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drianne R Jun 03. 2024

부모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4

엄마 둘, 남매 하나 <아들의 온도>


그래, 아들 얼굴 좀 보자!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와 함께 사셨다. 중풍으로 왼쪽 팔다리에 감각이 둔해서 느린 거동을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셨다. 느릿한 걸음으로 집 앞 슈퍼에서 집까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오시다가 아이스크림이 흥건히 녹아있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부지런히 산책을 나가는 게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왼쪽 손가락은 늘 힘없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있었고 이걸 조심스레 펼쳐서 손안에 찬 땀을 닦아내는 것도 할머니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몸이 불편하셨지만 깔끔하게 차려입으려 노력하셨고 동네 사람들은 ‘늘 흰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 집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몸을 덮는 새하얀 카디건에 가벼운 치마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산책에 나서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은 늘 경로당이라는 정확한 목적지가 있어 거침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속도와 상관없이 별일을 다 해내는 분이었다. 내게는 보통 시접에 빼곡히 들어간 실을 제거하는 일을 부탁하셨다.  한쪽 손뿐인 할머니가 어려워하는 바늘귀에 실을 넣는 일을 끝내고 긴 실 끝에 매듭을 지어 건네드리면 허리를 너무 단단히 조이는 고무줄을 느슨한 것으로 바꾸는 법, 치마 속에 비상용 주머니를 다는 법 등을 실시간으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지휘 아래 옛날식 재단가위로 용감하게 여분의 천을 자르고 실밥을 제거하고 시침질의 마무리를 도우면서 작은 불편함을 제거하는 방법이 내 것이 되었다. 레버리지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할머니에게도 여전히 해결하기 곤란한 일이 있었는데 몸을 씻는 일이 그중 하나였다. 자주 몸을 씻는 것이 불편한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쯤 한국식으로 몸을 불려 때를 밀고 싶어 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쯤이 되자 아들과 며느리에게 그동안 부탁하기 불편했던 부탁을 내게 하셨다. 처음에는 샤워를 시켜드리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등을 밀어 드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몸 전체를 밀어드렸다. 할머니의 또 다른 골치 거리 중 하나는 발톱 손질이었다. 죽은 왼쪽 발톱은 유난히 두껍고 천천히 자랐기 때문에 적당한 관리가 필요했다. 몸을 구부려 발을 붙잡는 일이 불편한 할머니를 대신해 큰 발톱깎이를 들고 발톱을 자르면 우수수 부서졌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너무 많이 잘라내면 고통스러워하셨다. 적당한 지점에서 멈추는 일이 관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늘 공기처럼 집에 존재했던 할머니와의 에피소드가 매우 특별한 것이었지만 그때는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노인을 돌보는 일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집 근처 병원에서 수정란 이식 시술을 받은 날, 마취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어 와이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들었다. 그날 밤, 어쩐 일인지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미국집까지 오셨다. 늘 그랬던 것처럼 몸을 편하게 감싸는 흰 옷을 겹겹이 멋지게 차려입으시고 지팡이를 짚은 채, 우리 집 차고 안쪽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할머니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워낙 거동이 느리셔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싶어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깼다. 밖을 보니 동이 트기 전이었다. 임신 테스터를 이용하기는 너무 이르다는 걸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테스터를 뜯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플라스틱 스틱 위로 아주아주 희미하게 두줄이 나타났다. 임신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친척들 사이에서 삼신할머니로 활동하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조카 중 하나도 할머니꿈과 함께 태어났다. 세상에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난다. 할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을 목욕시킬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난다. 묘하게 닮은 점의 위치나 발모양 같은 것을 볼 때 그렇다. 아들의 발톱은 할머니 발톱과 너무 똑같이 생겨서 할머니 발톱 깎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DNA를 공유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각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었다. 딸애가 이 DNA 이야기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은근히 아쉬웠다. 제왕절개와 임신성고혈압으로 출산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내가 낳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DNA는 아니어도 세포는 나눌 수 있다. 아내의 수정란으로 내가 임신을 하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염두하지는 않았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할머니가 꿈에 나오셨을까.



DNA공유에 대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이 나 이외에도 더 있었다. 영상통화를 해도 늘 별 말이 없으시던 아빠는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유난히 손자를 자주 찾으셨다. 그리고 특히 ‘아들’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시는 모습이 생경했다. 아빠가 아들을 좋아하는 노인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아들이라 할머니가 꿈에 나오신 거라고, 한살이 조금 넘은 아기의 목덜미를 붙잡고 아주 튼튼하고 몸이 단단하다며 사뭇 진지해지기도 했다. 어릴 적 남자들에게만 대꾸하시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내게 딱 한 가지 용건으로만 말을 거셨는데 한복의 목 깃을 빳빳한 모양으로 고정하는 동정을 구입하는 심부름을 시키실 때였다. 그 외에는 남자아이들과만 소통하셨다. 아빠는 조금 나아진 버전의 할아버지였다. 아빠는 내 앞에서 개방적인 척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내 변화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빠도 포용성이 강조되는 직장생활을 오래 하셨고 사회적으로 옳은 말이 뭔지는 알고 계셨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슬슬 흘러나오는 아빠의 생각을 보면서 여전히 변화를 재촉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나조차 미래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성소수자를 싫어하는 어르신들을 볼 때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가 떠오른다. 90%가 농업에 종사했고 전쟁이 있었고. 모두 가난했고 고통스러웠고. 활자로 이해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와닿았다. 극한 서사를 되짚어보니 한국의 노인들은 전 세계 어느 노인보다 잘 변화하고 적응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그러실 거고. 나도 날 받아들이는 게 오래 걸렸던 상황도 더해 생각해 보면 재촉하고 싶은 마음이 잠잠해진다.


“어르신, 그래도 전 제 얘기하고 살게요.

어르신들 기다리느라고 애들도 다 크고 저도 나이가 너무 많아졌어요. “


어느 어르신들께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려 본다.



유치원에 간 사나이. 스스로의 청사진을 그릴 준비가 된 듯 하다.


작가의 이전글 부모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