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하기 싫은 일들.
집 앞 3분컷 장소에 분리수거하러 나가기가 귀찮아서 현관에 재활용품들을 켜켜이 쌓아놓았다. 도둑이 도어락 따고 들어오려다가도 어이쿠 다른 형님이 이미 다녀가셨군, 하면서 돌아설 것만 같다. 알면서도 몸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집 코앞의 분리수거장일지언정 심리적 거리가 십리는 되는 듯하다.
잠옷에서 외출복(멋이며 구색을 갖추지는 못해도 적어도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을 정도의 옷)으로 갈아입고 카트에 박스들을 바리바리 싣고 집을 나서기에는 이불이 심각하게 포근하다구.
왜 식기세척기를 한 통 풀로 가득 채워서 돌렸는데도 싱크대에는 본대로 합류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남아있는가? 앞접시와 물컵을 일회용마냥 너그럽게 써대는 청소년들이 유력한 용의자이다.
그래도 명색이 6인용 식기세척기인데 5인 가족이 쓰기에 부족하다니, 동양매직 이 자식들이 사기를 친 게 분명하다. 냄비도 다 때려 넣을 수 있는 12인용 식기세척기가 갖고 싶다.
물론 큰 식기세척기를 사더라도 패잔병들이 남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식기세척기를 빌트인 하는 만큼 씽크대 수납공간이 줄어드니 그건 또 그거대로 새로운 아비규환의 공간이 창출되는 거겠지.
한창 식덕질하던 시절 초록으로 불타오르던 베란다. 지금은 한 구석에 잔뜩 쌓인 빈 화분들만이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줄 뿐이다. 꼴에 화분도 토분이며 슬릿분이며 좋은 걸로 사고 싶어서 껄떡거린 덕분에, 마음 편히 버리지도 못하고 물욕의 화신이 다녀간 폐허가 되어 공간만 잔뜩 차지하고 있다. 저 화분들이 놓인 면적을 아파트 평당 가격으로 환산하면 당장 당근마켓에 개당 100원으로 모조리 팔아치워도 시원찮을 텐데 말이다.
밤이면 막내를 재우고, 쌔근쌔근 숨소리를 확인한 다음에, 당근마켓 혹은 쿠팡 앱 등을 방황하며 전뇌세상의 도떼기시장으로 날아간다. 쇼핑몰 알고리즘이 나에겐 최고로 강력한 메타버스이다.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다 보면 왠지 얘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쟤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밤에 쇼핑몰을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재봉틀을 사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타올랐더랬다. 중고가 10만 원 정도의 모델이 괜찮아 보여서 검색하다가, 그 모델의 최신 버전에 기능이 좀 더 많아 보여서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한 단계 상위 기종이 사은품 증정 이벤트 진행 중이라고 하네? 돈 조금만 더 보태서 사은품을 받는 게 합리적이라고 합리화하며, 지름신 따라가다가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가게 된다는 ‘이럴 바에’, ‘조금만 더’ 테크트리를 확실하게 타고 올라, 어느덧 내 장바구니에는 60만 원에 육박하는 재봉틀 본체와 십수만 원의 잡동사니들이 담겨있었다. 이제 간단한 결제하기 과정만 거치면 적어도 이틀 뒤에 산타보다 나은 택배 아저씨가 방문하실 것이다.
그래도 일말의 이성이 남아있었던 건지, 미래의 내가 과거로 찾아와서 정수리를 연타하며 레드 라이트를 삐용삐용 울려준 덕분인지, 결제하기 직전에 멈춰서 내일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난 나는? 실오라기만큼의 미련도 없이 장바구니의 모든 물품 삭제하기를 눌렀다. 어젯밤의 나는 뭐였는데. 이 미친 인간아.
밤이 되면 센티해지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점이리라. 나는 밤이 되면 센티해지지 않고 전두엽에 빡 줬던 힘이 풀어져서 그야말로 머리에 나사 풀린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재봉틀도 장바구니에 꽉꽉 눌러 담았던 거겠지.
그래도 아까는 빵꾸난 남편의 바지를 수선하기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 30년 전에 가정 시간에 배웠던 박음질로 꿍덕 꿍덕 꿰매면서, 그때 미친 척하고 재봉틀을 지르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살짝 원망했다. 물론 재봉틀의 가격보다 바느질에 소모한 나의 시간당 인건비가 훨씬 싸다. 그리고 아마도 향후 몇 년간은 내가 직접 바느질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현관 밖에서 쿠당탕 퉁탕 소리가 났다. 오늘 아침 주문한 물건들이 지금 막 도착했나 보다. 쿠팡맨 아조시…델리케이트한 저의 택배들이 놀라지 않게 초큼만 살살 내려놓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도 아침에 시킨 택배는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겪은 물품들이 아닐까? 라고 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남편이 보면 기함할 물건들이라 출근하며 문 열고 발견하기 전에 호다닥 치워놓아야 한다.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언제까지 이러고 살 텐가? 아니지. 이게 뭐 어때서?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글쓰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택배를 가지러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인생 저새기처럼 살지 말자’에서 저새기를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