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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y 09. 2024

추사(秋史)의 삶에서 배우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제자에겐 자애로운 시대의 지성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다. 추사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명필로 손꼽힌다. 독창적인 추사체의 영향이 커서 그럴 것이다(추사가 사용한 아호, 낙관, 도인에 쓰인 글귀는 무려 200개나 된다고 한다. 추사 아호의 기본은 추사와 완당이다). 저자에게 추사는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가로 인상 깊게 남아있다. 금석학은 고동기(古銅器)나 비석(碑石)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실증과 고증, 해독과 해석의 방법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한 분야다. 추사는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함경도 함흥 함초령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했다. 추사의 재능과 역량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그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는 국보로 지정될 정도의 높은 예술성과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자는 추사에 대한 연구자는 아니지만 그에 대한 문헌과 기록을 읽고 난 뒤에는 그를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누군가를 본으로 삼고 배우는 것)하게 되었다. 그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면 '인문학의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학이란 인간이 남긴 흔적이나 동선을 좇아 그 의미를 파악하여 우리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사의 인문적인 작품과 활동은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후예로서 인문의 거장(인)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네 가지로 그 교훈을 추려보았다.


첫째, 추사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끊임없이 수련으로 재능과 역량을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추사가 제자들에게 수련을 강조하는 말이 전해진다.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상하 귀천이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오직 확충하여 끈질기게 중단 없이 정진하면 구천구백구십구 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 일분도 사람의 힘으로 못할 것이 없으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한다." 0.01%의 부족을 채울 때까지 연찬(硏鑽)하라고 독려했다. 추사체만 해도 섬세하고 꼼꼼하며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던 추사가 빚어낸 결정체지만 결코 쉬운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추사가 그만의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기까지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유홍준, 2018: 398-399). 사람이 신고 다니는 구두의 밑창이 아니라 '벼루 열 개를 밑창 낸다'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추사가 서체를 완성하기까지 그의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을 보탰다는 술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완벽을 추구하는 추사의 예술세계를 두고 “추사(秋史)는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금석서화가(金石書畵家)란 의미로 자신을 이른 명호이다. 추사는 가을 서리같이 엄정한 금석학자이자 서화가란 의미이다”라고 주장하는 추사 연구가도 있을 정도다.


둘째, 추사의 예술과 학문 세계는 두 번의 유배생활을 거치면서 더 높고 더 깊어졌다. 추사는 명문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고조 김홍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인간은 고난과 형극을 통해 단련되고 그의 사유세계가 확장되고 인품도 원만해진다고 본다. 만약 추사가 명문가의 후광으로 탄탄대로만 걸었다면 추사의 예술과 학문 세계는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추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젊은 시절 추사는 관용과 미덕이 부족했던 것 같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추사는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을 정도로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렸던 것 같다. 한마디로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할 말은 해야 한다'라는 원칙은 곧 많은 적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결국 정적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유배형의 고초를 받았다. 추사는 학예에서 '최고'라는 지나친 자부심으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유배형을 살면서 인간에 본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추사의 곤이지지(困而知之), 즉 고생으로 깨달은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예술과 학문 세계에도 반영되어 추사의 작품을 한 차원 더 끌어올렸다고 본다.  


셋째, 추사는 공부하고 가르치길 좋아하는 지식인이었다. 추사는 시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금석학에 대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 중 하나다. 당대의 고승과 교리 논쟁을 벌일 정도로 해박한 불교 지식을 가졌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는 막역한 지기였다. 무엇보다 추사는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재능만 있으면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지도하였다. 신분계급이 존재하고 반상(班常, 양반과 상놈)의 질서를 엄격히 따졌던 조선에서 쉽지 않은 처세다. 추사에게 직간접적으로 지도를 받은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흥선대원군 이하응, 전라우수사 신헌, 개화파 강위, 역관 이상적, 오경석, 김석준, 화가 허련, 전각가(낙관에 쓰이는 도장에 전서를 새기는 사람) 오규일, 필장(筆匠, 붓 만드는 사람) 박혜백 등 직업의 귀천이나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 왕족으로부터 고위관직에 있는 사대부는 물론 오늘날의 통역관, 화가, 장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추사는 제주유배지와 함경도 북청유배지에서도 지역의 인재들을 발굴하여 가르치고 그들을 한양의 지기들에게 추천하였다.


