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혁명은 우리를 해방시켰을까?
<들어가는 말>
이 브런치북의 컨셉은 '한 권의 책 같은 글'이 된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긴 글이에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주제에 대해 조사하며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만났듯, 독자/작가님들도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 또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선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차를 남기지 않고 흐름을 따라가면 좀 더 흥미로운 전개가 될 것 같아 생략하려 했지만, 목차를 남기는 게 예우인 것 같아 남깁니다.
<목차>
1. 성혁명은 무엇인가?
(1) 성혁명의 역사
- 놓치기 쉬운 전제
* 과거 경험 속 성혁명이 나와 부딪힌 영역
*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할 권리가 있는가?
(2) 페미니즘에 대한 역사적 시선 (Feminism of Care vs. Feminism of Freedom)
(3) 페미니즘의 시선 속에 간과되는 기술의 발전
(4) 경제활동과 모성의 가치를 바라보는 현대사회의 시선에 대한 의문
(5) 새로운 페미니즘의 도래: Post-Liberal Feminism/ Reactionary Feminism
2. 성혁명이 미친 영향
(1) 성혁명은 여성들을 해방시켰는가?
(2) 남성적인 것 vs 여성적인 것
- Risk&Crime : 마주하게 되는 범죄의 측면에서
(3) 성혁명의 진정한 수혜자
(4)성혁명의 피해자
- 야동(포르노)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었나?
- 훅업컬쳐&온라인 데이팅: 틴더 문화는 누구에게 좋은 걸까?
- Where are all the good men?
(5) 여성들의 선택과 그 결과
- 대리모 산업
- 경구피임약에 대한 과학적 이슈
* 스트레스 반응성에 미치는 영향
* 심리학,사회과학의 영역에서
(6) 트랜스휴머니즘의 첫 단추
3.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자유: 인구감소 위기
(1) 산업혁명과 '어린이집'
(2) 어린이집과 청소년 정신건강의 관계
(3) 사라진 문명에서 배울 점: 고대그리스와 로마제국
(4) 선택의 자유가 최고의 가치가 될 때
* 선진국은 성진국인가?
4. 반혁명(Counter-Revolution)의 시작
(1) 잊혀진 1세기의 성혁명의 배경: 로마제국
(2) 1세기 성혁명의 시작
(3) 신생아들이 보호받기 시작하는 시점
- 서구사회에서 영아살해에 대한 처벌의 변화
(4) 성문화와 국가의 흥망성쇠
- 역사 속의 일부다처제
- 일부다처제의 사회적 영향
- 일부일처제의 사회적 이점
- The Two Parents Advantage
5. Is there a solution?
- 담배/흡연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살펴보는 '희망'
- SEX: 물인가? 술인가?
*독자선물: Last Dream (inst.)
앞선 글에서 끝까지 다루지 못하고 남긴 주제가 있다.
그건 소위 성혁명(sexual Revolution)으로 불리는 혁명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언급되지 않는 혁명이지만 어쩌면 우리 삶 속에서 산업혁명만큼이나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혁명이기도 하다. 부부가 된 모든 가정과 연관된 이슈이기도 하고 한 세대 건너 자식을 기르는 부모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주제이며, 종종 ’선진국은 벌써 이런데……’ 라며 논리적 분석이나 설득력이 결여된 주장을 마주하게 하는 주제이기도 해서 언젠가는 다루고 싶었다.
앞선 글에서 다룬 [성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한국사회에서 ‘요원하게 느껴지는 미래’의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 될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 편견일 수 있겠지만)
하지만 ‘성혁명’은 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MZ세대의 M에 속한 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마주하기도 했고 우리 부모들이 이미 겪었으며 우리 아이들이 절대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주제이다. (한국 MZ세대의 Z들은 어떨까?)
부모로서 오늘 미리 마주해보는 질문은 이렇다:
“아빠, 나 여자친구/남자친구 생겼어요.
나랑 자고(ㅁOO하고) 싶대요. 어떡해요?”
(역시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는 관계의 아빠가 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 될 수 있겠다…)
성은 우리에게 굉장히 사적인 영역인만큼 정부나 타인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외적인 것들이 있었다.
성매매/성산업이 그렇고, 성인과 아동/미성년의 성관계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의가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를 범죄로 취급한다. 또 성범죄 역시 다른 범죄보다 더 중범죄로 보는 시선은 사회전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청소년이 성인물/포르노에 노출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문제로 취급하고 다룬다.
좀 더 보편적이며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성에 대한 인식, ‘성적 자유’에 인식은 당연히 ‘임신과 출산’에 영향을 미친다.
임신과 출산은 인구수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성교육과 피임이 보편화되어도 그렇다.
단편적인 사례를 하나 찾아보자. 십대청소년 임신은 엄연히 사회문제가 된다.
미국 10대 청소년(15-19세) 출산에 대한 과거 통계를 살펴보면 1950년도에서 1960년대로 넘어가며 급증한다.
1998년대 통계를 보면 선진국들 중에서 미국이 1위로 1950년 말에 1000명당 96.3명까지 치솟 였다. 1000명당 50명 이상이고 그건 2위 영국 3위의 1000명당 30여명과 큰 격차가 있다. (아래 이미지 참고)
출처: (좌)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123322/
(우)https://opa.hhs.gov/adolescent-health/reproductive-health-and-teen-pregnancy/trends-teen-pregnancy-a
다행히(?) 1991년에 최고점 1000명 당 평균 61.8명에서 2020년 15.4명까지 내려와 하향세에 있다. 하지만 그 숫자가 158,043명이 출산을 했다. (인종별로 나누면 히스패닉>흑인>백인>아시아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중의 부모라면 모두 이 성에 대한 인식이 자녀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요소라는 것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듣는 음악, 보는 드라마와 영화 ,입는 옷 모두 이런 문화적 영향을 받고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즉 ‘성혁명’이 미친 영향을 통합적으로 아는 것은 학문적으로 여성학이나 여성주의(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 외의 일반인에게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쇠퇴했다고 하지만 한국 주류사회의 기독교가 ‘전통적인 가치관’ 혹은 ‘성에 대한 보수적 입장’에 대해 목소리를 내어왔다. (그중 일부는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유교적으로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그리고 ’진보’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것(혹은 변화)’이라면 그 자체가 유익한 것처럼 ’성‘에 대해서도 다른 목소리를 내어왔다.
얼핏 생각해보면 예전에 전통이란 이름으로 억압되어 오던 성을 ’해방‘하고 개인에게 ‘자유’를 부여했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유교문화에서 억압 받던 여성들이 2세대 페미니즘(혹은 2차 페미니즘)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사회문화적으로 큰 목소리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헐리우드 영화 속, 팝송 가사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도 자연스레 이 시대가 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그렇듯 별 생각없이 흐름에 따라 살아가다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TV/유튜브에서 나오는 것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주변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지금은 성적으로 보수적 (혹은 전통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한물간’ 것처럼 취급당하기 쉽다.
살펴보니 성性은 의외로 많은 영역에서 우리와 맞닿아있었다. 패션과 제약을 포함한 산업부터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과 같은 학문, 교육, 문화콘텐츠, 법, 범죄…. 그리고 예상 외의 다양한 곳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우리는 ‘성’을 통해 ‘만들어지고’, ‘태어나며’, ‘성’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류이다.
그런 우리에게 ‘SEXUAL REVOLUTION’, 소위 ‘성혁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하면 6.25 사변 (중국에선 조선전쟁이라 부른다)이 대표하는 1950년대, 전후 재건의 시대였던 1960년. 그 무렾 서구에서는 ‘성 혁명(sexual revolution)’이 확산되기 시작된다.
간과되기 쉬운 보이지 않는 영역인 철학부터 살펴보자.
우선 유럽발 포스트모더니즘이 있었다.
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대표적이고, 그 후속주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와 같은 미국의 철학자들이 성(性) 역시 ‘고정관념’이자 ’사회통념‘으로 보고 ‘해체와 재구축’ 작업의 토대를 만들었다.
여성의 권리,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여성주의/페미니즘의 주요 과제로 삼아오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도 마이클 푸코와 마찬가지로 1997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성인-아동 간 성관계의 비범죄화'를 하는 청원에 이름을 올린바 있다.
**:글을 마무리하던 중 아이들과 방문한 동네 도서관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책 번역본을 발견해서 훑어보앗다. 역시 ‘전통적인’ 남녀로 구성된 결혼과 성관계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며 어떤 장에서는 근친상간 역시 ‘다른’ 성적 취향에 불과하다는 뉘앙스로 그 당위성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젠더허물기>)
지난 글(https://brunch.co.kr/@thewholeiceberg/132)에서 언급했듯이 언어철학적으로는 기존의 언어 위에 새로운 의미를 덮어씌우며 기존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가 수십년간 이뤄져왔다. 그리고 우리는 21세기 성과 관련된 양극화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미국과 유럽사회를 보게 된다.
좀 더 세부적으로 역사속 사건들을 살펴보자.
1948년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알프레드 킨지의 보고서가 ‘과학’의 형태로 이론적으로 기여했고, 문화적으로는 1950년대의 플레이보이(playboy) 잡지가 ‘외설적’으로 여겨지던 ‘성적 이미지’들을 주류 문화에 도입한다.
그 위에 1960년대의 FDA의 경구피임약 승인과 당시 ‘역문화counterculture’와 ‘Free love’란 이름으로 남녀부부, 일부일처제 등 전통적인 결혼관과 기존 성관념과 성역할을 거부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뉴욕에서 1969년에 ‘스톤월 폭동(stonewall riot)’을 통해 LGBTQ+의 성적지향성과 성적 자유, 젠더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운동이 있었다.
(한국어로는 ‘스톤월 항쟁’으로 번역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메인스트림은 ‘진보’적이니 이해가 된다.)
1970년대가 되어 Equal Rights Amendment,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이 나오고 비준되지 않았지만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1973년에 유명한 Roe V. Wade 케이스로 미국에서 낙태를 합법화하했다.
1970년 후반대에는 보수파에서 도덕적 이유와 전통적 가족가치관을 옹호하는 저항이 있었고, 1980년대가 되어 에이즈가 유행(epidemic)하며 성적해방운동에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느덧 ‘성적 자유’가 ‘선진국의 문화’이며 마땅히 누려야할 자유라고 생각하는 목소리가 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성혁명의 발자취를 살펴보니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던 것들이 보였다.
먼 과거 속에는 복합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었고, 가까운 과거 속에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의약학기술 분야에서의 발명품들이 있었다.
얼핏 생각해보면 현대 사회에서 깊은 고민 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전제가 있었다.
생물이 진화해왔듯이 인간이라는 생물로 구성된 사회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할 것이라는 믿음.
과거는 잘못되어있고 지금이 더 낫고 더 옳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바라볼 때는 잘못된 것만 선택적으로 보고 현재의 현상은 옳은 것으로 가정한다.
그렇게 ‘진보’라는 단어가 ‘옳음’이나 ‘정의’와 동의어가 되어가는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역사 속의 사례를 보면 공감대를 만들기 쉬운 사례는 찾아볼 수 있다.
왕과 국민,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 철폐, 부모가 정해준 가문 사이의 결혼에서 ‘자유연애’로, 봉건제도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나 역시 그렇다.
20세기의 유교문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과거의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저항한 것이 많이 있었다. 장유유서, 같이 어른이 아이들 보다 ‘권위’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의문이 있었다. 남존여비, 왜 할머니가 내 여동생보다 나를 편애를 하는 게 그 시대에는 당연했는지 반감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 역시 삶의 대부분을 진보주의적 성향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온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존에 차별 받던 여성에 대한 대우나 권리가 사회에서 ‘남녀평등’의 방향을 향해 확장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사회학적으로는 1세대 페미니즘에서 이뤄낸 성과이고, 좀 더 멀리 역사적으로 보면 현대인이 간과하기 쉬운 1세기에 있었던 ‘성혁명’이 시초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글 속에서 더 상세히 다루려 한다)
하지만 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차이’와 ‘차별’은 다른 말이다.
만약 두 그룹 사이에 어떤 ‘상이相异’(다름)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다름’을 없애야 ‘평등’해진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철학적으로 깊이가 없는 주장이라고 반론하기 쉽겠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았다.
*과거 경험 속 성혁명이 나와 부딪힌 영역 1: 낙태 권리
몇 년 전, 뉴스에 보이는 피켓 사인에 ‘낙태권’을 주장하는 ‘my body, my rights’ 를 외치는 이들과 같은 의견을 페이스북에 게시한 미국 고등학교 시절 친구 R.
예전에 임신 주차에 따라 태아의 발달 단계를 공부했던 예비 아빠의 기억과 어느 시절에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낙태당한 태아들의 모습이 겹쳤다.
