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친구와 여행하기>
아이들이 다섯 살쯤부터 조금씩 물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어!
친구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으면 좋겠어!
sleep over
이웃의 제이와 지훈이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몇 차례 슬립오버를 한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아이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새로운 경험에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우리 집의 경우 일반가정과 슬립오버를 계획하는 일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곳 아빠들이 굉장히 가정적이고 아이들 일에 협조적인 편이지만 육아를 하면서 아빠들보다 엄마들과 대화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엄마들과의 관계성만으로 편하게 슬립오버 하는 일이 크게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늘 “우리는 슬립오버 안 해”라고 단순하게 말해두곤 했지만 나도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의 동료이자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부와 한집건너의 이웃이 되었고 어느 정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사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늘 어렵지만 잠깐 설명을 해보자면, 남편인 J는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고 집안과 아이들의 일을 꽤 세세히 챙기는 편이었다. 일과 집 밖에 모르는 무던한 미국아빠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필요에 따라 플레이데이트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기도 하는 건 확실히 좀 특별한 부분이었다. 아내인 A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케이팝을 좋아하게 되어 나와 이야깃거리가 많아졌고 어릴 때처럼 사소한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따듯한 표현을 아끼지 않지만 어쩐지 자기에게는 엄격한 부분이 디테일이 중요한 남편 J와 잘 맞아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시간, 장소, 아이들의 나이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아이가 어릴 때는 시간, 장소, 아이의 나이대로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결정되는 일이 많다.
아내의 동료이기 때문에 근무 ‘시간’이 비슷하고 ‘가까운 곳’에 살고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 그 외에 첫 아이가 한 살 때부터 동네에서 종종 마주치며 서로 괜찮은 인상을 남겼던 것도 이 가정과 왕래가 잦아진 또 다른 요인이 됐다.
슬립오버 말고 여행으로 하자
그래서 우리가 계획한 것은 겨울의 스키여행이었다.
슬립오버는 안된다는 단호한 거절 뒤에 “하지만 겨울에 이웃집 가족이랑 함께 여행 갈 거야.”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스키를 배우기 시작한 그쪽집 형제와 우리 집 큰 딸을 함께 묶어 레슨을 받게 하고 레슨 외의 시간에는 이미 수준급의 스키 실력인 J가 아이 셋을 데리고 설산의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스키와 스노보드 초보인 아내와 나, A는 이 부분을 늘 고마워했다. 스키 여행의 어려움은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스키를 들고 나르고 헬멧을 쓰고 두꺼운 스키복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자유롭게 화장실에 갈 수 없는 환경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이 제 몫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스스로의 짐을 들고 나르면서 배우기 시작하는 것것 같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나르는 기회가 일상에서 흔한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가 않다. 챙길 물건이 많은 스키여행은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엄마 둘의 두 손이 이미 본인들의 물건들로 가득할 때 다섯 살 아들이 스스로의 스키를 들고 답답한 헬멧을 벗지 않는 최소한의 노력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장면을 감상하니 모두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남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남성의 이미지를 어떻게 전사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지를 제외하고 주변에 어떤 남성 캐릭터를 둘 것인지는 온전히 우리 하기 나름이었다. 시간이 흘러 집을 벗어나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전사하고 싶은 것과 상관없이 주변의 다양한 남자들을 보면서 아이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칠 것이다. 그 시기가 오기 전에 본보기가 될 만한 남성 캐릭터가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갓파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적당한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 없어도 되는데 혹시나 다양성에 반하는 환경을 만들까 봐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을 뭐라고 부를까. 사회생활? 코미디?
고민이 아닌 궁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것이 간절함이 결여되어 영원히 보류된 프로젝트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데드라인도 없고 푸시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녀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옆집의 J를 고마운 이웃 아빠로 명명하기로 한다. 가정을 열심히 돌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고마울 수 있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 말고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몫을 다 하는 것. 본인의 스키를 들고 다니는 아이에게 고마운 이 마음과 같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