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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고서 속 그림자, 역사의 빛

— 삶의 그림자, 회복의 빛 —

by 제이욥

한서진 박사의 삶은 언제나 고요한 고고학 연구실과 먼지 쌓인 고문헌 속에 있었다. 그는 국내 최고의 역사 연구소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고고학자였다. 그의 손을 거친 유적 발굴과 고대 문헌 해독 프로젝트들은 늘 학계의 통설을 뒤집는 혁혁한 성과를 제시했고, 그의 이름은 '고대의 탐정'으로 불렸다. 그는 유물과 문헌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나 감정보다는, 오직 객관적인 증거와 연대기로 증명되는 사실에 주력했다.


그에게 역사란 '명확한 기록'이자 '재해석해야 할 퍼즐'이었다. 민간의 전설이나 구전되는 서사는 그에게 '비객관적인 허구'일 뿐이었다. 고도로 정밀한 탄소 연대 측정, 완벽하게 해독된 비석의 문구, 그리고 발굴된 유물의 층위 분석…


이 모든 것이 '가장 합리적인 역사'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그의 모토는 "역사는 사실로만 말해야 한다"였다.


“현재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는 기원전 2세기 초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기존의 기록과는 5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패권 변동이 이 시기에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주민들의 생활상과 관련된 구전 기록은 학술적 가치가 미미합니다.”


그는 학회 발표에서 늘 단호하고 자신감 넘쳤다. 그의 과학적인 고고학적 접근 방식 덕분에, 그가 담당하는 연구는 늘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전 세계 유명 학술지는 그의 논문에 주목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실증주의 역사의 기수', '과거를 깨우는 지성'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이 존재했다. 아무리 완벽하게 재구성된 역사와 엄청난 학술적 성과를 보아도, 그는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고도로 계산된 연대, 완벽하게 조율된 문헌 해석… 그것은 완벽했지만, 어딘가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에서 듣던 전설 속 주인공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느꼈던 소박한 감동은 이미 오래전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의 연구 뒤에 드리운 '삶의 그림자'를 애써 외면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역사의 본질일까? 완벽하게 정립된 사실 속에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지? 이 학문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과거를 파헤치는 걸까?"


그는 종종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대답을 찾기 전에 다음 발굴 프로젝트의 복잡한 지층 분석과 마감 기한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의 연구실 책상 한구석에는 덮개에 덮인, 어릴 적 할머니가 전해주셨던 낡은 '비망록'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쯤으로 여겨 거의 펼쳐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진 박사에게 예상치 못한 불운이 닥쳤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재구성했던 고대 왕국의 흥망성쇠에 대한 대규모 학술대회에서 치명적인 비판을 받은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설명하며 발표를 이어갔다. 하지만 한 노학자는 그의 발표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박사님의 연구는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인간의 고뇌와 환희, 그 시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역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차갑게 나열된 연대와 유물로는 그 시대의 진정한 '삶의 그림자'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토록 완벽한 퍼즐 속에 정작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이 빠져 있는 듯합니다.”


노학자의 지적은 서진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의 완벽한 역사는 한순간에 '껍데기'로 비난받았다. 언론은 그와 그의 연구에 '인간성 상실'이라는 비판을 쏟아부었다. 그의 화려한 연구 인생이 한순간에 멈춰버린 듯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손에는 남은 것이라곤 수많은 인용 지표와 함께, 공허함과 극심한 좌절감만이 가득한 머릿속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진실'이 '맹점'으로 변한 삶의 그림자 앞에서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다시는 유물 발굴 현장에 나설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 고문헌 해독 중이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학술적 가치가 없다며 외면했던 특정 시기의 민간 설화집 속에서, 고문헌 연구팀이 해결하지 못했던 특정 문양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설화집에는 평범한 백성들의 애환과 작은 희망이 담긴 이야기가 빼곡했다. 서진은 늘 “구전은 비객관적이다”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후배는 “가장 작은 이야기에 역사의 실마리가 있다”며 끈기를 꺾지 않았다. 이제 그 작은 단서가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의 향방을 뒤바꿀 중요한 열쇠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서진은 휴직계를 내고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그는 자신의 과거 연구가 가져온 실패와 비판 앞에서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의 눈에는 낡은 비망록과, 후배가 언급한 민간 설화집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그는 비망록을 펼쳤다. 할머니의 손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 속에는 어릴 적 자신이 듣던 이야기들의 원형과 함께, 할머니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전쟁의 아픔, 가난 속에서도 지켜냈던 가족의 사랑, 그리고 작은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한 개인의 삶. 그리고 설화집 속 이야기들은 비록 '허구'로 치부되었지만, 그 시대 민중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화려한 연대나 왕조의 역사는 없었지만, 그 속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삶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는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에서 전설을 듣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데이터 분석은 없었지만, 그저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감정을 교류하던 그 순간의 순수한 행복과 위로. 문득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는 굳이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할머니의 비망록과 설화집을 탐독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들이 그의 엄격한 학문적 잣대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논문으로 발표할 수도 없는, 비효율적인 이야기들. 하지만 낡은 종이 활자가 울리는 투박한 이야기, 그림 속 사람들의 순수한 눈빛이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