난 논리적으로 두 입장 차이를 비교해서 물었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생물학적으로 몇 주차의 수정란부터를 생명으로 분류하는지, 다른 인간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자기 생명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의존적인 상태일 때 그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들을 빼앗을 권리가 타인에게 있는지 등.
그리고 임신한 아내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의 심박을 들어오며 아이를 맞이한 내가 여성의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친구이기에 가능한 시도였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기에 최대한 감정적인 대립이 되지 않도록 의식하며 구성된 문장과 뉘앙스로 질문을 했다.
R은 표면적으로는 구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의견들을 나열했다. 하지만 감성적 주장이 생물학적 정의를 무효화하고 부정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개인의 편의’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자유지상주의’로 요약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
자유.
선택권.
역시 철학적인 배경이 다분히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는 영역이었다.
아마도 ‘자유’는 최고의 가치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역시나 그 길에는 ‘나를 파괴할 자유’와 ‘사회를 파괴하는 자유’가 대립하고 있었다.
성혁명은 ‘기존의 가치관이나 전통으로부터 억압되어 있던 성에 관한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행동의 변화는 사회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하지만 사상은 그렇지 않다. (People are equal, but Ideas are not.)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사상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은 결과를 낳는다.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걸 모르면 의미 없는 ‘왜 나한테?(WHY ME?!)’ 라는 절규를 마주하기 쉽기 때문이다.
성혁명을 다루기 위해서 꼭 거쳐지나가야 하는 주제가 있다.
그건 여성주의 혹은 여권주의女权主义, 외래어를 그대로 쓰자면 페미니즘이다.
사실 남성으로서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꽤 부담감이 있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된 적 있는 페미니스트 철학자 캐틀린 스톡 교수의 텍사스 대학교의 강의 중 한 장면이 내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삐딱하게 앉아있는 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페미니즘은 여성(woman and girls)을 위한 거라고 하셨는데, 남자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나요?“
아래는 그녀의 답변이다.
”페미니스트 비슷한 건.. 될 수 있죠.
(Certainly, I think guys can be feminist-adjacent)
Kathleen Stock, FBR
"(번역) 성인여성과 여자아이들의 well-being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거죠. 제가 남자였어도 관심을 갖았을 겁니다. 또 저는 여성만이 ‘여성womanhood’ 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 하지 않습니다. 그건 말도 안되요. 왜 남자들이 여기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생략)"
(원문):“The interest in the well-being of women and girls is a good thing, why not? I would be interested in that if I was a man. I also don’t agree with the idea that only women can talk about what womanhood is. That seems crazy to me. I just don’t understand why men couldn’t have something to say about that. ..”
난 많은 영역에서 전형적인 남성성을 띄고 있지는 않지만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남성이다.
쉬는 시간에 게임이나 영상시청을 하는 것 대신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전통적인 관점에서 전형적인 남성은 아닐 거란 생각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스톡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페미니스트 비슷한…’ 그런 존재이지만(?), 어머니, 아내, 딸들이 있는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빠로서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살아왔다.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직접적인 경험이 결여된 남성’의 관점에서 여러 이슈들을 바라보게 되는 한계를 예방하기 위해 주로 여성작가들의 주장을 글의 토대로 삼아 내 의견을 더하려 한다.
지난 글을 쓰다가 만나게 된 분석철학자 ‘캐틀린 스톡’ 이나 저널리스트 ‘헬렌 조이스’가 영국 작가들이었는데, 이번에도 영국 여성작가들의 책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이 작가들 역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작가들이 주장하는 바는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책 두 권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던 것이었는 지를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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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매리 해링턴은 20대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퀴어이론과 페미니즘, ‘비판이론(Critical Theory)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칭 하드코어 ‘쥬디스 버틀러’ 지지자였다. 그렇게 십대시절부터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전통적인 구조와 통념을 거부하며 살아왔다.
인터넷의 보편화는 그녀에게 비슷한 사람들과의 ‘커뮤니티’를 찾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인터넷 버블’이 꺼지고 2008년 경제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소규모 인터넷 서비스 회사에서 일을 하며 퀴어들과 ‘코뮨’형태의 공동생활과 레즈비언의 로서의 삶도 시도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과적으로 사업적으로나 사적인 삶에서도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그런 그녀는 어느 날 평생 믿어왔던 사회의 진보(progress)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진보라는 이름의 사상 속에는 가히 신학적(종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철학적 전제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진보주의(progressivism)은 인간 사회가 생물이 진화하듯 ‘더 나은 형태’로 발전/진보하는 흐름이 있다고 믿는다. )
그녀는 의사였던 할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자라왔다고 한다. 진보주의 성향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대학생이었던 그녀에게 할머니는 평범하게 사는 걸 도전/실험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이 뇌리에 남아 있었는지,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던 그녀가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 재고한다.
그런 그녀가 사랑을 만나게 되고 아이를 갖게 된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의 경험이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로서 갖고 있던 생각에 대한 의문을 품게했다. 그 후 심리치료사로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과거에 갖고 있던 사상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사회학적) 진보 신학(Progressive Theology)*’를 버리고 페미니즘의 역사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기독교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사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진보 한다는 가히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Feminism of Care vs. Feminism of Freedom
현대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온 페미니즘의 역사는 산업화 이전까지 거슬러 갔다.
페미니즘 역시 적어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 되어있었다.
모성을 간과하지 않고 ‘돌봄’의 가치를 고수하는 Feminism of Care, 돌봄의 페미니즘이 있었고,
자유를 추구하는 Feminism of Freedom, 자유의 페미니즘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는 주로 브루조아/귀족들이 자유의 페미니즘을 대변했고 일반 민중은 ‘돌봄의 페미니즘’을 옹호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페미니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여성의 해방‘을 지상최고의 목표로 삼는 페미니즘이다. ‘돌봄의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약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그리고 2세대 페미니즘이 대거 반영된 실제로 반영된 여성의 ‘해방’과 ‘자유’는 왠지 “남자처럼”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Work like a man and have sex like a man"
= 남자처럼 일하고, 남자처럼* 섹스하고”.
1998년에 처음 방영한 ‘섹스 앤 더 시티’의 첫 에피소드에서 헤어진 과거의 연인과 ‘감정 없는 섹스’에 성공한 주인공은 말한다.
I’d realized that I’d done it. I’d just had sex like a man. I left feeling powerful, potent and incredibly alive.
내가 그걸 해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방금 남자처럼 섹스했다. 그리고 powerful, potent,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새러 파커, <Sex and the City>
*루이스 페리의 책에 나온 것을 재인용.
과연 이것은 진보 였을까?
아마도 우리는 여성은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보고 남편은 회사나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는 모습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도 나가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해방이고 평등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페미니즘은 그렇게 주장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싸워서 얻어낸 권리라고.
그런데 역사를 좀 더 되돌아 가보면 산업혁명 이전에는 일상 속에서 남자도 여자도 같이 일을 했다.
농가를 생각해보자.
밭을 메는 것부터 가축을 돌보는 것 부부가 같이 해왔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아이들도 동참한다.
보편적으로 늘어나는 아이의 수가 인력의 증가이며 가정경제의 직접적인 수입증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하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그림은 인류 역사 속 꽤 나중에 나온 모델이다.
일을 나눠서 했던 부분도 있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원재료를 공급하면 여성이 가공을 하는 형태이다.
더 원시사회로 가면 남성이 사냥을 해오면 여성은 요리를 한다거나, 남성이 천을 사오면 여성이 옷을 만든다거나.
동아시아의 전래동화 견우직녀에도 드러나듯이 전통적으로 옷을 만드는 것과 타일을 만드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다. 그리고 산업혁명 중의 일부로 방직, 섬유산업의 기계화로 여성의 일이 대체 된 것이다.
물론 신분과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도 있겠다.
매리 해링턴의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비평에 따르면 여성학계에서는 이런 기술이 미친 영향을 간과하고 모든 걸 ‘power game’으로 해석하는 맹점이 있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마주한 가장 역설적인 비평은 아마 미국의 철학자 크리스티나 소머스의 다음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예전에 진보주의적이었지만 지금은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다.
(Feminism used to be liberal, But now it's marxist.)
Christian Hoff Somers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들이 누리지 못했던 투표권과 같은 ‘평등’을 추구하고 이루어내었다면, 2세대 페미니즘은 ‘평등’을 넘어선 ‘동일’을 추구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현존하는 남녀의 차이는 오롯이 사회학적으로 주입된 것이기 때문에 유아시절부터 ‘성평등’을 기반한 교육을 하면 이를 온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전제로 이어진다.
분명 사회 통념으로 시작된 것들도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자 아이는 하늘색 옷, 여자아이는 분홍색 옷…남아는 자동차, 여아는 인형…남아는 스포츠, 여아는 발레나 미술…. 이런 건 다분히 부모가 결정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생각해왔던 부분이다. 하지만 남녀평등이 정치적으로 가장 잘 적용된 북유럽의 국가들에서 직업에 따른 성비 통계는 생물학적 차이를 시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과 과학적 통계분석이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아 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영역이다.
하지만 모성(motherhoood)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성이 임신을 하고 수유를 하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강요 받아서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출산 후 최대한 빨리 일터에 복귀하는 것은 여성이 아닌 ’자본가‘/고용주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게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경력단절‘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특권‘이고 ’아이를 돌보는 것‘은 ’피해‘인 것처럼 보는 시선이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의문이 있었다.
감성을 최대한 끌려올린 이성적인 남성으로 육아와 경제활동을 ‘분석’을 해본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어떤 것들은 미국 경제학자 토마스 소웰이 말하듯 완벽한 해결책은 없고 어떤 대안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것들(trade-off)이 생긴다.
남성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줄일 수 밖에 없다. 아이를 보육시설이나 부모/친척에 맡기지 않은 여성은 일정기간 동안 어린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경제활동을 하는 것만 ’가치 있는(Valuable)‘ 활동이라고 정의하면 육아는 손해로 인식되기 쉽다.
이런 뉘앙스의 푸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누구는 나가서 일하고, 누구는 집에서 애나(!) 보고 있고…‘
이런 의식의 흐름 속에 일단 ’아이‘는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엄마의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짐‘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풀어놓고 설명하면 동의할 수 있는, 아니, 동의 하고 싶은, 사람의 수는 줄어들 거다.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아빠의 입장에서 설명해보자.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은 ’아이의 가장 아름답고 귀여운 순간‘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고된 부분도 많다.
말도 안 통하고, 시간과 애정의 ’블랙홀‘인 것처럼 주면 줄수록 더 원하는 게 사실이다.
(언제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겠지만)
육아에 투여된 시간은 직접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대로 그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다면) 아이의 첫번째(no.1)이자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엄마가 된다. 이 애정의 뿌리는 평생을 간다고 할 정도로 기억과 무의식에 자리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한다면 ‘아빠가 좋아‘라는 답을 듣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일부 ‘아빠가 좋아’라는 답변은 아빠의 부재에 대한 희소성의 가치 혹은 ‘엄마가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을 허용하는 아빠의 반칙 때문일 수 있겠다)
아빠가 함께할 수 없는 아이의 수많은 ”첫ㅇㅇ” .
그게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낭만적인 포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꽤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게 뭐 그렇게 좋은 거라고’
아니, 일 해야 하는 게 뭐 그리 좋은 거라고.
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건 멋지고 아름답다.
근데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일은 의미와 보람은 있겠지만 ‘즐겁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회생활이라는 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더럽고 치사해도 참아야 하는‘ 일상의 연속이다.
일부 ’행운‘과 ’각고의 노력‘의 산물로 자신의 “꿈”을 업으로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직원은 직원의 고충이 있고 사장은 사장의 고충이 있으며,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는 아티스트들의 삶 속에도 그들만의 스트레스와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커리어 우먼’이 성공이고 ‘엄마’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본다.
남자들이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왜곡된 시선이 느껴질 때가 많다.
※스탠딩코미디에서 언급된 '일할 권리'
우연히 보게 된 아시아계 코미디언 여성 코미디언 Ali Wong의 스탠딩코미디 “We used to be Free”가 떠오른다. 임신 중에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무대에서 그녀가 외치는 풍자이다.
물론 풍자는 풍자, 개그는 개그임을 기억하며 들어야 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그 여자들이 나타나 자랑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어!” “우린 뭐든지 알 수 있어” 라고 했죠.
조용히 해(Shut up, B****)!! 그들에게 우리 비밀을 알려주지마! ..페미니스트들이 다 망쳐놨어. “
영어 리스닝이 된다면 아래 짧은 코미디 영상을 보며 쉬어가도 좋겠다.
(출처 https://youtu.be/fjYkLmPX1x8 (we used to be free: Ali Wong)
개그를 설명하면 재미가 없어지지만 풀어보자면 이렇다.
