쇠와 곱자를 댈 수 없으니 길가에 서있으되 목수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
장자: "지금 자네는 큰 나무가 있어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고장의 광막한 들에 그 나무를 심어 놓고 편안하게 그늘에 누워 있지 못하는가? 그러면 나무는 나무꾼의 도끼날에도 찍히지 않을 걸세. 아무도 그것을 해치지 못하지. 아무 데도 쓰일 바가 없으니 무슨 괴로움이 있는가?"
위 대화는 쓸모없음(無用)이 유용(有用)으로 바뀐다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는 것의 쓰임새에 대한 장자의 철학을 뜻하는 유명한 고사다. 혜시와 장자의 대화는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이 없다'라는 교훈적 역설을 배울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가죽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로 인식하게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 않나 싶다. 이 역설은 나무에게나 통하는 말이지 사람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낙인 찍으면 무용지용이란 역설이 통할까 싶다.
사람들이 무용한 존재로 낙인찍어버린 가죽나무는 정말로 유용성이 없는 것인가. 가죽나무는 가구나 농기구에 필요한 목재로 널리 쓰이고, 뿌리껍질은 이질, 치질, 위궤양 등의 치료를 위한 약재로 쓰이며, 잎은 사료로 쓴다. 학교나 공원 등의 조경수나 가로수로 심기도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미닭과 병아리의 줄과 탁의 하모니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된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생명은 적시에 알에서 깨고 나온다. 다음 주에 학생들에게 보낼 문자의 내용을 생각해 본다.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는 병아리가 무사히 밖으로 나오길 바라는 이 선생의 소박한 바람을 담은 글 말이다. 무엇보다 어미닭이 병아리가 언제 밖으로 나올지에 대한 시간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교사가 학생에게 정확한 깨우침의 계기를 포착하여 적절한 자극을 주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줄탁동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교사는 교과목 관련 지식 외에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오감을 민감하게 하고 시야와 식견을 넓히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줄탁동시는 생명의 탄생을 알리고 우리 내면의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사랑의 하모니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가.
로사브스키, 헨리. (2006). 대학, 갈등과 선택. 이형행 옮김. 서울: 삼성경제연구소.
박성진. 우리나무 이야기. 김영사.
헤세, 헤르만. (1991). 데미안. 김충남 옮김. 서울: 학원사.
이종민. (2023). 매일경제.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쓸모없는 게 곧 쓰임새(無用之用), 가죽나무.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