이 모든 것이 도시의 첨단 연구실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진짜 감각이었다. 그의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나는 듯했다. 이곳에서라면 혹시 자신이 놓쳤던 삶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진정한 회복의 빛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피어났다.


할머니는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비망록 속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서진아, 역사라는 게 말이다. 네가 찾아낸 굵직한 사실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사실 속에서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야. 그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가 모여야 진짜 역사가 되는 거란다. 어둠 속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할 때, 비로소 회복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게 사람의 삶이지. 모든 기록은 언젠가 낡고 지워지지만,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는 영원히 남는단다.”


할머니의 말은 서진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화려한 연구 성과와 완벽한 객관성이 주는 찰나의 성공 대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는 과정 자체가 주는 깊은 만족감. 그는 자신이 좇던 '객관적인 진실'이 실제로는 너무나도 차갑고 고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삶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며, 그 속에서 소박한 회복의 빛을 재발견했다.


서진은 그날부터 후배와 함께 민간 설화집 연구에 온전히 몰두했다. 그는 더 이상 '데이터 분석'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담은 이야기들을 탐독하고 그 속에 담긴 심리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 집중했다.


굳이 복잡한 연대 측정 대신, 손으로 직접 설화들을 분석하고, 지역 주민들을 만나 구전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의 피드백을 들으며, 이야기가 주는 위로와 연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차가운 분석에서 벗어나 따뜻한 통찰력을 얻어갔다. 그의 마음속에 삶의 그림자를 넘어선 회복의 빛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한 달 후, 서진은 연구실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다. 화려한 도시의 고고학 박사 대신, 낡은 민간 설화집 속에서 그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의 본질을 읽는 통찰력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성한 '민간 설화를 통한 고대 문화 재해석' 연구 보고서와 함께, 새로운 관점으로 분석한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삶의 연결성을 제시했다.


그의 보고서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이번에는 성공에 대한 압박 대신, 역사의 숨겨진 그림자를 조명하고 진정한 회복의 빛을 찾으려는 용기가 그의 제안서 곳곳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학계가 그의 '비객관적인' 연구 방식에 의아해했다.

“한서진 박사님, 이 연구는 기존의 엄격한 학술적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감성적인 요소만으로는 논문으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노학자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서진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 연구는 대규모 데이터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설화들은 데이터를 넘어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한 명의 개인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이 역사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제가 직접 이 설화들을 분석한 결과,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고, 고통 속에서 회복을 갈망하던 조상들의 '삶의 그림자'를 담은 진실입니다. 이 가치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믿고, 과거의 그림자를 넘어설 회복의 빛을 찾아낼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진심과 삶의 그림자를 넘어선 용기에 학계는 결국 설득되었다. 그의 연구는 기존의 학문적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서진이 제안한 '구전 역사 아카이빙 캠페인'은 '데이터 너머의 인간성'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시작되었고, 예상치 못하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고대의 탐정'이 아니라, '역사의 그림자를 밝히는 이야기꾼'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사실 정립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회복을 돕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했고, 가장 중요하게는 삶의 그림자 속에서 회복의 빛을 얻었다.


"가장 완벽하고 화려한 데이터와 연대기가 자네를 성공으로 이끌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자네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는 없을 걸세. 때로는 모든 숫자의 흐름과 합리적인 분석을 내려놓고, 투박하고 비효율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게나.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것 속에서, 자네가 잃어버렸던 진짜 삶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삶의 그림자를 넘어설 진정한 회복의 빛을 재발견할 수 있을 테니."


서진 씨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의 새로운 삶은 여전히 데이터를 다루었지만, 그 위에 사람들의 온기와 진심이 담긴, 살아있는 통찰을 더했다. 그는 매일 아침 차가운 숫자 속에서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으며 기쁨을 얻었다.


멸균된 연구실의 모니터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의 그림자를 넘어선 것이다. 그의 역사는 이제 '단순한 사실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회복을 돕는 가치'를 창조하는 일로 흘러갔다. 그는 마침내 진정한 '과거의 치유자'로 성장했으며, 무엇보다 삶의 그림자 속에서 회복의 빛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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