추사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아낌없이 베풀었는가는 <서화경연대회>(추사의 제자 우봉 조희룡이 주관)에서 엿볼 수 있다. 1849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나 용산에 머물 때였다. 14명의 젊은 서화가들이 추사에게 글씨와 그림을 지도받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추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는 물로 구체적인 기법이나 이상적인 심미관 등 서화에 관한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며 상세한 품평을 해주었다. 신분과 계급을 엄격히 따졌던 조선사회에서 사대부 출신의 대학자와 중인계급의 서화가들이 신분과 계급의 벽을 허물고 한 자리에 모여 품평회를 열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파격이었다. 그 품평의 기록이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다. "오른쪽 한 줄은 아주 뛰어나고 아름다워 과연 법도에 맞는다고 일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왼쪽 한 줄은 아직 정리되지 않아 표준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것은 행을 나누는 데 주의를 하지 않아서 이렇게 비뚤어지게 된 것이다. (...)." "배치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 또한 막힘이 없다. 다만 색칠을 할 때에 세밀하지 못하고 또 우산 받치고 가는 사람은 조금 환쟁이 그림같이 되었다." "그림에는 반드시 손님과 주인이 있어야 하니 이를 뒤집어놓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그림은 자세히 보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붓놀림은 비록 재미있는 곳이 있으나 부득이 제2등에 놓지 않을 수 없다." 저자도 학생의 리포트를 받은 뒤에 기간을 정하여 피드백(품평)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품평을 해준다. 학생의 잘한 점, 아쉬운 점 등을 열거하며 리포트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조언을 한다. 앞으로 피드백은 말을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추사처럼 글로 작성하여 더 자상하게 조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추사가 대학 교수였다면 실력 있고 제자 사랑하는 교수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넷째, 추사의 인간미 넘치는 호쾌함과 솔직함에 빠져든다. 높고 깊은 학문과 예술 세계를 구축한 추사가 남의 작품이나 주장을 폄하하고 평가절하하는 시절이 있었다. 추사가 그의 지적인 우쭐함과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믿고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주장을 일갈했다는 일화들이 전해져 온다. 제주 유배 기간(55세~63세, 1840~1848)에 일어난 일화다(그때 제주를 가기 위해서는 한양에서 전주,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다). 첫 번째 일화는 추사가 유배지 제주를 가는 도중 전주를 지날 때 지역에서 유명한 서예가 창암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을 만났을 때, 창암이 추사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다. 추사(55세)는 창암(71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인정머리란 찾아볼 수 없는 비정한 혹평이다(좀 더 심하게 해석하자면 '촌 구석에서나 통하는 글씨입니다'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두 번째 일화는 완도에 가기 전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들러 오랜 벗 초의선사를 만나 대웅전의 현판 글씨 <대웅보전(大雄寶殿)>를 보고 저 현판을 떼어 내리고 추사가 쓴 글씨를 달도록 했다. 그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다. 세 번째 일화는 1843년 추사가 제주에서 당대의 대선사인 백파(白坡, 1767~1852)와 논쟁을 벌이면서 백파선사의 오류를 지적해 '백파 망증(白坡妄證) 15조'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보냈다. 백파선사는 부인상(婦人喪)을 당한 추사에게 문상 편지를 보냈는데 추사는 반박 편지를 보냈다. '망증(妄證)'이란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정상을 벗어난 증언'을 말한다. 망령이 들어 이치에 맞지 않은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저자는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몰라 그 내용을 자세히 드러다 볼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다. "선생은 선문(禪門)에서 망증과 망해(妄解)를 일삼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대담하게 복희(伏羲), 문무(文武), 주공(周公)의 글에까지 손을 대는가? (...) 어찌 이같이 무엄하고 무탄(無憚)할 수 있는가. 이미 적연부동이니 감이수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처럼 망령되게 논증을 할진대 진공이니 묘유니 하는 것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논증한 것이 분명하다.(...)" 추사의 지적인 우쭐함과 오만이 만든 대참사였다.


추사와 관련된 일화를 보면 추사가 인격적으로 흠결이 많은 사람으로만 비칠 수 있다. 추사의 인간적인 진면목은 그가 9년 간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육지에 도착했을 때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과거 실수를 사과하기 위해 당사자를 직접 만나고 했다.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를 만나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달게 했다. "내 글씨를 떼어내고 이 현판을 다시 달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 원교의 글씨는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추사는 초의선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서둘러 정읍으로 떠났다. 추사가 '망증'이라고 공격했던 백파스님에게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추사와 백파스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추사가 정읍으로 가는 날 폭설이 내려 약속시간을 맞추지 못한 탓이었다. 나중에 추사는 백파선사 비문을 지어 사과에 대신했다. 전주에서 추사는 창암 이삼만을 찾아뵙고 그의 글씨를 비판했던 것을 사죄하려고 했다. 창암은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비명을 쓴 것으로 사죄에 대신했다.


창암 이삼만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본래 이름은 이규환(李奎煥)이었지만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학문과 교우와 장가가 늦었다 하여 이름을 삼만(三晩)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창암은 그의 부친이 독사에 물려 죽자 뱀을 보는 대로 잡아 죽였다. 매년 정초에 측간이나 곡간의 기둥에 이삼만(李三晩)이라고 쓴 종이를 거꾸로 붙여 뱀의 출입을 막는 풍습이 생겼을 정도다.  


추사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엄청난 수련으로 서예가로서 금석학자로서 일가를 이뤘다. 그는 신분과 직업을 따지지 않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자신의 네트워크를 연결해 중인계급의 제자들의 재능을 키워주고자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사과할 줄 아는 따뜻하고 깊은 인간성을 소유한 조선의 지성이었다. 추사는 겉으로는 강하고 거칠게 보이는 깐깐한 조선의 사대부로 보이지만, 속은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 한 없이 자애로운 스승이었다. 조희룡은 스승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오백 년만에 다시 오신 분'이라고 통곡했다. 추사의 평생의 벗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은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학문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습니다(山嵩海深)"라고 추모했다. 신분을 초월한 동갑내기 벗이며 도반(道伴)이었던 초의선사는 "도에 대한 담론을 할 때는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는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다"라는 제문을 지어 바쳤다. 저자가 추사를 사숙하고 그가 우리에게 남긴 인문의 향기를 좇아가는 노력을 지속해 나가는 이유다.

 

김봉호. (1992). 초의선사와 완당 김정희. 서울: 우리출판사.

오성찬. (1993). 추사 김정희. 서울: 큰산.

유홍준. (2002). 완당평전. 서울: 학고재.

유홍준. (2013). 김정희. 서울: 학고재.

유홍준. (2017). 안목. 서울: 눌와.

유홍준. (2018). 추사 김정희. 파주: 창비.

이가환. (2018). 경향신문. 추사의 독설, 뒷담화에 상처입은 사람들. 7월 12일.

한정주. (2014). 헤드라인뉴스. 추사(秋史) 김정희② 고증학·금석학·역사학의 독보적 권위자.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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