여자가 남자만큼 똑똑하고 일 잘할 수 있었던 건 여성들도 예전부터 알고 있던 건지만 (일 안하고도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이젠 일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사회의 기대치가 되었다는 거다. 임신 중에도, 산후에도.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엄마들도 사회의 시선의 영향 때문에 일해야 하는 압박을 느끼게 됐다. 아이는 다른 시시설에 맡기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그의 소재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너무 진지한 분석이 필요한 언어가 아니다.
한 편 매리 해링턴이나 루이스 페리 같은 작가는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질문한다.
“어쩌면 1%,많게 잡아도 10%만 고상하고 멋진 일이죠. 사회통념적으로 ‘멋진 일’ 의사,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을 제외한 나머지 90%는 ‘보통’이나 ‘지루하거나’ ‘고된’ 것이 노동시장의 현실입니다.”
일반회사의 사무직이나 은행원이나 동사무소 직원부터 공장, 물류창고 등…어떤 이들에게는 ‘육아보다는 ‘안 힘들 수’ 있겠지만 그게 과연 엄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유아와의 시간 혹은 ‘애착관계가 제대로 성립된 아이와의 시간’만큼 가치가 있을 지는 의문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생활의 필요를 위해 마지못해 일터로 나가는 여성들을 비평하는 논조는 아니다. 또 일하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뉴욕의 진보주의 심리분석가이자 ‘패어런팅 코치parenting coach’인 에리카 코미사(Erika Komisar)이 한 강연에서 인용한 말이 내 뒷통수를 때렸다.
아이들은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Children are not a distraction from more important work. They are the most important work.
(John Trainer)
남녀평등이란 목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당연함이며 심지어 ’선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녀평등‘의 뜻이 ’여성도 남성처럼‘으로 혼용되는 영역이 있다면 다시 질문해봐야하는 부분도 있다.
“여성도 ‘남성처럼’ 투표할 수 있도록“ 과 “여성도 ’남성처럼‘ 일터에서 일 할 수 있도록” 은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아이가 있냐 없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여성도 ‘남성처럼’ 책임감 없는 ‘섹스’를 누릴 수 있게”는 투표권과 전혀 다른 영역이다. (물론 저 남성처럼 이란 말 속에 생략된 건 '형편없는/나쁜' 남성처럼이다)
하지만 이 구분을 자각하지 못하면 모든 게 다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물학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부정하는 위험한 비현실을 향해 달려가는 게 될 수 있겠다.
매리 해링턴은 자신의 페미니즘을 ‘포스트-리버럴 페미니즘’ Post-Liberal Feminism, 또는 리액셔너리 페미니즘Reactionary Feminism 이라고 표현한다. 현대사회의 주류 페미니즘에 대해 비평하며, 사회정치적 진보/변화에 비판적인 의견을 지닌 반동분자의 페미니즘이라고 번역해야 조금 그 느낌이 전달된다.
2차 페미니즘/여성주의의 한 구석에는 ‘남녀차이는 사회학적인 것이며 남녀는 동등한 것을 넘어서 동일하다’라고 주장하며 생물학적 성에서 오는 ‘차이/구별’을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처럼 해석하기도 한다. 그게 앞 장에서 다룬 트랜스젠더리즘/젠더이데올로기로 이어졌다.
'리액셔너리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받아들이며 ‘전통적인 역할과 가치관’을 재조명한다. 그녀는 현대 페미니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며 성의 해체와 기술의 역할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고 비평한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 중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생물학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남녀가 다른 부분에서 다른 역할과 가치를 갖는 것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가치가 미혼의 ‘커리어우먼’보다 낮다는 현대 페미니즘의 해석을 거부한다. 현대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의 ‘일할 권리’를 그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마치 [여성이 평생 미혼인 상태처럼 일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자유]라고 말하는 듯 하다고 느껴왔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인지와 파악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필수적 요건이다. 어떤 제안도 현실과 동떨어졌다면 유용한 제안이기 어렵다.
다음 장에서 성혁명이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남성으로서 내가 직접 살펴보기 어려운 영역을 영미권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다시 성혁명의 시대로 돌아가보자.
배경은 미국이다.
성혁명이 시작될 무렾 그 시작을 함께 한 것은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이다.
때마침 경구피임약도 FDA승인을 받아 보급화 되기 시작한다.
자유로운 성문화의 가장 큰 수혜자와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
정말 2세대 페미니즘이 말하듯 여성이 해방된 걸까?
인터넷 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재의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자유'는 "아빠처럼 일하고 오빠(혹은 남동생)처럼 섹스하는 것"이다. 일단 일 밖에 모르는 워커홀릭 아빠의 삶이나 무책임한 성적"자유"를 누리는 게 해방일까?
개인주의, 지식노동의 보편화, 온라인 소통이 주류가 된 현대사회에서 남녀 차이는 최소화 된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이성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 다른 성별의 아이를 키워 본 부모, 헬스장에서 중량 운동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녀의 보편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부정하지 않을 거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크고 강하다. 물론 어떤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도 있다. 하지만 평균의 개념에서 이야기할 때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 이라며 예외적 아웃라이어(outlier)를 이야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런 근력 차이 외에도 성인 여성에게는 보편적으로 월경이 찾아온다. 여성호르몬과 남성호르몬이 미치는 영향도 그 절대량과 비율도 다르다. 생물학적 차이 외에도 심리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연구도 꽤 있다.
남성성이 좋고 여성성이 나쁘거나 그 반대의 주장은 기껏해야 ‘선호도‘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은 착오에 불과하다.
남성처럼 되고자 하는 노력이 ‘공평’이나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렇다.
‘다름’이 가진 차이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들을 고유의 특성으로 보거나 상호보완적이라고 보는 관점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과학적 근거가 있다.
커리어우먼의 이미지가 ‘남자같은 여자’가 되는 게 과연 옳은가?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가 ‘어머니가 되지 않은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게 과연 ‘여성’을 존중하는 것일까?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도 지난 10년간 봐온 일이다.
그게 현실적인 ‘편리함’을 위해서 일지 모르겠지만, 부장, 본부장, 사장 자리에 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짧았고 바지를 입었다. (물론 짧은 머리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바지 역시 남성이 독점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이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고정관념이란 것을 대입해서 보면 이런 현상은 비즈니스계에서 포착되는 ’남성화‘일지 모르겠다.
“남자처럼“ 술을 많이 마시고, “남자처럼” 담배피고, ”남자처럼“ 늦게 까지 술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여성 ’간부‘들. 기존 비즈니스 문화의 패러다임이 남성 위주로 구축되어 있으니 여성이 ’남성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적응하고 자기 자리를 잡아가려 했던 것인지 모른다. (다행히 이 흐름 중에 '소프트파워'라는 이름으로 '여성리더십' 문화가 달라지려 했던 트렌드도 기억이 난다.)
물론 업계마다 각 회사의 문화나 분위기에 따라 다르기 떄문에 한 시대의 추세를 대변하는 사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단순하게 구분하는 것 대신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으로 비교분석하면 다른 게 보인다.
”어허.. 어디서 여자가 술/담배를 …!” 이라는 구시대적인 생각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여자도 술 마시면/담배피면 되지.” 라며 음주/흡연의 ’자유‘를 누리는 게 유일한 선택지인가?
음주/흡연 자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서로 다른 남녀의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바라보는 게 좋다는 이야기이다.
태아가 엄마의 몸 속에서 자라는 게 생물학적 사실일수 밖에 없다면 임신 기간 중 남편이 술을 마시는 것과 아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류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내가 임신 중에 술 취해서 들어오는 남편이 아내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이 호르몬을 통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도 있겠다.)
사실, 과학적 사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차이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걸 기반으로 이해하는 게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여 성차별이 있었던 적이 있다는 것 역시 기분 나쁜 사실이다.
여성의 뇌가 평균적으로 작다는 것을 가지고 지적능력의 열등을 주장했던 시대도 있다. 평균적으로 여성의 신체가 더 작기 때문에 나온 통계일 뿐인데. 뇌 크기로 비교하면 고래가 인간보다 월등할텐데 그런 주장이 있었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RISK & CRIME: 마주하게 되는 범죄의 측면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남성이 누릴 수 있는 자유 (혹은 무식함에 가까운 무모함)와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 딸이 나중에 자라 성별의 차이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게 있다면 그건 ’불평등‘ 이나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혼자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입고 싶은 스티일의 옷을 입고,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을 하고...
하지만 어떤 건 이 세상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
Victim-blaming, 피해자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다.
예전에 친구와 여성의 안전에 대해 토론을 할 때, 벗어나지 못했던 '무한 루프' 속의 주제이다.
"왜 범죄는 남성이 저지르는데, 여성이 조심해야 하나?"
불공평한 것 맞다. 하지만 공평과 안전은 별개의 영역이다.
루이스 페리의 책에서 아래 문장을 만났을 때, 10여년 전의 그 대화가 떠올랐다.
"Don't Rape 라고 적힌 포스터가 예방할 수 있는 강간의 수는 정확히 말하면 0이다. 강간은 이미 불법이고, '장래의 강간범'들도 그걸 알고 있다. 우리는 얼굴이 파래질 때까지 'don't rape'를 외칠 수 있겠지만 이건 어떤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할 거다.
(원문: posters that say "don't rape" will prevent preciesly zero rapes, because rape is already illegal, and would-be rapists knows that. we can scream 'don't rape' until we're blue in the face, and it won't make a blind bit of difference.)
국가에 따라 남성이 배낭여행을 하며 마주할 수 있는 ’악‘과 범죄의 유형과 여성이 마주할 수 있는 범죄가 다른 속성의 것일 수 있다는 거다. 국제적으로 Human Trafficking, 인신매매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과 아동이다. 성매매와 성’산업‘의 가장 밑단에서 화면에 출연하고 있는 이들이 자발적인 ’커리어 초이스‘로 포르노 영상에 출연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또 섬뜩할 수 있겠지만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영역도 이 어두운 산업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무료로 넷플릭스 영화나 드라마, 방송사의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는 ’무료시청‘사이트들의 직접 광고배너를 보면 사용자를 타겟팅하여 나오는 광고이상 대부분 ‘야동 사이트‘와 ’불법 도박‘사이트이다.
꼭 야동사이트, 도박사이트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는 그런 사이트를 방문하고 영상을 보는 것으로 그 사이트의 트래픽 증가와 광고수익으로 이어져 가장 밑단의 참여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그저 공짜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어서 본 것인데 그 수혜자가 동유럽 인신매매 조직이 되는 섬뜩한 구조이다. 상상이 아니라 업무 중에 확인한 실제 있는 일이다.
동유럽이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의 아류의 불법사이트들의 운영자가 마피아, 갱단인 경우는 적지 않다. 직접 인터넷 서버 업체를 운영하며 불법 영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남성이 성적으로 ‘자유’로웠다.
자유라는 단어를 쓰지만 이는 잘못된 정의의 자유이다. 부도덕하고 무책임했다.
미혼남성이나 혼인관계 밖의 섹스는 한 순간이다.
그 단편적인 순간을 즐기고 나서 만약에 생물학적 결과인 ‘임신’이 ‘발생’하면 그 뒤의 장기적인 ‘불편’은 여자가 지게 된다.
여성이 성관계를 바라볼 때 더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요소가 먼저가 아니라 생물학적 원인이 그 근본에 있다. 그 위에 한 시대의 문화, 종교, 철학이 당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과 이민자들이 주류 문화를 만들었으니 그들에게 ‘전통적인 가치관’은 기독교/개신교였다.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를 말하고 ‘혼외정사’를 죄악시한다.
‘혼외’라 함은 결혼 전도 포함한다.
좀 더 범주를 넓혀 ‘유대교’의 연속성 위에서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ity)‘ 성관계는 결혼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말해왔다. 우리나라의 ‘유교 보이/유교 걸’이란 단어의 느낌을 살려 1950년대 영어로 번역하면 ‘크리스천 보이/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유교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 속의 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유교문화에서도 기생이 있는 기원에 가는 건 풍류로 취급했으니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하고자 했던 ‘구조’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가치관이었다. 프랑스혁명도 브루조아를 기독교와 동일선상에 놓았고, 독일의 니체도 약자를 옹호하는 기독교 가치관을 거부했다. 기독교는 여자와 노예의 종교라고 했던가.
페미니즘도 성혁명도 부당한 사회구조와 역할의 원인을 ‘전통’과 ‘사회규범’으로 규정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것을 ‘해방’으로 규정했으니 기존 성문화 역시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다.
마치 ’모든 자유는 선하고 자유에 대한 규약은 악‘이라고 규정한 뒤 성혁명은 시작된 것 같다.
성혁명이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1세대 페미니즘의 시대에이뤄낸 ‘성평등’. 가장 유명한 것은 투표권이겠다.
