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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Mar 29. 2023

 마흔일곱 살인데 숨을 잘 쉬네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공원은 아이들과 고양들의 소중한 휴식처다. 작은 공간이지만 꽃나무와 잔디, 정자와 미끄럼틀이 있어 날이 좋은 날이면 주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뛰어나와 신나게 재잘거린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은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이 뛰어놀던 공원이 임시휴업 상태의 식당처럼 고요했다. 

강아지들과 함께 걷는 공원길에는 밥을 먹으러 나온 고양이들이 지나다닐 뿐, 미끄럼틀을 타며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2주 전부터 공원에 다시 활기가 돋고 있다. 꽁꽁 숨어있던 아이들이 나와 재잘재잘 떠들며 뛰어다니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컵 떡볶이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왜 뛰어다니는 아이들보다 내 마음이 더 신나는지...


오후 기온이 23도였던 그날.

마트에 들러 장을 본 후 그대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쉬워 공원 한쪽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수천 마리의 작은 물고기 떼를 한 숨에 들이키는 고래처럼 크게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여섯,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모! 이모는 어디에 살아요?"

그 짧은 순간,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 내심 고마웠다.

"나? 나는 저기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에 살아."

"아... 나는 여기 아파트에 사는데."

아이가 손짓한 아파트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이웃한 아파트였다.

"그렇구나. 오늘 날씨 좋아서 놀기 좋다. 그치?"

"네. 더워서 옷 벗었어요. 엄마가 생일 때 사준 건데."

"그래? 있다가 집에 갈 때 꼭 챙겨가. 잊어버리지 말고."

"네. 그런데, 이모는 몇 살이에요?"


대뜸 아이가 나이를 묻는다.

"나 나이 많은데... 너 몇 살인지 알려주면 나도 알려줄게~"

내 말에 아이는 선뜻 두 손을 내 눈앞에 척 펼치면서 대답했다.

"7살이요!"

"7살이구나... 나는 마흔일곱 살. 숫자로 사십칠!"

"우와~ 사십칠이요? 되게 많다!"

정말 크게 놀란 눈치였다. 어린아이의 말인데 마흔일곱이란 나이가 이런 나이구나 싶어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엄마는 삼십육 살인데..."

"엄마가 서른여섯 살 이시구나. 엄마가 젊어서 너무 좋겠다."

"네. 조금 좋아요."

너무 좋겠다는 나의 말에 조금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요. 이모는 마흔일곱 살인데 숨을 잘 쉬네요?"


응? 숨을 잘 쉰다라니... 무슨 뜻이지?

마흔일곱 살이나 먹었는데 그렇게 많은 나이에 숨을 잘 쉬어서 대단하다는 뜻인가? 내 나이가 숨도 잘 못 쉬어야 할 만큼 많은 나이란 것인가? 

어허~ 이런 맹랑한 꼬마를 보았나!


"어우 야~ 나 숨 잘 쉬어. 마흔일곱이면 많은 거 아니야."


맹랑한 꼬마의 말에 해명을 하다가 울컥 억울함까지 밀려왔다.

여자아이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입을 삐죽 내밀고 힘없이 말했다.


"우리 엄마는 나이가 삼십육인데 숨이 안 쉬어 진대요. 그래서 약 먹어요."

아, 아이의 말을 오해했다. 나이만 허투루 먹은 마흔일곱 살 아줌마 같으니라고.

"엄마가 아프셔?"

"아빠랑 싸울 때도 숨이 안 쉬어지고 오늘도 그래서 저 혼자 놀고 있어요."


마흔일곱 살 보다 훨씬 젊은 서른여섯 살. 아이의 엄마는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엄마가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것도 슬프지만 술을 많이 먹어서 더 슬프다는 아이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하다. '마흔일곱 살인데 숨을 잘 쉬네요'는 꼬마 아이의 맹랑함이 아닌, 한 없는 부러움이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엄마 괜찮아지실 거야.'라는 말을 해줄 뿐이다.


우리 몸속의 기압을 낮춰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오게 몸속 압력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이 호흡이, 이 숨 쉬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수많은 고민과 해결해야 할 일들, 그리고 책임져야 하는 많은 것들 사이에서 편한 숨 한 번 크게 마시고 뱉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이의 엄마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그 무언가에게 편함 숨을 빼앗겼을 것이다. 


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줬다.

아이 엄마가 자신을 걱정하는 딸을 보며 조금 더 힘을 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뒤돌아 집으로 들어가는 길.

숨을 크게 쉬었다 뱉었다를 반복하면서 걷는다.

4년 전 가정의학과에서 받아온 우울증 약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쓰레기통에 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스로 숨쉬기 어려웠던 그날의 나였는데, 이제 이만큼 숨을 쉬며 살고 있으니 참 고마운 일이다.


"후우~"


다시 한번 가슴 끝까지 숨을 들이마셨다가 크게 뱉어 본다.

마흔일곱 살인데 숨을 잘 쉬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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