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부터 시작된 편두통에 얼굴은 하회탈의 골진 주름처럼 깊은 시름으로 가득하다.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하는 아주 드문 일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힘겹게 흔들어가며 왜 그런가 아무리 고민해도 뚜렷한 원인이 잡히지 않는다.
봄 가뭄에 메말라 가던 들판에 꿀맛 같은 빗줄기가 내렸다. 목마른 대지는 얼마나 반가웠으면 내리는 물줄기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른 시간 출근길에 질퍽이는 물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힘겹게 차에 오른다. 밤새 두통에 시달리다 보니 아침의 상쾌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은 안 되겠어`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코로나의 기세가 쉽사리 꺾이지 않아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둘레길 산책이었다. 족히 서너 달은 지난 것 같다. 아파트 단지와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야트막한 산이다. 언덕이라 하기에는 좀 크고 그렇다고 산이라 하기에는 아담한 사이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찾는 사람의 발길이 꽤 많은 곳이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이름은 "태봉산"이다. 인현왕후의 둘째 아들 중종의 탯줄을 묻었다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양에서 한참을 와야 하는 이곳까지 어떤 연유로 귀한 왕자의 탯줄을 가져와서 묻었을까?
이런저런 잡스런 사념이 온몸을 휘감을 때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다. 20분 정도면 한 바퀴 돌 수 있는 둘레길이다. 갈참나무, 신갈나무, 밤나무, 잣나무, 소나무가 무성하고 간간히 적송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태봉산 자락과 둘레길 주변에는 복자기나무가 많다. 가을이면 복자기 나뭇잎은 알록달록 수채화로 그린 그림처럼 태봉산은 한 폭의 유화 그림이 된다.
많은 나무 중에 유독 마음이 가는 나무는 단풍나무과의 복자기나무다. 갑작스럽게 더워진 날씨 탓에 겉옷을 훌훌 벗어 버리는 복자기나무는 일명 `나도박달`이라고 부른다. 단단하기가 박달나무에 버금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한 가지 흠이라면 다른 단풍나무에 비해 수피가 지저분하게 벗겨진다는 것이다. 가을이면 계절의 강렬한 아쉬움을 붉은 잎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욕심은 한계가 없다. 심하게 표현하면 아홉을 가진 자는 마지막 하나를 채우기 위해 하나만 가진 자의 것을 뺏으려 한다. 하지만 숲 속을 거닐다 보면 자연의 순리를 깨닫고 연신 감탄한다. 빼곡히 솟은 나무들은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의 거리를 적당히 조절한다. 자기가 자라고 싶은 곳 아무 곳에서 자랄 수도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서로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란다. 숲에서 공존하는 저들만의 법칙인 셈이다.
자연을 관찰하며 조용히 머물다 보면 어느새 편두통은 사라져 버린다. 넘어가는 저녁노을이 태봉산 기슭을 베개 삼아 고단함을 뉘 일 즈음 나도 태봉산을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