물론 그 이면을 살펴보니 세계대전에 참전 하고 사망한 남성인구의 수가 노동인력에 영향을 미쳤던 배경이 있다. 여성이 필요한 노동력으로 대두된 상황에서 투표권에 대해 협상이 가능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특히 영국의 경우, 여왕 엘리자베스가 있고, 마가렛 처칠 수상이 있었다. 여성이 ‘될 수 없는 것’, ‘직종’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 덧 ’알파걸‘의 시대가 도래했고 대학교에서 평균적으로 여학생의 학업성적이 더 우수하고 전문직을 대표하는 법조계와 의료계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높아졌다. 수많은 여성 의사와 여성 변호사는 여성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한이 없다는 것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교육계의 경우, 교사의 비중이 여성이 더 높은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규범을 해체/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중 하나로 ‘성적 해방’을 주요 과제로 삼는다.
그리고 ‘성혁명‘은 모든 혁명이 그렇듯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리게 했다.
누구의 눈물일까?
여성을 ’억압‘하던 남성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었을까?
이 질문의 답변을 천천히 살펴보려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싶어지게 한 가장 첫 번째 인물은 루이스 페리이다.
//지난 글의 트랜스젠더리즘 이슈와 관련되어 인용한 작가들이 출연한 인터뷰어/팟캣스트 호스트/작가이기도 하다. 2022년 처음 다른 팟캐스트에서 그녀의 책에서 주장하는 이야기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의문, 지난 십 여년 간 느껴온 위화감을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조사하고 의견을 피력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서구 사회의 기존 통념에 반기를 드는 문화적 레지스탕스이자 ’잔 다르크‘처럼 느껴지는 작가이다. //
런던출신의 그녀는 굉장히 진보주의 성향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2세대 페미니즘이 가르치는 여성학을 배우며 아래 문장으로 요약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Porn is great.
BDSM is fun.
Sex work is work
그녀는 재학 기간 중에 ‘Rape Crisis Center’ 라는 강간피해여성을 돕는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그게 이어져 졸업 후에도 이 센터에 취직을 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비극들의 데이터가 쌓이자 페미니즘이 가르친 ‘강간은 권력싸움(Power Play)’라는 이론을 의심하게 되었다. (지난 글에서 다뤘던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가 너무 현실을 등한시 한 것처럼 느껴진 것도 그녀의 ‘탈脫 진보’에 한 몫했다고 말한다.)
피해자인 여성들은 대부분 성적매력이 가장 절정인 나이대였고 남성들은 대부분 남성호르몬이 가장 절정을 찍는 나이대였다. 페미니즘이 가르친 사회학적 관점에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남성이 권력을 사용했다는 이론이 아닌 생물학적 요소가 드러맞는 걸 본 후 자신이 배운 페미니즘을 재점검하게 되었다는 배경이다.
영국의 진보주의 성향 미디어에서 글을 쓰던 저널리스트이자 여러 조사를 거쳐 ‘The Case Against the Sexual Revolution’이란 책을 썼다. 현재 진보주의 진영(소위 ‘좌파’)이 추구하는 성에 대한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서. 그녀는 자신의 책이 거센 저항을 받을 것으로 각오를 하고 출간했지만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놀랐다고 한다. 그전까지 모두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하고 느끼고 있었지만 사회적 흐름상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추세였지만 그녀의 책이 명확하게 목소리 낼 수 있는 근거들을 소개했다는 평가이다.
루이스 페리는 “임신과 섹스”의 분리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본 것이 다수의 여성이 아니라 플레이보이의 창립자 휴 헤프너(Hugh Hefner) 같은 남성들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들이 더 자유롭게 사회규범을 무시할 수 있게 한 기술적 발전이 ‘The Pill’로 부르기도 하는 호르몬제 기반의 Oral Birth Control이다. (한국에서는 경구피임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문단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다루려 한다.)
경구피임약이 보급되자 ‘피임’의 주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되는 선택지가 생겼다.
여성도 임신이라는 결과가 뒤따르지 않는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종교가 없는 여성이 성관계에 신중해야할 실증적 이유가 사라졌다. “과거엔 ‘임신하면 어떡하지?’ 라며 거절 할 수 있었는데 진보적 사상이 보편화된 이 사회에서는 상대도 공감시킬만한 이유를 찾기 어려워졌다는 거다.
그전까지는 사상이 아무리 개방적이 되어도 인간의 생물학적 ’필연‘을 수고롭지 않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모든 (이성애적) 성관계는 ’임신‘이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상‘을 실제 행동에 접목시키는 것이 제한적이었다. 성관계의 생물학적 결과를 짊어지는 게 여성이었기 때문에 ’성/섹슈얼리티‘를 마주할 때 여성은 (당연히) 더 조심해야 했고 ’보수적‘이어야했다.
하지만 경구피임약이 각국 관련 부처의 승인을 받고 보급화되기 시작하면서 서사흐름이 달라진다. 여성도 ’남성처럼‘ ‘자유롭게’ 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기술적 토대를 갖게 되었다.
원래 이 약의 발명 목적은 여성을 위해서라고 알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임신에는 짧게는 3-4년, 길게 보면 약 20년의 시간을 할애하는 ‘양육‘이 뒤따른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도 지속적인 임신으로 여성의 삶이 출산과 육아라는 부담이 뒤따른다. 하물며 결혼 하지 않는 연인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삶에 (특히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을 때, 이 ‘발명품’이 여성을 위해서였다는 주장에 크게 의문을 갖지 않고 있었다.
(사회학적으로 여성이 가장 가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싱글맘‘이 되는 거라는 조사결과도 있는만큼 ’아빠가 없을 임신과 출산’은 여성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큰 리스크였다. )
경구피임약의 상용화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게 결혼을 더 공고하게 하고 낙태율을 하락시킬 거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1950년대 이 약이 상용화되고 낙태의 절대수치가 올라갔다. 섹스와 임신이 분리되자 ‘자유로운 섹스’ 혹은 ‘캐쥬얼 섹스’의 절대수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던 15세-19세 10대 임신율 역시 급증했다. 이혼율도 급증했다.
주어가 여성일 때는 여성이 주도적으로 자유로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주어를 남성으로 바꿔보자. 남성 역시 자유로운 성관계를 즐긴 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졌다.
매리 해링턴은 경구피임약이 임신을 ‘남녀 두 사람의 문제’에서 ‘여성의 문제’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계획 외의 임신이라는 상황에 대해 두 사람이 책임을 분담해야 했지만 경구피임약의 보편화로 임신은 ’여성의 실패‘가 되었고 남성이 책임을 도외시 하기 쉬운 상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에게 생물학적 ’옵션‘이 되며, 아빠가 되는 것 역시 남성에게 사회학적 ’옵션‘이 되었다.
미국 영어로 ‘shotgun marriage’라고 부르는 게 사라졌다. ’내 딸/동생을 임신시켰으니 책임져!“라며 남성 친족이 나타나 결혼을 성사시키는 형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구피임약이 전적으로 여성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주장에 의구심이 든다.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임신을 하지 않을 거니깐‘ 심리학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기존의 섹스를 허용하는 대상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 이나 ’약혼자‘에서 그 날 술자리를 함께한 ‘괜찮아보이는 사람’으로 바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매리 해링턴과 루이스 페리는 1차적으로 성혁명의 주요 수혜자가 남성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물론 일부 ’남성처럼 섹스하고 싶은 여성’도 있겠지만 그건 보편적인 여성의 심리적 특징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남성은 보편적으로 ‘결혼하고 싶은 여성‘이란 기준과 ’하룻밤 즐길 수 있는 여성‘의 기준 차이가 큰 반면, 반대로 여성은 보편적으로 그 기준 차이가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
그 다음은 피해자이다.
루이스 페리는 성혁명의 피해자는 궁극적으로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역사적으로 봤을 때 특히 가난한 여성.
그녀는 ‘SEX WORK IS WORK’ 이라는 표어를 내세운 성매매의 합법화 지지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했다.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의 문화 속에서는 ’성관계가 특별할 것 없는 레저활동’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아무도 ’성행위‘가 보통의 다른 행위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터에서 성관계를 요구 받는 건 명백히 야근을 하는 것과 다르다. 법에서도 역시 성폭력은 죄질이 더 나쁜 것으로 본다. 그저 “동의가 없었기 때문에 나쁘다”라는 진보주의의 논리에 동조하기 어려운 건 우리 모두가 성범죄가 본질적으로 더 나쁜 거란 걸 알기 때문일 거다.
성혁명의 연장선에서 ‘잠재적 생명’과 ‘성’을 분리한 후, ‘성’은 신성함을 잃고 상품화가 된다. 개인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사고 팔 수 있는 게 된 것이다. ’성매매의 합법화‘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건 ‘여성의 권리’ 신장이 아니다. 매춘업이 일반 직종과 다를 바 없게 되면 이를 고려하게 되는 건 가난한 여성이다. 역사 속에서도 그래왔다.
IT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스트리밍 기술은 점점 더 어린 연령의 여성들이 웹캠 앞에 자신의 ‘성‘을 여러 형태로 수익화 해오다가 드디어 ’1인 미디어’ 시대의 구독자들을 위해 오리지널 ‘야동’을 제공할 수 있는 플랫폼ㅇㄹㅍ까지 탄생하게 된다. (불필요한 홍보/트래픽 유입을 방지하기 위해 이름을 거론하지 않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온라인 상에서 관찰된 현상이다. 법적으로 허용하는 범주 안에서라고 하지만 ’옷을 적게 입고‘ 성적매력(?)을 어필하며 자신을 성적대상화 하는 시선을 적극적으로 수익화 하는 방식을 취한 여성들이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까지 이 풍토가 넘어간 건 굉장히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또 다른 피해자는 누구일까?
매리 해링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큰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부정하진 않지만 너무 우울해서 언급되지 않는” 아이들이다.
’자유로운 섹스‘는 피임율이 100%가 아닌 이상,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섹스는 남녀 두 사람의 일이지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의 양육은 단순한 ‘개인사’의 범주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성혁명은 여러 방면에서 아이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안정적인 혼인 관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이 아닌 환경에서 자라날 아이들이 탄생한다. 혼외정사로 태어난 아이들부터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게 되는 아이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효과는 가중된다.
1970년대 약 21%의 아이들이 ‘전통적인 가정’ 밖에서 태어났다.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을 말한다.)
21세기 통계를 보자.
영국의 경우,15세 이상의 청소년의 약 47%가 생물학적 아빠와 같은 가정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2012년의 통계는 47%, 2022년의 통계 44%)
2021년에 진행된 다른 통계를 보면 63%가 결혼한 부부, 14% 동거중인 커플이었다. 23%를 차지 하는 ‘편부모’ 가정 중, 90%가 여성이었다.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20.7%, 다섯 가정 중 한 가정이 엄마 혼자 아이를 기르고 있다.
참고자료: "department for Work and Pensions. 2012"
https://assets.publishing.service.gov.uk/media/5a7ca16340f0b6629523ac77/Children_both_parents_income_FINAL.pdf
https://care.org.uk/news/2022/09/almost-half-of-kids-growing-up-outside-nuclear-family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보자.
2022년 데이터이다. 그중 편부모가정의 80% 어머니 혼자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약 4명 중 한 명이 아빠 없이 자란다. 약 1830만명이다.
참고자료: https://americafirstpolicy.com/issues/issue-brief-fatherlessness-and-its-effects-on-american-society )
미국의 경우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생물학적 아빠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 ‘남자아이’의 통계이다. 17%에서 32%가 되었다. 1200만명의 소년들이 아빠 없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https://ifstudies.org/blog/life-without-father-less-college-less-work-and-more-prison-for-young-men-growing-up-without-their-biological-father. )
아빠 없이 자란 아이들 모두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사회과학은 아빠 없이 자라는 것과 아이들의 더 높은 범죄율, 임신율 등을 연관짓는다.
한 연구에서는 주립 청소년 시설의 70%가 편부모 가정 출신이라는 통계를 제시한다.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여러 차례의 총격사건을 이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도 있다. 56건의 사건 중 10명(18%)만 생물학적 부모님 아래서 자란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82%는 생물학적 부모와 함께 자라지 못하거나 불안정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의 애인(들)과 함께자란 아이들까지.
‘신데렐라 효과’로 알려져 있는 의붓부모의 아동학대 비율이 높은 현상을 알고 있다면 이게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되는 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 구글 검색에서 ‘신데렐라 효과’ 로 검색하니 미용 제품이 나오니 우리나라에선 널리 알려진 게 아닌가보다.)
아빠 없이 자란 가정의 청소년들이 성인기에 더 심각한 우울증을 겪을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그게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0666570/
성에 대한 자유는 ’성을 억압하는 것 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해방하고자 한다.
