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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미 Feb 28. 2024

1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운명

1-1 내곁으로 온 엄마

2004년 친정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멀리 광주에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4년 양쪽 무릎이 망가져서 걸음걸이가 힘들어진 엄마의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계기로 나는 엄마를 우리 집 바로 옆집으로 모셨다. 수술한 무릎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한참이 걸렸지만 모처럼 나는 너무 행복했다. 그동안 큰며느리로 살아가면서 엄마에게는 제대로 신경도 못 쓰고 살아온 오랜 세월이 아쉬웠는데, 엄마를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어 기뻤다. 엄마 품에서 자며 엄마 볼을 비벼보기도 하고 음식을 잘하던 엄마의 손맛도 즐기며 행복한 1년여를 보냈다.     


당시 내 일과는 옆집에서 살고 있는 엄마에게 아침 문안 인사 가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좀 이상했다. 엄마의 방문에 다다르면 늘 텔레비전 소리가 엄마의 기상을 알렸는데 그날따라 너무나 조용했다. 방문을 열어도 엄마의 기척이 없다.


“엄마, 어디 아파? 왜 안 일어났어?” 

“응 몸살이 난 거 같아.” 겨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2박 3일간의 교회 수련회를 다녀온 뒤였는데, 그 일정이 엄마에게는 아마도 조금 힘들었나 보다. 아침을 준비해드리고 식사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내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도 엄마는 일어나지 않았다. 호흡이 조금 거칠었지만 평상시 엄마가 숨차하는 증세가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에 가보자는 설득에도 “아니야, 며칠 쉬면 좋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라” 하는 소리에 또 하루가 지나갔다. 

    

엄마는 그다음 날도 일어나질 못했고, 미열이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생각에 엄마를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의사 선생님은 몸살감기라며 감기약 처방을 해주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엄마의 증상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이제는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무슨 큰일이 일어난 건가 겁이 덜컥 났다. 가족 대화창에 나의 걱정을 영상과 함께 올렸더니, 서울에서 회사 일을 하던 작은오빠가 하던 일을 뒤로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오빠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엄마가 비틀비틀 화장실을 가겠다고 해서 내 손을 잡고 가는 중에 소변을 질질 흘렸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오빠는 놀라서 곧장 서울의 큰병원 응급실로 모셔가야겠다고 나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오빠가 놀라는 모습을 보니 엄마가 이렇게 되도록 방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죄책감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엄마가 인사불성이 되어 자식도 못 알아보는 지경이 되었다. 입원한 지 2주일여가 지난 한참 만에 진드기에게 물리면 나타나는 쓰쓰가무시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쓰쓰가무시병은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라 환자가 발생하면 보건소에서 조사가 나오고 그 인근 사람들도 매우 조심해야 하는 병이기에 방송에도 발표하는 질병이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쓰쓰가무시병에 대한 치료뿐만 아니라, 뇌동맥류 코일 색전술 시술 등 심혈관 확장술까지 받고, 드디어 한 달여 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건강한 엄마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엄마는 그 후유증으로 몰라보게 달라졌다. 딱 대여섯 살 유치원생 아이 같았다. 본인의 욕구를 표현할 줄도 몰랐고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족들의 걱정이 커졌고, 지능 회복에 도움이 될까 싶어 어린이들이 하는 색칠 공부와 어린이용 학습지를 사서 매일 공부하도록 하였다. 다행히 엄마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눌한 행동이 조금 빨라지고, 스스로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였다. 인지력이 떨어지는 것 외에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전의 인자하고 다정했었던 모습과, 시간 날 때면 나하고 재미있게 수다를 떨었던 엄마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일 먼저 나타난 증상은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분노의 항의를 표출하는 일이었다.     


”살아서도 고생마안~ 고생만 시키더니…. 죽어서도 속을 썩이오!“ 엄마의 눈에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나같이 복 없는 년! 천하에 어딧것소?” 이번에는 포악하게 악을 썼다.  

   

“다라케미(부모님 살던 농장 이름)고 뭐고 죄다 말아먹고 소~옥 씨원하요?”


엄마가 이럴 때면 옆에 다가가서 한마디 거들어 볼까 하다가 불똥이 나에게까지 튈까 무서워 슬쩍 자리를 피하곤 했다.     


엄마는 고래고래 삿대질과 함께 외쳐대더니 아빠의 사진을 들고 안방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놓았다. 엄마가 보지 않을 때, 내가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어느 순간 분노의 화신이 내려온 듯 분개하다가 다시 숨겨놓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엄마는 결국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았고 점점 나의 관찰 대상이 되어갔다.     


엄마가 매사에 소리 지르고 고약한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사람들은 내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말을 하곤 했다. 치매에 걸리면 그 사람의 본래 성격이 나타난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엄마는 누구보다도 더 이타적이고 인자한 분이셨다. 엄마는 강인한 여성과 주부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맹모삼천지교의 맹자 어머니처럼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다. 당시 시골에서 살고 있던 엄마는 자식들을 모두 도시로 유학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도시에서 언니, 오빠들과 함께 자취하면서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정부에서 훌륭한 엄마에게 주는 “장한 어머니상”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엄마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고 배려도 잘하는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분이었다. 동네를 지나치는 부랑인마저도 친절히 데려다가 밥상을 차려주고, 밥도 고봉으로 퍼주었다. 그때 당시는 다들 어렵고 못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 살림이 어려운 집 애들을 데려다가 당신 자식들 옷을 내주고, 떨어진 옷도 손수 꿰매거나 재봉틀로 정성껏 바느질해서 다시 입혀 보냈다.     


우체부 아저씨나 지나가는 과객들조차도 그냥 보내지 않고 항상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골집 강가에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아침이면 바리바리 아침상을 차려서 머리에 이고지고 가져다주곤 했다. 근처 소나무로 둘러싼 야영장에 군부대가 훈련차 오면, 김치며 반찬거리를 엄청나게 많이 가져다주는 것 외에도 필요한 것 있으면 뭐든지 집에 와서 가져가라고 하는 마음 따뜻한 엄마였다.    

 

우리 형제들이 모여서 어릴 적 얘기를 하다보면, 엄마의 이런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했다. 우리도 없이 사는 살림인데 왜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까지 저렇게 챙기고 퍼주기만 하고 사는지 진짜 속상했다고 토로하곤 했다.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질투 감정이 있어서였을까? 라고 얘기하면서 이야기는 일단락이 되곤 했다. 그랬던 엄마가 어떻게 이렇게 180도 다른 엄마로 변했을까? 엄마가 하루가 멀다고 하는 욕지거리와 고함치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엄마처럼 급격한 정신적 충격이나 심각한 질병으로부터의 회복 후에 치매가 발병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엄마의 경우, 위암으로 사망한 친정아버지의 잃음과 홀로 남겨진 고독한 시간, 그리고 자신의 건강 문제로부터 강력한 충격이 치매 발병의 일등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가 치매를 단순히 나이로 인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정신적 충격이나 신체적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치매 발병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엄마와 도란도란 그리웠던 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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