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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Aug 26. 2023

아프다고 했잖아!

너 정말 이러기야?

마음이 아프고 온몸에 힘이 빠진 건 4주 전 팔꿈치 뼈가 골절되어 깁스를 해서도 아니고 깁스 속에 숨겨진 팔이 간지러워 튀김용 젓가락으로 찔러대며 긁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만 7년째 함께 하고 있는 나의 작고 소중한 강아지 보리 때문이었다.


노년을 향해 질주하는 7살이란 나이에 걸맞고 싶었는지 보리가 이유 없이 한쪽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이 시큰해졌다. 이제 너도 정말 나이를 먹는구나. 슬픈 내 얼굴을 보고 보리가 달려와 얼굴을 핥았다. 걱정 말라고, 울지 말라고 하는 듯이. 저만치 떨어져 누워있는 토리는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앞다리를 떨며 낮잠을 청한다.


다니고 있는 동물병원이 문을 열지 않는 주말이 이렇게 야속하기는 처음이었다. 남편은 주말 동안 조금 지켜보자는 말을 하고는 걱정스럽게 보리를 쓰다듬었다.

뒷다리를 힘없이 절뚝이며 기필코 내 무릎 위로 올라오겠다고 애쓰는 보리.

나는 보리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리고는 내 다리가 썩어 문드러져도 절대 너를 내리지 않겠다는 비장함으로 몇 시간을 버텼다.


반려동물 보건학과에 재학 중인 딸아이는 자신의 교재를 이리저리 찾아보고는 '슬개골 탈구' 증상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리의 엉덩이, 허벅지, 무릎, 발등,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만져보고 눌러보는 딸아이만의 진찰이 시작되었다.


"이상하다. 슬개골 탈구면 여기 뼈가 옆쪽으로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뼈는 정상적으로 있어?"

"응. 슬개골 탈구가 아닌가? 혹시 발바닥이나 발등이 아픈가?"


우리의 품을 빠져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보리는 여전히 슬프게도 뒤뚱뒤뚱 다리를 절뚝였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짐작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맞이한 월요일.


불쌍한 보리를 지켜야 한다는 딸아이와, 다리 아픈데 개모차 타고 가면 보리가 힘들 거라며 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우기던 남편, 그리고 골절된 팔의 깁스 따위는 상관없던 나 이렇게 셋이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보리 들어가세요~"


진찰대에 도착해 선생님의 섬세한 손길로 진찰이 시작되었다.


"음... 일단 엑스레이 찍고 사진 보면서 이야기해 보죠."


10분 정도 지났을까? 보리의 이름이 불리고 다시 선생님과 마주한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선생님께서 컴퓨터 속 엑스레이 사진을 천천히 이리저리 아래위로 옮겨가며 살펴보는 시간. 두근두근 내 심장이 조여왔다.


"아하... 음...."


선생님의 짧은 음성에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왜... 왜요.. 선생님?"

그러고 싶지 않은데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겁나게 건강한 대요? 하하.."

아... 건강...

"정말 건강해요. 골반도 균형이 잘 맞는 상태고, 뼈도 이상이 없고 슬개골도 아주 건강하고요. 발복이나 발등, 발가락 쪽도 아무 이상이 없어요."


"그럼, 보리가 왜 다리를 절었을까요?"


"음, 아마 잠깐 삐끗해서 순간 아팠는데 가족들이 관심을 주니까 계속 아픈 척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사 맞고 가루약 처방해 드릴게요. 하하"


오호라~

그랬다 이거지 차보리.


우리는 그날 엑스레이 2장, 주사 한 방, 가루약 처방으로 8만 2천 원을 지불하고 돌아왔다. 

아, 물론 겁나게 건강하다는 진단도 함께...

8만 2천 원으로 건강함을 보장받고 왔으니 돈이 아깝다고는 말하지 못할... 아... 아깝다. 


맹랑한 갈색 털뭉치는 집에 와서 눈치를 살피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또 다리를 들려고 한다. 양심에 찔렸는지 확실하게 들지는 못하고 조금씩 들까, 말까 옴찔거리고 있었다.


"다리 내려라!"


나의 단호한 말과 표정에 뒷다리를 휙 내리고는 언제 아팠냐는 듯 휙 뛰어가는 보리의 뒷모습. 

그래, 건강하면 된 거야. 그럼 된 거지 뭐.

그런데 8만 2천 원이 찍힌 영수증을 접으면서 왜 눈물이 나지...


남편은 역시 보리가 똑똑하다면서, 똑똑하면서 건강한 연기 잘하는 강아지라고 좋아했다.

"우리 보리 허리우드 가자 허리우드! go! go!"

당장 비행기 티켓 끊을 것 같은 남편을 뒤로하고 보리가 내 다리로 다가와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쿨쿨 잠이 들었다.



이제 꾀병이 들켰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시원하게 다리를 펼친 모습에 기가 막힌다. 그래도 8만 원에 뼈건강을 보장받고 왔으니 다행이고 기쁜 건 사실이다.


이후 몇 번 더 꾀병 연기를 시도했던 보리. 이제 안 속는다.

이제 고마해라. 마이 해묵었다 아이가...

키울수록 강아지는 앙큼하고 귀여운 요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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