성행위를 콘텐츠화한 소위 ‘야동’, 포르노에 대해서 역시 그렇다. 성은 특별한 게 아니고 개인이 소비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불필요한 제제이며 공산주의적 통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난 십수년간의 모바일기기와 인터넷의 보급화는 점점 더 어린 아이들을 포르노 중독으로 이끌었고, 그런 아이들이 20대가 되자 서구사회에서는 전대미문의 현상이 포착된다. ’발기부전을 겪는 20대 남성들의 비율증가‘, ‘성관계를 하는 인구 감소’가 종종 언급되는 화제이다.
한편 어린 나이부터 포르노를 시청하며 자란 십대는 자연스럽게 더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하드코어 포르노‘로 넘어가고, 그 결과 아이들이 성인이 되서 현실 속의 연애를 할 때 포르노에서 보던 것이 성행위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지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루이스 페리는 영국의 10대-20대에게 ‘초킹(목조르기)‘이 성관계 속 일반적인 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례들을 소개한다.
(그녀는 이런 피해자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단체인 we can’t consent to this 라는 단체를 공동운영한다. ‘러프 섹스’ 중 사망한 여성들의 소송을 지원하는 단체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영미권의 성에 대한 손쉬운 소비는 더 활발한 ‘성적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중독에 의한 부작용으로 실제 연애관계를 감소시키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자극에 익숙해지며 점점 더 강한 자극이 있어야 같은 쾌감을 느낀다. (야동시청이 일반적인 영화 시청과 다른 영향을 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악영향은 기혼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달리 생각해보면 일본의 개방적인 성문화, 성인물의 보급화가 지금의 ‘연애 못하는 세대’를 만드는데 기여한 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린 나이 때부터 만화와 잡지, 포르노 웹사이트에서 성적대상화된 여성을 봐오던 청소년들이 정상적인(?) 연애가 어려운 이유는 복잡한 심리분석 없이도 예측가능하다.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현실에서 적응이 어려운 건 당연하다.
성혁명은 ‘여성도 남성처럼 자유로운 섹스를 즐길 수 있다‘ 말했다.
성혁명의 두 아이콘, 같은 해 태어난 두 유명인물의 삶을 비교해보자.
<플레이보이>를 만든 휴 헤프너와 마릴린 먼로.
휴 헤프너는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로 대중의 인식 속 성에 대한 억압을 잡지의 형태로 해소시켜 막대한 부와 유명세를 얻는다. 그런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마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을 초판 플레이보이에 게재한 것이 시작이 된다. 그는 사진을 포토그래퍼로부터 구매했지만 정작 마릴린 먼로의 동의도 없었고 돈을 받지도 못한다.
마릴린 먼로는 36세에 overdose로 사망하고, 휴 헤프너는 91세까지 삶을 즐겼다. 휴 헤프너는 사후 마릴린 먼로의 무덤 옆 자리를 자기 자리로 삼는다.
시대가 흘러 한 때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됐던’ ‘성교’라는 단어 대신 외래어가 사용된다. 앞에 ’캐쥬얼‘이란 단어가 붙는다. ‘캐쥬얼 섹스’라니.
모바일 앱의 시대에서 이건 또 다른 시장으로 반영된다.
틴더와 같은 앱은 성혁명이 지향하는 ’캐쥬얼 섹스‘에 최적화 되어 있다.
사용자행태를 보면 소수의 ‘휴 헤프너’ 같은 매력적인 남성이 많은 여성들을 ‘배달음식 시키듯’ 만나고, 대부분의 남성은 ‘매치’를 찾지 못한다.
루이스 페리는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남녀의 성향을 이야기한다.
보편적으로 남성이 성적으로 더 ‘자유’롭고 ‘성적 일탈’에 대해 충동적이고 관대적이다. 여성은 그렇지 않다. 여러 사회실험에서 매력적인 여성이 초면인 남성에게 ‘성적 유혹‘을 했을 때, 남성은 초대에 응했지만, 매력적인 남성이 여성에게 같은 실험을 했을 때 ’응답율‘은 현저히 저조했다고 한다.
루이스 페리는 그저 사회가 그런 조건화를 시켜서가 아니라 진화생물학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한 생물학적 차이이다. ‘캐쥬얼 섹스’라는 상황‘에서 더 위험한 위치에 있는 건 여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보통의 남성은 보통 여성보다 약 2배이상 상체근력이 세다.
‘안전의 기준’을 임신하지 않는 것으로 하향조정하는 게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일까?
쓰면 안될 것 같은 ‘투자’라는 단어를 써보자.
생물학적으로 생식/‘재생산’을 위해 남성/수컷이 기여하는 것과 여성/암컷이 기여하는 것은 다르다. 이건 사회적 조건화가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에 기반한다. 남성은 수량은 많고 크기가 작은 ‘정자’를 제공하고 여성 커다란 하나의 난자를 제공한다. 남성의 생물학적 기여는 거기서 끝나지만 여성은 그 후 수정란이 되고 태아가 되어 자라나는 생명체를 체내에서 길러낸다. 그 아이가 밖에 나온 후에도 짧지 않은 기간동안 수유에 시간을 할애하며 수면부족을 겪어야 하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봐도 위험하다.
기술적으로는 ‘현장피임’ 혹은 ‘사후피임’이 가능하다고 해도 100%를 보장하지 않는다. ‘캐주얼’한 ‘훅업/즉석만남’으로 만난 사람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확률적으로 임신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논리적으로 잠재적 생명을 함께 기를 수 있는 남성을 선택하는 게 ‘생물학적 본능’이자 ‘논리적 결론’이다. 기존의 사회규범은 그걸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임신과 육아를 부부가 함께 하게 해왔다. 임신기간부터 출산 후, 적어도 5년 이상은 ’그전과 다른‘ 상태일 여성을 보호할 의무가 포함되어있었다.
캐쥬얼 섹스는 다르다.
’데이팅 앱 문화’가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그건 그저 누군가를 만날 ‘기회’를 극대화 하는 기술적 수단이 아니다.
물론 ’틴더‘를 사용하는 모든 사용자가 ’성적 기회(opportunity for sex)’를 노리는 게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앱의 사용에는 잠재적인 철학적 선택이 수반된다.
맘에 들면 오른쪽, 맘에 안들면 왼쪽. (그 반대인가?써본적이없어모르겠다)
비단 성의 상품화가 아니더라도 온라인 쇼핑을 할 때 가격과 제품비교를 하는 알고리즘과 다르지 않다. 사용자들은 ‘쇼핑’을 하고 있다.
틴더는 (만나서 뭘 하든) ‘인간 쇼핑’과 다를 바 없다.
유사한 서비스들의 온라인 광고를 관찰해보자.
‘동네 친구’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순수한 텍스트와 달리 이미지는 ‘섹시’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복장과 몸매의 이성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할 때, ‘캐쥬얼 섹스’는 이론적으로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물학적 현실을 부정하는 위험한 제안이다.
밤문화, 성문화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이 성행위가 가볍기 취급되려는 추세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성적착취가 일어나기 쉬운 라이프 패턴이 보편화 된다. 늦은 시간까지 클럽에서 술을 마신다거나, 모르는 사람과의 음주에 대한 경계가 점점 낮아졌다. 임신만 안하면 되는 게 아니다.
여성도 밤 늦게 까지 돌아다니고 술 마실 ‘권리’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런 권리는 전 인구적인 도덕성 통제가 가능할 때나 가능하다. 그걸 중국에서는 도시 모든 곳에 설치된 CCTV와 인공지능을 통해 통제할 수 있겠지만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중요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무방비를 노리는 ‘나쁜 남자’들이 있다.
이건 사회에서 교육을 한다고 쉽게 통제되는 게 아니다.
성혁명의 수혜자가 나쁜 남자라는 건 앞서 말했다.
수감자의 90%가 남성인 것도 성범죄의 다수가 남성이라는 것도 통계학적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엔 나쁜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선호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할 때 남성들이 다 그런 추세를 선호하는 게 아니다. 도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아내와 가정을 꾸려가고 싶어하는 것은 사회적,생물학적 본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트렌드가 또 다른 연쇄효과로 이어진다.
서구사회에서는 메타밈이 되어버린 “좋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Where are all the good men?”
현재 문화트렌드를 관찰하며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팟캐스터, 유튜버들의 의견에 귀기울여봤다.
크리스 윌리암슨(Chris Williamson)은 모델도 해보고 연애 관찰 프로그램에도 출연해보고 클럽의 문지기(?)도 해본 사람이다. 그러다가 자기 안의 공허함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 시작한 여정이 독서와 팟캐스트/유튜브 이다.
그가 포착한 흐름은 이렇다.
사회적 분위기가 성적으로 개방적이 되고 온라인 데이팅이나 ‘캐쥬얼 섹스’가 젊은 층의 문화가 스며들었다. 클럽 같은 술이 있는 곳에서 만남이 이뤄지고 선택받은 ‘잘 나가는’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런게 선망의 대상이 되면 대중 문화의 흐름이 달라진다.
일반 남성들도 여성을 만날 수 있는, 아니, 여성과 잠자리를 할 수 있는 흐름에 따라간다.
‘Getting laid’, 여자를 만나고 섹스를 하는 것은 인류 역사 속 남성의 동기부여였다.
사회규범이 그걸 위해 비지니스적으로 성공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결혼, 아버지의 승낙 등을 권장하며, 그걸 ‘섹스’의 전제조건으로 삼아오던 시절에는 남성들은 그걸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사회규범이 변해 새벽 3시에 클럽에 있어야 섹스를 할 수 있다면 남성들은 그 기준을 맞춰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좋은 남자들 다 어디로 갔나?’ 라는 위의 질문을 한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첫번째 결론은 “좋은 남자들은 모두 기혼자”라는 거다.
그러고보니 미혼시절의 삼심대 초반에 내 머리 속에도 스쳐지나간 적이 있던 생각이다.
“괜찮은 사람들은 다 결혼했네…”
‘괜찮은 사람들만 결혼이라는 특권’. 예쁘고/잘생기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좋은 직장을 가진 성격 좋은 이들이 우선적으로 서로 짝을 찾아 결혼을 하는 거라는 얕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결혼이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준비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서로에게 맞춰가려는 마음가짐이나 안정적인 삶을 위해 성실하게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결혼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책임감에서 사람들의 태도와 성품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도 그런 ‘좋은 남자‘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삶에는 확실히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이 되는 것이라는 굵은 글씨로 적혀있다. //
좋은 남자들이 사라진 이유를 다른 눈으로 살펴보면 여성들의 또 다른 ‘선택’이 눈에 들어온다.
2세대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 ‘미혼 의 커리어 여성’을 유일한 이상적인 목표로 설정하니 그런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결혼과 육아를 경시하는 문화에 동조하게 됐다.
결혼, 출산, 육아는 커리어를 위한 희생이라는 시선이 만연하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살펴보니 그 반대의 시선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성들이 커리어를 위해 출산과 육아를 희생한다는 거다.
루이스 페리는 말한다.
“30대에 싱글인 건 신나고 재미있죠. 그런데 50대 60대, 80대에 싱글인 건 그렇지 않아요”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다.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여성의 삶이 결혼과 출산이후 끝난다는 시선은 편협적이었다.
엄마로서의 삶의 가치를 ‘피해자의 삶‘으로 보는 건 ’미혼의 삶‘에 있는 자유에 대한 선호이다.
첫번째 문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은 계속 되지 않는다. 3세 미만의 아이가 부모를 필요로 하는 의존도와 13세 이상의 아이의 의존도는 차이가 있다.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기른 후 엄마의 ’커리어‘는 이어갈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유명한 커리어 우먼이 모두 다 미혼이 아니다. 지난 글에 이어 이번 글까지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어머니‘이다. 스코트랜드 철학 교수 캐슬린 스톡도 아들이 둘, 전 이코노미스트 저널리스트 헬렌 조이스부터 그 글에 언급된 의사, 임상심리학자, 심리치료사, 케이스워커, 모두 다 아이가 있다.
이번 글의 매리 해링턴 역시 육아에 시간을 할애한 후, 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땄다. (루이스 페리는 좀 더 특이하다 임신 중에 책을 쓰고 작가가 되었다.)
퀴리 부인부터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 오프라 윈프리, 미쉘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모두 미혼에 ‘무자식 상팔자’라서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니다. 엄마가 된 후에 CEO가 된 여성의 삶도 비니지스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동차회사 GM의 CEO 매리 바라(Mary Barra), 펩시(PepsiCo)의 전 CEO 인드라 누이(indra Nooyi), 스팽스(Spanx)새러 블레이클리(Sara Blakely), 야후의 전 CEO Marissa Mayer(매리사 메이어) 등 모두 엄마의 삶을 경험했다.
하지만 ’누리고 있는 자유‘를 잃을 것을 ’겪어보지 않은 기쁨‘보다 선호하는 게 왜 더 보편적인지는 공감이 된다.
