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기
예전에 좋아했던 <인 디 에어>라는 영화가 있다. 조지 클루니가 1년에 300일 이상을 출장 다니는 그런 영화였는데 그런 걸 보면서 뭣도 모르고 출장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회사원이 되고 난 후에는 출장을 많이 경험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내 업무 특성상 당연히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못내 아쉬웠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해외 출장은 더더욱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첫 해외 출장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가게 됐다.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출국하기 4시간 전까지 정말 사무실에서 일만 하다가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타고 공항으로 가서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색다르고 좋은 경험이었다. 나도 드디어 해외 출장을 가는 멋진 회사원이 된 것 같은 기분? 다들 환상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니까.
그 뒤로 중국에 한 번 가긴 했지만 여전히 해외 출장의 기회는 멀기만 했는데 드디어 내가 꿈꿔오던 그런 멋진 기회가 찾아왔다. 전기 자전거 공유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미국에 가게 된 것! LA로 들어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오는 일정이었고 중간에 미국 국내선도 한 번 타게 됐다. 그리고 심지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갔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미국까지 출장을 가서 LA와 샌프란시스코를 들렀다가 돌아오는 출장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어렸을 때부터 늘 꿈꿔오던 그런 성공한 회사원의 출장이었다. 드라마에서 늘 쉽게 말하던, "잠깐 미국에 좀 가 있어라." 하는 그 미국, 비즈니스맨의 상징 같은 그런 곳으로 가게 됐다! 아, 이 얼마나 환상에 가득 찬 철없는 생각인지. 알아도 그냥 그렇게 마냥 기분이 좋았다.
출장의 성과는 꽤 괜찮았다.
- 유력 업체와의 미팅을 통한 상황 파악 및 협력 가능성 논의
- 먼저 서비스하고 있던 다양한 서비스들의 모습 자세히 파악
- 다양한 형태의 공유 자전거 스펙 파악
- 공유 자전거 활용 방법 모색
이런 것들을 다 할 수 있었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관광 용도로의 활용 가능성을 보기 위해 시도했던(사실 사심도 가득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라이딩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북부의 항구 근처는 이미 자전거 코스가 유명했다. 그곳을 전기 자전거로 달리면 어떨까, 시간이나 난도는 어느 정도 되나 직접 체험해보기로 했다.
Fisherman's Wharf -> Marina District -> Golden Gate Bridge -> Sausalito -> 배 타고 복귀
이렇게 코스를 짰다. 원래 유명한 코스고 기존의 다른 자전거 렌털 업체들의 생존권을 보장해주기 위해서였는지 전기 자전거 공유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시작점인 피셔맨스 워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힘들게 찾아서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 전기지만 예상보다 힘들었고(공유 전기 자전거는 파워에 제한이 걸린다), 복귀까지 시간도 거의 2시간가량이 걸렸지만 정말 즐겁고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특히 금문교를 바라볼 수 있는 뷰 포인트에 도달했을 때의 가슴속까지 시원함과 감동은 얼마나 컸던지!
덕분에 전기 자전거 공유 서비스를 레저 용도로 활용하기 위한 아이디어라든지 적절한 요금 체계에 대한 것도 더 깊게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그 경험 자체가 너무도 좋았다. 금문교를 자전거로 건너는 경험도 신선했고, 다리를 건넌 후 소살리토의 배 타는 곳까지 가는 동안에 멋지고 예쁜 집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사심 가득으로 시작했던 행동이었고 그 사심이 120프로 충전됐던 시간. 해외 출장 간 김에 기왕이면 이런 나 좋은 경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그런 게 출장의 매력 아닌가.
전대미문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출장은 물론 여행도 거의 못 가게 된 지금의 상황이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언제나 상황이 나아질까. 얼른 나아져서 해외 출장도 많이 가고 그랬으면 한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한 가지씩은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나에겐 그것이 출장, 특히 해외 출장이었다. 나도 언젠가 조지 클루니처럼 계속 출장 다니면서 일 해보고 싶다. 그때도 과연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