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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 Oct 06. 2020

아빠 기억하기 : 보통의 마지막

#4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는 아빠를 시간이 지나서도 기억하기 위한 기록


시간이 지나고 아빠의 증세가 악화될수록, 아빠는 물론 우리 가족의 성격도 변해갔다.

우리 가족은 눈치를 보고 위축되기 시작했다.


4년 전 여름, 오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다.

지금 해외여행을 가지 않으면 다시는 못 갈 것 같다는 아빠의 말에 가게 된 여행이다. 당시에는 힘들지언정 그래도 거동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의 말이 옳았고 다녀오길 잘한 것으로 기억되는 여행이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가고, 손을 잡고 걷는 것. 이제는 꿈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아빠는 물론 우리 가족의 삶 또한 크게 변화되었다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우리 가족은 이제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베트남 여행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패키지여행이었다.

아빠는 비행기에서부터 답답함을 호소하며 힘들어했다. 이번 여행이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쯤 나는 이번 여행을 무사히 다녀오고 말겠다는 사명에 가까운 의지를 갖고 있었다.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고 기분을 업시키고 엄마 아빠를 즐겁게 해주려 노력했다.


우리는 노부부와 연세가 있으신 세 자매 분들, 친구들끼리 온 40대 여성 세 분, 이렇게  총 11명이 함께 움직였다. 패키지여행이니 하루 종일 함께 움직였고, 그들은 첫날부터 자연스레 아빠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당시 아빠의 말투는 어눌해져 있었고, 초점도 조금씩 비껴가고 있었다.


시선.

불안하던 여행은 이틀째부터 현실이 되어갔다. 아빠는 무더운 베트남 날씨와 따라주지 않는 체력에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빠는 버스에 타고 내리면서 넘어지기 시작했다. 무릎이 깨졌고, 우리에게는 시선이 쏟아졌다.


베트남 하롱베이에서 우리는 다 같이 보트에 올랐다. 보트는 이리저리 여러 방향으로 격하게 움직이며 속도를 냈고 사람들은 고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그러던 중 아빠가 의자 뒤로 넘어졌다. 아빠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고, 엄마와 나는 힘이 딸려 아빠를 일으켜 세우질 못했다. 결국 보트를 멈추고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 아빠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이후로 보트는 속도를 내지 않았다. 우리는 민망했고 미안했다. 이후 여행지 스팟에 들러도 아빠는 버스에 혼자 머무르길 택했다.


눈치.

다 같이 실내 커피숍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사방이 막혀있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아빠는 내 앞에 앉아있었고 그 옆으로 노부부의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그런데 아빠에게서 땀 냄새가 느껴졌다. 아빠는 복용하는 약 때문인지 땀 냄새가 독해졌고, 게다가 베트남의 말도 안되게 무더운 날씨와 떨어진 체력에 땀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흘렸다. 아빠에게서 느껴지는 냄새에 내 손에도 땀이 베기 시작했고, 할아버지가 아빠를 흘깃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결국 슬쩍 자리를 피해 다른 자리로 가셨다. 나는 또 눈을 굴리며 작아졌고, 속이 상했다.


미안함.

그리고 가장 아찔했던 순간. 베트남 패키지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하롱베이 선상에서 즐기는 해산물 식사다. 랍스터, 새우, 조개 등 다양한 해산물이 그득하게 제공된다. 우리 가족은 연세가 지긋하신 세 자매와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이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안 먹고 말지…) 모두가 풍성한 식사에 '우와,우와' 하며 이리 저리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먹지 않았을 때, 일이 벌어졌다. 아빠가 음료수를 마시다 뿜어 버린 것. 음식은 물론 앞자리에 앉아있던 세 자매 분들도 아빠가 뿜은 음료를 뒤집어썼다.


그때, 마치 영화같이 귀에서 '삐--'하고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아찔했다. '왁!' 놀라는 사람들 소리에 이어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그대로 창문을 열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정적. 그 정적을 깨고 엄마가 울상이 되어 휴지를 들고서 죄송하다며 이리저리 고개를 숙이고 부산스레 움직였다. 아빠는 말을 잃고 굳었고 난 겨우 움직여 죄송하다며 삐걱거렸다.

그때, 굳어있던 세 자매 분들은 표정을 풀고 옷을 쓱쓱 닦아내더니, "아이 괜찮아요~"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음식을 드셨다.


먹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기분 나빴을 것이고 더러웠을 것이다.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위대하게까지 느껴졌다. 감사했고, 미안했고, 울고싶었다.

(감사하고 대단한 분들. 우리 가족은 아직까지 그 따뜻함을 기억하고, 이분들 이야기를 한다.)




아빠와의 지난 여행들이 떠올랐다. 아빠는 엄청난 친화력과 유머를 가진 호탕한 사람이었다. 이런 여행을 떠나면 항상 대화와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도, 먼저 다가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빠였다. 우리 가족은 '인싸' 아빠 덕에 항상 주목을 받는 쪽이었다. 그랬던 아빠가 입을 닫고, 주눅 들고, 무리에서 배제됐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골칫덩어리가 된 모습을 봤다.

(마음먹고 떠났을 여행에 아빠때문에 크고 작은 피해를 보았을 그때 그분들에게 죄송했다고 인사하고 싶다.)


엄마, 아빠, 나. 서로가 모두 '괜찮은 척'했던 여행의 일정이 끝나고 호텔 침대에 누우면 눈물이 났다.

우리는 이제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던 순간이다.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보통의 일상을 포기해야 함을 깨달았다. 조금은 아프게 느껴지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익숙해져야 함을 깨달았다.


여행 사진 속 우리는 웃고 있다.

하지만 그 사진에서 내가 보이는 것은 '보통의(그런 척했던) 모습을 한 우리 가족'의 마지막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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