두번째 문제는 모든 여성이 ‘커리어’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만족감을 얻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건 굳이 남성, 여성을 가르지 않고 보편적인 목소리이기도 하다.
“일을 좀 덜 하고 아이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낼 껄 …”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후회는 주로 이렇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좀 더 일할 껄“ 이라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며 여성으로서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임상심리학자로서의 많은 커리어우먼들을 상담한 조던 피터슨 교수도 클라이언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주는 예상 외의 기쁨과 만족감에 놀란다는 증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커리어가 주는 기쁨보다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삶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출산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한데, 커리어 발전을 위해 출산을 미루다보니 출산이 ‘보다 수월한’ 나이대를 지나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종종 ‘사실은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여성들’에게는 예상보다 임신이 어렵다는 걸 알고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지인 중에서도 먼저 결혼을 한 친구들을 보니 특별히 피임을 하지 않았는데 4-5년이 되어 자연임신을 경험한 사례도 2건 있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볼 수 있었던 사례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변호사가 된다.
변호사가 된 후에는 파트너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중 일부는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싶어한다.
하지만 자신이 난임이라는 걸 알게 된다.
거금을 들여 난임클리닉에 비용을 지불하고 50%미만의 확률의 체외수정을 통한 임신을 진행한다.
물론 의학의 발전이 ‘노산’의 위험을 많이 낮췄고, 내 주변에는 35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들이 초산을 안전하게 경험하는 걸 봐오기도 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가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통계가 있다.
30세가 넘어가면 자연임신의 가능성이 저하한다는 통계이다. 30세 미만은 1년 내 임신할 가능성이 85%, 30세엔 75%, 35세엔 66%, 40세가 되면 44%가 된다. 유산확율은 30세 이하의 16%에서 40세에 27%로 증가한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7721003/#:~:text=When%20a%20woman%20is%20younger,on%20the%20ovary%20and%20eggs.
*그런 시도 중 어떤 여성들은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여성들은 그런 경제적 선택지가 없어 아이를 갖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모성‘의 본능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 삶에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는 분석도 있었다. 아이에게 가야할 ’모성애‘가 직장에서 발현된다는 거다.
**어떤 이들은 현 학계, 교육계를 여성이 주류가 되면서 학생들을 더 ’보호‘하려는 방향에서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심리치료가 보편화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현재 미국문화의 예민한 Gen Z를 만들었다는 거다.
매리 해링턴과 루이스 페리는 말한다.
여성의 삶은 미혼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처녀의 삶 Maiden, 어머니의 삶 Mother, 그 후의 삶 Matriarch (모계사회의 그 단어이다)
(그렇게 ‘Maiden Mother Matriarch’가 루이스 페리의 팟캐스트/유튜브 채널의 이름이 되었다. )
하지만 현대 페미니즘은 처녀/미혼여성의 삶만 눈부시고 찬란한 것처럼 말하기에 전반적인 여성의 권를 대변하는 것에 실패한다고 한다.
한편 미국의 유명한 IT회사들 중 일부는 페이스북과 같이 직원 중 대리모 비용을 지원하기도 한다. ’커리어‘를 ‘모성motherhood’보다 높게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의 또 다른 예이자 비지니스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성혁명의 글에 갑자기 왜 대리모(surrogacy)가 언급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성혁명은 ‘성sex’과 관련된 것이고 생물학적으로 성은 생식과 연결되어 있다. 생식이란 거북한 단어를 풀면 생명이란 단어가 된다. 성혁명은 새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함으로서 낙태 뿐만 전통적인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
성행위와 임신가능성의 분리.
이게 보편화 되면서 개념적으로 임신과 양육을 구분하는 것도 가능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기를 내 몸에서 키운다는 것 역시 ‘전통적인 개념’이며 경제적 여력이 있다면 다른 선택지를 찾을 수 있게 된 거다. 불임이라는 안타까운 상황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다른 사유가 원인인 케이스도 많다.
유전적으로 내 아기는 갖고 싶지만 내 몸에서 기르고 싶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
개인의 자유가 가장 중요한 만큼 그 자유를 사용해서 ‘커리어’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본의 아니게 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그렇게 선택적으로 ‘고령산모’가 되어 ‘노산’을 하는 선택지를 마주하게 된 여성들은 ‘임신’을 ‘외주화‘하는 산업에 눈을 돌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캘리포니아 주의 대리모산업과 우크라이나 대리모 ’농장‘ 혹은 ‘아기 농장(baby farm)’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의 대리모가 너무 비싸니 ‘싸고 예쁜’ 선택지로 우크라이나가 연결된 산업이다.
‘아이를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하는 가정을 위해’ 라는 인도주의적 포장을 걷어내면 실제 피해자가 눈에 들어온다.
상상해보자.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성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임신과 출산’이 자신에게 경제적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선택지를 마주한다. 그렇게 자기 몸 속에서 키운 아이를 낳아 타인에게 준다. 직접적인 금전거래가 이뤄지는 것이 불법인 곳과 아닌 곳이 갈린다.
대부분의 계약서에는 아이를 ‘양도’하지 않으면 돈을 돌려줘야한다는 조항이 비용을 지불하는 ‘신청자’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이런 산업을 보고 루이스 페리는 ‘본질적으로는 인신매매’라고 말한다.
피해자는 여성이다.
가난한 여성.
아이를 낳아 제공하는 댓가로 돈을 받는다.
최근 추세로는 대리모의 난자를 사용하는 대신 ‘고객/의뢰인‘ 부부의 수정란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대리모의 합병 리스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연구할 수는 없지만 엄마의 몸 속에서부터 익숙해진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길러져야 하는 영아의 트라우마 역시 또 다른 피해로 볼 수 있다.
성혁명에 가장 큰 기술을 미친 것은 경구피임약이다.
섹스와 임신을 분리하는데 여성이 주
한편 경구피임약은 사회적인 영향을 미친 것만이 아니다.
호르몬을 사용하는 약인만큼 생물학적으로도 여성의 신체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매리 해링턴은 한 인터뷰에서 경구피임약에 대해 이야기 했다.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미쳤고 살찌게 만들었고 성관계시 통증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복용을 멈췄다고.
성혁명에 있어 경구피임약은 필수적인 존재였다.
여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인터뷰에서 언급된 또 다른 책을 찾아보고 저자의 인터뷰를 여러 개 들어봤다.
새러 힐(Sarah Hill) 박사의 책 ‘How The Pill Changes Everything: Your Brain on Birth Control”에서는 경구피임약을 사용하는 여성에 대한 여러 실험과 연구결과를 이야기 한다.
그녀는 자신의 조사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러 힐 박사는 여느 미국의 십대들처럼 비교적 쉽게 경구피임약을 처방 받아 복용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시기부터 아이 둘의 엄마가 될 때까지 아주 오랜 기간동안 사용해왔는데 35세에 복용을 중지하면서 겪은 신체적 정서적 변화가 너무 커서 연구 결과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는 쉽게 지치고 학업이나 인간관계의 부담감을 많이 느껴왔는데 그게 자신의 성격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경구피임약 복용을 중지한지 3개월이 지난 후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기분과 삶의 태도를 발견했다. 에너지가 넘치고 스트레스 받아왔던 일들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인간관계에서 느껴온 피로도 사라졌으며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하고 십대 때 잠시 다니다가 그만 둔 ‘헬스장’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심리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그녀는 그 후 경구피임약에 사용된 호르몬 기반 약제들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한다.
과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경구피임약에 사용되는 호르몬들이 예상 외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구피임약의 장기복용은 코르티솔-바인딩 글로불린(CBG)를 증가시켜서 코르티솔의 전체적 수치를 높일 수 있다. 이게 꼭 ‘free cortisol’의 수치를 증가시킨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체내 코르티솔 수치의 총체적 균형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잠재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과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친다.
**
육아 공부를 하면서 처음 ‘코르티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애들이 잘 때가 되면 이 수치가 올라가고 짜증을 낸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방치하면 짜증을 넘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흥분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었던 것 같은데. (베이비사이언스 채널)
원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애들이 평소에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그냥 숨 쉬고 자고 걷고 하며 소모하는 에너지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거다. 매리 해링턴이 말한 ’살찌게 하는 효과‘인가보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내용일까 검색해보니 널리 알려진 내용은 아닌가보다. (제약회사들이 싫어할만한 내용이라서일까? 음모론적 상상일까?)
정제된 신문기사의 언어를 빌려서 소개하고 싶어 본문 일부와 링크를 남긴다.
(2020년 메디컬타임즈 기사 중)
연구진은 "이번 연구는 일반적인 부작용을 경험하지 않는 여성들도 행동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며 "옥시토신의 지속적인 증가는 정상적인 조건에서 옥시토신이 더 이상 분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신체에 의도적인 호르몬이 투여될 경우 과다 수치로 인해 신체내 호르몬 생산 기능이 저하된다. 옥시토신 역시 지속적으로 고농도를 유지할 경우 정상 기전으로 체내 생성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
연구진은 "이는 한편 피임 약을 사용하는 일부 여성들에게서 친밀감, 애착, 사랑과 같은 감정이 바뀌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있다"며 "옥시토신 수준의 아주 작은 변화도 감정 변화에 따른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https://www.medicaltimes.com/Main/News/NewsView.html?ID=1133817
(2023년 기사)
131명의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혈액검사를 통해 코르티솔 합성과 분비를 촉진하는 스트레스 호르몬 ACTH(adrenocorticotropic hormone) 수치를 비교했을 때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는 여성은 15분간 사교모임이나 예배, 합창, 보드 게임 등 그룹 활동을 한 후 ACTH 수치가 감소했지만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은 그룹 활동을 한 후 ACTH 수치가 감소하지 않았다.
경구 피임약이 스트레스 반응에 영향을 주는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구 피임약이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의 분비를 억제할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된 바 있으며 프로게스테론이 알로프레나놀론(allopregnanolone)이라고 불리는 신경스테로이드로 전환되기 때문에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은 스트레스 반응에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www.whosaeng.com/145335 )
이런 연구결과들이 새러 힐 박사의 경험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피로나 어려운 과제를 마주했을 때 겪게 되던 부담감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조사들을 거쳐 책을 냈다는 이야기이다.
정신건강과 심리치료에 대한 글을 쓸 때도 스쳐지나가듯 본 내용 중에 청소년이 사용하는 피임약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었는데, 여기서 또 다른 연결고리를 찾게 된 것 같다.
기분을 ”좋게하는” 옥시토신에 영향을 미치고, 기분은 “나쁘게 하는” 코르티솔에 영향을 미친다? 조증부터 우울증까지 다 아우를 수 있겠다. 물론 개인차가 있다고 한다.
원래 성격과 기질 차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만약 경구피임약을 복용 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인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가 MBTI가 아니라 피임약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장기복용을 하고 있다면.
그 외 안드로겐(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의 영향을 미쳐서 여드름이나 남성패턴의 발모, 성욕감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또 갑상선 호르몬에 영향을 미쳐서 갑상선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그 외에 여러 여러 흥미로운 사회실험 결과도 언급된다.
‘스트리퍼’들이 배란기간동안 받은 팁이 훨씬 높았다는 내용도 인간이 암암리에 얼마나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사례로 사용되었다. (스트리퍼를 하는 여성과 그런 곳에 갈만한 남성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라 보편적으로 적용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 )
경구피임약 복용 중에 여성이 선호하는 남성상이 달랐다.
복용하지 않는 기간 중에는 좀 더 보편적인 남성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었다. (근육질, 넓은 턱뼈 등 ) 복용 중에는 그런 ‘성적매력’ 대신 직업, 경제력등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호르몬 복용 중에 배우자를 선택한 사람의 성적 만족도가 낮은 반면, 경제력이나 친절함 등에서 만족도가 높았다는 실험결과도 언급된다.
호르몬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작동(?)하는 기본적인 시스템 중 하나이다.
앞서 언급된 기분과 생식과 관련된 기능 외에도 지방분포도, 근육량에도 작용을 한다.
성조숙증으로 호르몬치료를 할 때도 2~5년의 제한을 두고 노년기의 성호르몬 복용도 장기복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가 있다.
그렇다고 인간을 ‘호르몬의 노예’로 보고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특히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과거에 생리주기에 따라 심경에 영향을 미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적이기 때문에 중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으면 안된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더 민감하다.
Q. 생리주기 때문에 여성이 더 불안정적인가?
새러 힐 박사는 여기에 흥미로운 반론을 던진다.
여성은 오히려 주기적이기 때문에 패턴을 파악하고 예상할 수 있지만 남성의 호르몬을 훨씬 들쑥날쑥 하다는 거다. 하루 어떤 시간대에 따라*, 근처에 ‘섹시한 여자’가 있는지, 배우자나 애인이 있는지, 자신이 응원하는 스포츠팀/정치인의 승패 여부, 심지어 무기가 근처에 있는 지도 남성호르몬 수치에 영향을 미친단다. 호르몬이 미치는 영향 아래 있는 건 남녀 모두 마찬가지란 이야기이다.
