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rew Feb 20. 2023

동기생(同期生)

晩書 홍 윤 기_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지금쯤은 사회(社會)의 물을 빼내야 한다는, 이른바 가입 대(假入隊) 기간 일주일이 지났다. 어제 까지만 해도 기간요원들이 함부로 대하진 않았는데, 돌격 형 머리로 삭발을 하고, 헐렁한 훈련복에 몸을 맞춰 입으며 지난 일주일 동안 제법 친해진 옆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던 그 때, 천둥소리 같이 들려온 “동작 그만”한마디가 우리들을 얼어붙게 했다. 스무 살 피 끓는 젊음들이 느닷없이 들려오는 한마디에 순식간에 얼음이 될 수는 없었다. 몇몇 튀는 젊음들이 그렇게 크게 울리는 구령을 못 들었는지, 듣고도 못 들은 척 한 것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다음에 떨어진 구령은 “모두 그 자리에 꼬나 박는다. 실시” “실시”무조건 복창해야 한다는 원칙쯤은 이미 가 입대 시절에 알아 두었다. “아직도 숨소리가 들린다.”바닥에 머리를 대고 엉덩이를 높이 들고, 그리고 두 손은 자신의 엉덩이를 감싸 안는다. 선배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말하던 원산폭격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5분 내로 정복으로 차림으로 연병장에 선착순 집합한다. 실시” “실시” “목소리 봐라, 이 ○○들 아직 사회(社會)물이 덜 빠졌구나, 오늘부터 죽었다고 복창해야 될 거다.”자못 살벌하다. 여하튼 5분이란 기간 내에 새로 지급받은 그린사지 정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옷은 갈아입고 정모를 쓰고, 단화까지는 제대로 신었는데, 문제는 넥타이다. 당시 스무 살 청춘들이 넥타이를 매본 경험이 몇이나 있었을까? 천신만고 끝에 목에 넥타이를 난생처음 대충 뭉퉁 그려 묶고, 순식간에 발이 안보이게 뛰어 갔는지 이층 내무반에서 날아갔는지 모르게, 진해만의 칼바람 연병장에 도열했다. 전국방방곡곡에서 스스로 내로라하던 119명의 피 끓는 청춘들이 그렇게 잔뜩 주눅이 들어서 칼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겨울의 앙상한 나무들처럼 서 있었다. 1965년 11월의 어느 날 해병의 요람 진해 교육 훈련단연병장의 아침풍경이다. 이들 119명이 우리들 42기 동기생들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대한민국 해병대 하사관학교 제42기 후보생이다. 아직은 귀신 잡는 해병 하사가 아니다. 귀신을 잡기위한 교육훈련을 받아야 하는 정복 양팔에 노란갈매기와 빨간 갈매기 두 개가 언밸런스 된 임시계급장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한국의 겨울을 보통 11월에서 2월까지로 본다면 우리 동기들은 그 혹한의 한복판에서 16주 동안 고락을 함께 할 것이다. 보편적 상식이라면 당연이 정(情)이 애틋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안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해병대 하사관을 지원할 정도의 용기 있고 개성이 강한 젊은이들이다. 최하로 작은 골목의 골목대장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고 게다가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스무 살 수컷들이었다. 당연이 영역표시(?)가 하고 싶은 때가 아닌가? 표현이 거칠다고 탓하지 마시라. 진해 교육기지 삼정문(三正門)을 들어서면서 이미 우린 인간이 아니었으니, “너희들은 이 시간부로 ○ ○○들이다.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다.” 그렇게 우리 동기생들은 인간한계의 극한도전을 시작했다. 힘든 일과의 연속이었지만 동기생들 간의 갈등으로 거의 매일 밤 연대기합을 받아야 했고, 엉덩이가 편할 날이 없었다. 한 바탕 광풍이 몰아치고 지나가야 마음 놓고 토끼잠을 자야만 했다. 싸우면서 정든다고 했던가? 그런 와중에도 알게 모르게 끈끈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결속시키기 시작했다. 낙오할 것 같은 동기들을 서로 부축하고 밀고 당기며 우리는 점차 하나로 엮어졌다. 자연스럽게 동기(同期)가 되어가고 있었다.


 “돼지는 잔칫날 잡아먹기 위해 키운다. 귀관들은 전쟁을 대비해서 육성한다. 훈련으로 땀을 많이 흘리면 전쟁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는 교훈을 잊지 말라. 귀관들은 두 번 죽는다. 는 각오로 훈련에 임하기 바란다.”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화두다. 두 번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아주 먼 훗날 우리는 그 말의 뜻을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사관 학교를 수료한 두 번 죽는 42기는‘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이국의 전선으로 파월되었다. 생존을 위한 사투(死鬪)를 하면서, 가난한 나라의 군인이 겪어야 하는 서러움을 삼키며, 일등국민을 자처하는 부자(富者)나라 군인(軍人)들 그네들보다 더 강하고 우수한 민족임을 보여줘야 한다. 는 신념으로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짜빈동 전투에서 신화(神話)를 창조한다. 전승(戰勝)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 동기생 119명 중에 보병 분대장으로 파월되었던 동기들 거의 50%가 돌아오지 못했다. 6.25 한국전쟁에서 소대장이 많이 희생된 소대장 전투였다면 베트남 전쟁은 분대전투로 분대장의 희생이 많았던 전투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그 전장에서 불꽃같이 산화한 동기들을 남겨두고 살아 돌아온 동기들을 찾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보훈처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면서 2005년부터 찾아낸 동기생들이 20여명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鎭)42기 동기회다. 모처럼 동기들의 금년 송년모임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얼마나 더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을 때, 아직은 다닐 수 있을 때 그들을 보아야 되겠다. 베트남에서 한 번 죽었고, 이제 두 번 죽음도 멀지 않았을 테니,,,,,,.


 (2023년 월간문학2월호 등재)

매거진의 이전글 축구 이야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