*예전에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 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책을 읽다가 발견한 사실이기도 하다. 아침 공복상태의 남성호르몬 레벨이 높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또 근력운동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Q. 왜 남성이 복용하는 피임약은 없나요?
새러 힐 박사는 (여성을 위하는)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현재의 수준이 피임이라는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인식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피임약의 부작용을 남성이 아닌 여성이 지게 되는 점이 첫번째 문제이다. 두번째는 여성의 ‘안전한 피임’에 대해 이미 모든 걸 이뤄 냈다는 섣부른 안도감 때문에 추가적인 혁신과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남성이 복용하는 약이 없는 이유는 남성에게는 ‘상대를 임신시키는 것’과 ‘약의 부작용’이 선택지이고, 여성에게는 ‘(내가)임신하는 것과’ 약의 부작용이기 때문에 여성이 약을 복용하게 된다는 거다. 이게 사업적으로 남성의 아이템으로 히트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성이 잃을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여성이 복용하게 되는 거라는 안타까운 인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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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혁명의 일환으로 섹스와 임신을 분리시키려는 노력의 일환. 인간은 호르몬을 사용하여 여성의 뇌를 속이려는 시도를 했다. 뇌에게 이미 배란을 했다고 알리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배란을 통제했다. 배란은 성공적으로 통제했지만 ‘성격’과 행동패턴에 영향을 줬다.
새러 힐 박사는 경구피임약이 미치는 여러 영향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경구피임약을 본질적으로 나쁜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인 것을 인정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 중 하나인 배우자 선정 (혹은 애인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포함한다.
문제는 그런 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거다. 그녀는 사람들이 이 약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알고 활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어쩌면 자신이 (MBTI)의 극”I”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우울증 성향이 있는 사람 중, 장기적인으로 피임약복용을 해온 사람이 있다면 3-4개월 복용을 중지하고 변화를 지켜보는 실험을 하는 것도 추천해보고 싶다.
생물학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이건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자하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생식과 관련된 건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과 기능과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은 어찌보면 생물학적 차이를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행위와 임신가능성을 분리시킨 건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젠더이데올로기가 21세기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최소화 시키는 사회적 노력을 의학적으로 실현했다면 20세기의 피임경구약이 그 첫 단추를 끼운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매리 해링턴은 그렇게 경구피임약과 함께 여성은 ‘사이보그’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을 ‘고기덩어리 레고 (meat lego)’처럼 이런 저런 부위들을 때어네고 새로 붙이려한다고 경고한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관점이다.
생물학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려는 노력이 과학적 초월이라고 생각하기는 쉽다. 주로 트랜스휴머니즘은 대외적으로 노화와 질병에 대한 극복을 이야기한다. ‘호모데우스’의 유발 하라리 처럼.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사회에서 가깝게 마주하고 있는 ‘트랜스젠더리즘’의 관점과 ‘성혁명’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 생명의 조건을 해체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이 여성일 필요가 없고 남성이 남성이 필요가 없다는 건 ‘궁극의 자유’로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특성이 사라진 선택가능한 ‘무성의 인간’이 디폴트가 된다.
하지만 역사 속 한 번도 인간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그냥 ‘인간’으로 구별된 사례가 없다. 모든 샘플은 ‘남성’ 혹은 ‘여성’이었다.남성과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인간’은 개념이고 구체적 실체가 없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주의의 2세대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해방주의(bio-libertarianism)인 것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 (혹은 속성)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이며 점점 ‘종교적인‘ 요소를 갖게 되고 있다. 이건 트랜스젠더리즘 (혹은 트랜드젠더 이데올로기)을 살펴봤을 때도 포착되었던 부분이다.
요약
성혁명이 미친 영향이 워낙 다양해서 끊임 없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요약을 해보자.
매리 해링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2세대 페미니즘의 모든 노력은 결국 ‘전통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전쟁 (War on Relationships)’라고 한다. 엄마와 아이, 아내와 남편,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 여성과 남성 등 여러 관계에 대한 전쟁.
‘엄마’가 되는 것과 ‘커리어우먼’이 되는 것이 대립되는 개념이 되었으니 모성에 대한 전쟁이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유’를 동등한 선택권 상에 두었으니 태아에 대한 전쟁이다.
결혼을 두 사람의 ‘상호보완의 성격’의 ‘연합’, 인격적 성장의 기회이자 가족을 만드는 근간으로 보면 그건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결혼은 여성의 손해가 보장된 ‘적대적 합병(hostile M&A)’로 보는 게 당연하다.
인류 문명의 존속에 기본이 되고 역사 기록 이전부터 존재해온 최초의 제도가 결혼제도이다.
‘기존 사회통념’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혁명의 궁극적 목표대상이 결혼이 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 모른다. 결혼이 가족을 만들고 그런 가족이 사회의 최소 단위로서 지금까지 현대사회가 이루어졌다.
그럼 현대 문명 속에 존속되어온 성과 관련된 모든 사회규범을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혁명이 성공한 ‘성혁명적 유토피아’는 과연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작은 것들이 미치는 영향의 연쇄반응은 예상 밖으로 거대하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당연한 ‘순리’ 였던 것, 혹은 종교적으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여 성스럽게 취급했던 것들을 20세기-21세기 현대인들이 해체하여 재구성하기 시작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성圣스럽지 않은 성性‘은 상품화가 되었다.
생명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그 ‘전통적인’ 행위는 ’콘텐츠‘가 되어 책임감 있는 성인들의 다면적인 행위가 되는 것 대신 ’시청’되고 있다.
캐쥬얼한 섹스는 영국과 미국 사회에서 의외로 성적으로 ‘active’한 인구를 줄였다는 통계가 있었다. ‘캐쥬얼한 섹스’에 참여하는 사람의 비율은 늘었지만, 안정적인 연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섹스의 절대수량을 줄였다. 결국 섹스를 가장 많이 즐기고 있는 건 결혼한 부부라는 통계는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지만 진보주의적 시선으로 본다면 아이러니가 될 수 있겠다.
어느 나라에서는 비타민 먹듯 피부 미용을 위해 먹기도 하는 경구피임약은 십대의 정신건강부터 여성의 파트너 선택에도 무의식적으로나 호르몬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자연으로 흘러들어간 공장발 호르몬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하기도 한다.
자유와 선택이 제일 중요한 사회에서 성에 관한 것 역시‘변태적인 것이나 엽기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게 ’취향’이 되었다. 쌍방 동의만 있으면 나쁠 게 없다는 주장을 하며.
그리고 문화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인구 중 가장 유행에 민감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참여했다. 십대, 이십대 청소년들이다.
루이스 페리를 통해 들은 영국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야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보며 자라온 소년 소녀들이 청년이 되었다. ’일반적인 섹스‘는 ’fun’하지 않고 ‘exciting’하지 않으니 10여년 전에는 변태성향이라고 분류되던 BSDM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캐쥬얼 섹스 역시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여성은 남성이 그걸 당연히 원할 거라는 오해를 하며 수용하려 하게 되었고 남성 역시 야동에서 보던 것이 여성이 원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가장 친밀해야 할 순간이 모방으로 뒤덮여진다.
법정에선 성행위 중에 여성이 사망한 사건들에서 남성들이 ‘여성이 동의한 거친 섹스’ 중 발생한 일이라는 변호를 하게 된다. (그런 걸 두고 볼 수 없어 루이스 페리가 만든 단체가 We can’t consent to this 이다)
이르면 유치원 아이들에게 성은 사회적이고 선택적인 것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그런 개념을 주입 교육 받은 영미권 유럽권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다. 그중 일부는 동물 식용은 잔인하고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채식주의를 옹호하며 ‘지구살리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그런데 태아의 생명은 임신 중인 여성의 몸에 부속하는 기관이나 기생충 정도로 취급하며 ‘여성의 몸’에 대한 선택권은 자기에게 있다며 낙태할 권리에 Pro-Choice라는 이름을 붙여 옹호한다.
그 와중에 글로벌 기후 위기에 굉장히 민감하여 ‘기후 불안증’이라는 걸 가지고 상담 받는 학생들이 있다니 어디서 한숨을 쉬고 어디서 눈물이 나야할지 혼란스럽다. 우리 별 지구에 기후위기를 가져오는 인간은 암적인 존재이고 인구의 증가가 악이라는 결론을 내려 자발적 ‘한정판’이 되고자 하는 선택을 숭고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늘었다.
사람들이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대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인구증감추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연하다.
인류 역사 속의 생명을 만드는 행위로부터 생명을 제외 시켰으니, 생명은 없고 행위만 남았다.
성이 가벼워지면 생명도 가벼워진다.
인구감소위기를 단순히 경제학적, 사회학적 시선으로만 봐서는 절대로 해결 할 수 없을 문제인 이유이다.
아이를 키우는데 돈이 많이 드는데 돈이 많이 없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돈을 많이 안 들이고 키우는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여러 복잡한 이유들이 혼재되어 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스탠다드와 목표의 문제이기도 하다.
드러나지 않은 ’라이프 패턴‘을 유지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도 작용하고 있다.
너무 비싼 집값
인구감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걸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대두되는 건 집값이다.
아이를 키우려면 집이 있어야 하는데 집값이 너무 비싸다?
집값 비싼 것 맞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 하게도 집값상승에 기여하고 있는게 정부정책이나 대출제도 외에도 ’맞벌이’라는 소득증가가 있었다.
맞벌이라는 형태는 한 가정에서 한 사람만 일해도 유지가 되던 가계경제가 두 사람이 모두 일해야 되는 경제적/사회적 스탠다드를 만든다. 그게 시세가 된다.
그런데 ‘맞벌이가 권리’라는 의식의 저변에는 ‘여성의 일할 권리’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는 게 있다. 밖에서 하는 경제활동만 ‘의미 있는 일’이라는 성차별적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것과 일을 해야만 하는 ‘빡빡한 삶’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게 유일한 여권신장인 것처럼 해석하며. 그렇게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의 의무‘가 ”권리“처럼 홍보된다.
물론 일부 ‘멋진 커리어’의 ‘멋진 커리어우먼’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그냥 일이다.
GDP로 국가의 위용을 비교하는 시대에서 정부가 볼 때 노동인구가 증가하는 건 좋은 소식이다. 부모가 모두 일 ‘해야하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문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권장하고 싶은 것이다.
시대적으로 이미 의료/식품업계에서 분유의 미화로 모유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칼로리를 위해 팜유가 들어있다는 걸 신경쓰지 않는 사람도 많이 봤다.
유축기 사용이 마치 필수인 것처럼 포장된다. 모유수유산모와 영아의 유대관계 발달이나 영아의 정서적 안정의 측면, 두뇌 발달은 ‘오버하는 부모들이나‘ 신경쓰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 그런데 태어난 아기들은 아무데나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시작된 게 어린이집이다.
실제로 어린이집/유치원의 시작점은 산업혁명의 시대에 위치한다. 19세기의 산업혁명 후, 여성들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프랑스, 영국 등에서 시작되었다. 데이케어 센터(Daycare Center)는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들의 생산활동을 위해 정부차원에서 고안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현대문화에서 쉽게 문제시 할 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말도 못하는 아이들의 어린이집 ’입소‘, 가끔 뉴스에 나오는 어린이집 학대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다른 학대사건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영유아의 두뇌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간대의 가치를 ’2-3년치 연봉의 경제적 가치’와 비교하는 근시안적 선택을 하는 게 보편적이 되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아동의 권리는 버스 밑으로 던져졌다”
미국 뉴욕의 심리분석가이자 부모코치 (parenting coach) 에리카 코미사 (Erika Komisar)같은 심리학자들이 영유아가 보이는 공격적 성향, 공격적 행동의 원인을 너무 어린 나이에 데이케어센터(어린이집)에 보내지는 것과 연관짓는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아동의 권리가 버려진다는 주장을 한다.
평생을 좌우하는 뿌리가 되는 신체발달이 이뤄지는 시기이다. 눈에 보이는 키만 크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가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두뇌발달, 정서발달이 이뤄지는 시기다.
ADHD 진단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너무 어린나이에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지며 겪게 되는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이라는 해석을 하는 심리학자들도 있다.
아이를 맡는 기관에서는 부모님이 떠나면 괜찮아지고 잘 보낸다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실제 케이스를 담당하는 심리분석가들이 부모의 의뢰를 받아 관찰을 해보면 그렇지 않은 걸 발견하게 되는 건 흔하다고 한다.
돌 이전의 아이가 엄마와 떨어질 때의 반응을 보면 엄청난 슬픔과 놀람, 불안이 공존한다. 그리고 더 자세히 살펴보면 분노가 보이기도 한다. 이런 반응은 만3세 전후의 아이들에게도 보인다. 그저 관찰로 추측하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영유아의 타액을 분석해서 수치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거라고 한다.
잘 알려진 ‘Fight or Flight 반응‘이다. 싸우거나 회피하거나.
싸움의 반응이 나타나는 건 아이의 공격성이겠고, 회피의 반응이 집중력 결핍이겠다.
성인에게는 코티솔 자체가 나쁜 게 아니지만 ’데이케어센터‘에 맡겨진 영아에게는 코티솔 레벨이 그렇게 높은 건 이상하다는 거다.
사랑 받아야할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는 그 순간의 반복이 아이가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게 하는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도 한다. 현재 미국 청년들이 집단으로 ’나르시즘‘/’나르시스트‘적 행동을 보이는 이유가 어린 시절 사랑이 필요했던 때에 곁에 아무도 없었어서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운 의견이겠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다.
가보 마테 박사가 이야기 하는 영유아 시절의 트라우마가 미치는 영향과 고든 뉴펠드 박사가 말하는 애착이론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에리카 코미사 박사는 좀 더 직설적으로 ‘데이케어센터’가 ‘the least good option’ 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만3세 미만의 아이를 ’데이케어센터‘(한국의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을 보내는 걸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6개월 이후 부터 만2세 미만의 아이들이 맡겨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에리카 코미사 박사는 만 3세까지 두뇌발달의 85%가 일어나는 중요한 시기에 미치는 영향이 20년 후에도 계속 된다고 주장한다. 그게 현재 미국 청소년의 1/5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과 무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산업혁명과 물질주의 위에 페미니즘이 ‘의미 있는 일‘, ‘커리어’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해서 여성들이 ‘엄마의 역할’의 가치를 낮게 보게 했다고 말한다.
이런 부모가 기른 아이들이 부모가 될 나이,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단다.
그게 놀라운 걸까?
그들이 아이였을 때,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커리어에 짐이 된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가장 연약할 때 부모가 곁에 없었다면?
학업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아이들이 나이가 자라 독립적이어야 할 때는 심하게 간섭한다면?
에리카 코미사 박사는 미국의 육아 풍토를 이렇게 요약했다.
너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있는 존재인 어른 취급하고, 독립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십대 아이들은 어린애처럼 대한다고.
남녀평등에서 시작된 맞벌이에 대한 이야기가 부동산과 어린이집에 보내지는 유아들, 그리고 청소년의 정신건강까지 이어졌다.
맞벌이, ‘더블인컴(double-income)’ 이 경제의 스탠다드가 되면 주류가 된 맞벌이가 물가를 정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갖는다. 집값이 올라도 물가가 올라도 소득이 많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유지가 된다. 이때 외벌이 가정은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된다.
1950년대의 미국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 때는 외벌이로 가정을 지지할 수 있었는데 맞벌이가 점점 늘어난 성혁명 이후의 1960년대 이후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고 거주해야할 ‘집’은 사고팔아야 할 투자가치가 있는 ‘부동산’이 되었다. 자산증식이 목표가 된 사람들은 법의 구멍을 파고들어 ‘빌라왕’이 되고 ‘전세사기’를 치며 가정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가족들의 목을 조른다. ‘내 집’, 아니, ‘우리 아파트’가 비싸져야 내가 부자가 되는 것 같으니 주민들이 담합하여 가격을 상승시키는경우도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경제 속 이 역시 선택과 자유이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 안에는 사람들의 욕심이 있지만 정부는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할 수 있을까?
‘너무 욕심부리지 마세요’라고 공익광고를 하면 사람들이 다 무소유의 철학을 갖게 될까?
다른 단어를 통해 ’인구감소위기‘를 바라보자.
짧은 표현으로 요약하면 그건 생명에 대한 경시이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Polybius/ 200-118 bc)는 그리스의 인구감소의 원인을 영아살해라고 분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로마시대를 바라본 미국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The Rise of Christianity (한국어 역본: 기독교의 발흥)>에서도 로마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성적으로 자유로운 문화였던 로마제국. 사생아의 임신 증가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사생아가 아니더라도 남아선호사상은 비단 유교문화에서만 존재한 게 아니라 고대 유럽에도 존재했다. 여아라는 이유로도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했다.
피임기술은 원시적이었다. 그렇게 지금 의술의 기준으로 보면 경악할 도구들을 사용해 낙태가 이뤄졌다. 그리고 그건 태아 뿐만 아니라 산모의 생명에도 위험한 경우가 많았다.
그 역시 폴리비오수와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문화행태가 인구감소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한다
신생아의 출산 없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여성없이는 당연히 불가능한 임신과 출산.
그런데 사회문화가 여아가 남아보다 가치가 없다고 판단을 했다.
우리는 뒤늦게 이미 이 가치관 자체가 장기적으로 사회를 유지시키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남녀평등이란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뤄냈지만, 새 생명과 관련된 모성에 대해서는 보호와 해체를 동시에 진행한 건 아닐까?
성혁명은 선택의 자유를 최선의 가치로 삼았다.
결혼도 임신도 출산도 모두 선택적인 자유다.
그리고 반백년을 넘는동안 선택이 쌓여왔다.
그런데 인과관계는 아무나 벗어날 수 있지 않다.
종교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을 해보자.
절대자인 신 역시 인과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만든 물리적 법칙과 도덕적 규칙을 시도때도 없이 무너뜨리지 않을 거란 이야기이다. 기적이 기적인 것은 자주 발생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신의 의도와 개입은 특수한 것이며 큰 흐름 속에서 인과관계를 벗어나지 않게 조절된다는 거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을 끼친 종교인 기독교의 신은 생명에 대해 뭐라 말했나 살펴봤다.
기독교인 부모님을 둔 독자라면 한 번쯤은 결혼을 권유 받으며 들어봤을 구절이다.
신은 성경의 창세기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명령을 한다.
"Be Fruitful and multiply. Fill the earth" (창세기 9:1)
인구감소라는 게 인류의 위기라고 떠드는 지금 이 시대에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구절이 되었다.
아, 혹시 퇴직연금에 가입 되어 있는가?
퇴직연금은 인구가 증가추세일 때만 유효한 노후보장 수단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지 않으면 사실 경제적 ‘평안’도 담보하기 어려운 게 경제적 현실이다.
인구감소추세가 계속 된다면 퇴직연금은 ‘폰지사기’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난 미국 사회를 동경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나 반권위적인 태도,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전에도 총기관련 규정이나 의료보험제도 등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점점 더 양극화 되어가는 미국, 교육시스템 전반적으로 스며든 혼란스러운 철학을 지켜보며 미국이그저 치안이나 의료시스템이 안전하지 않은 나라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안전한’ 나라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만 해도 당연히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관련 방송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며 한국의 치안이나 시민의식, 위생환경 등 미국이나 다른 유럽국가 보다 나은 부분들이 많이 보였다.
직장인이 되어 만난 프랑스친구들을 통해 들은 프랑스는 소매치기부터 강간까지 밤이 안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야간에 전철역에서 그런 위험한 경험을 직접한 친구들도 있었다. 역사, 예술, 낭만의 유럽은 범죄선진국의 인상을 주었다.
의료체계도 현 정부와의 갈등 이전의 대한민국 의료체계는 그래도 안정적이었던 인상이 있었다. 미국, 중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는 오래 기다려야 의사를 만날 수 있는 게 당연시 되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국민의료보험 덕분에 의료비용도 저렴하다.
그런데 유독 성문화와 관련된 ‘자유연애’, ‘섹스’, ‘혼전동거’ 등의 토론에서 서구문화가 선진국인 것처럼 말하는 게 의아했다. 절도를 가지고 시민의식를 평가한다면 한국이 영미권, 유럽보다 더 ‘도덕적인’ 선진국으로 보이는데.
미국의 한 통계를 보면 2017년에서 2020년까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대답한 비율을 2019년말 15%대에서 2020년 5월 35%를 상회하게 된다.
북미의 ‘생물학적 현실을 부정하는 인식의 쇠퇴’(트랜스젠더리즘)가 관찰된 후로는 오히려 미국 유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가서 살고 싶지도 않고 아이를 조기 유학보내고 싶지 않다. 남자를 남자로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지 못하고 매번 ‘선호하는 대명사가 어떻게 되세요?’로 시작해야 하는 사회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굳이 큰 비용을 들여 보내는 투자가 될까 싶은 거다.
한국 부모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허탈할까?
열심히 키워서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내놓고나니 자기 딸이 ‘아들’이 되어서 돌아온다거나, 딸이 아들이 되어 돌아온다거나. 물론 다소 과장된 비약적인 상상 속의 해프닝이다. 하지만 미국인의 현실 속에서는 드물지 않다고 한다. 아이를 대학에 보내놨더니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주입식 교육은 대한민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국은 중국의 주입이 있고, 미국은 미국의 주입이 있다. 결국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개인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3년 전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 오랜 친구가정이 같이 가자고 권유했을 때, 캐나다의 C-16 법안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던 터라 동기부여가 덜 되었다. 그 친구의 유학결정은 한국의 경쟁적인 교육시스템, 사회에서 아이를 기르고 싶지 않다는 배경이 있었다. 그런 경쟁을 거부하는 방법은 꼭 이민만이 아니란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아이들이 성인이 된 10년 후에는 온라인 교육과 학위시스템이 또 어떤 혁명적 변화를 가지고 올 지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Coursera, EDX나 칸 아카데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인증 교육 등이 어떻게 교육시장을 바꿀까.
성문화는 한 문명의 안정성과 발전가능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성문화는 인구증감추세와 직결적인 영향을 미친다.
비지니스계에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시장(new market)’에 대한 검토는 인구와 관련된 통계가 사용되었다. 연령대의 분포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많은 공장들이 이전한 것은 그저 중국의 정치나 인건비 상승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의 인구 연령 구성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15세에서 64세의 비율이 69.3%이다. 젊은 인구는 노동력과 구매력과 연관된다.
다니엘 라핀이라는 유대인 랍비의 비유를 사용하자면 이렇다.
한 목수가 어떤 사업을 할 지 고민 중이다.
선택지가 두 개가 있다.
관을 만드는 사업과 아기 침대를 만드는 사업.
어떤 선택지가 더 현명한 선택일까?
랍비는 아기침대를 만들기로 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관을 만드는 사업은 한 사람의 생애와 함께 끝난다.
아기 침대를 만드는 사업은 잠재력 다르다.
아기 침대만 사업아이템이 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자라면서 필요하게 되는 수많은 다른 아이템들이 이어질 수 있다.
비지니스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건 한 생명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좋은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환경론자들의 분류 중에 ‘light green’, ‘dark green’이라는 구분이 있다.
Dark Green은 미래의 지구가 마주해야할 기후 위기에 대해 암울해 하며 인간의 존재를 어두운 시선으로 본다. 인구감소는 지구에게 득이라고 해석한다.
Light Green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인구증가라고 생각한다. 지금같은 추세로 볼 때 개인 단위의 절약이나 환경보호가 대세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기 때문에, 획기적인 기술발전을 이뤄낼 또 다른 ’위인‘의 탄생을 기원하는 면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환경보호 기술의 ’일론 머스크‘가 나타나길 기대하며.
이런 성혁명의 부정적인 효과와 사회문제에 대해 어떤 전망이 있을까?
성혁명이 미친 영향에 대해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꽤나 암울해졌을 수 있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사필규정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루이스 페리와 매리 해링턴 같은 저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비단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만 그들을 지지 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지칭하는 이들 중에서도 일부 현재의 ‘진보주의’가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며 ‘탈현실’한 것에서 의문을 품기 시작하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십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성혁명을 지지해온 페미니스트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된 영국의 두 작가가 그렇다. ‘극좌(radical left)’성향의 십,이십대를 보냈지만 성인이 되며 현실에 대해 더 알아가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진보주의를 비평하며 지금까지의 성혁명에 카운터펀치를 날리고자 한다. 단지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며 종교적 어젠다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 사회가 무너지고, 서구사회가 쌓아온 문명이 붕괴될 것임을 자각한 위기감 때문이기도 하다.
루이스 페리는 불가지론자라고 스스로를 카테고리화한다.
그런 그녀는 서구사회의 가치관의 기초가 기독교라고 이야기하며 역사학자 톰 홀랜드를 언급했다.
책: Dominion 번역본 <도미니언> (링크)
그리고 현대사회의 성혁명은 사실 진보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간 거라는 지적을 했다.
종교나 철학적으로 다원주의적이며 성적으로는 개방적인 로마시대로.
무슨 말인가?
성혁명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문화에 반기를 들었던 현대 운동인데 이게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라니?
로마제국과 관련된 예전에 읽었던 책과 강의들이 떠올랐다.
로마시대의 성문화가 1950년대의 미국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 였지만 ’혼외섹스‘는 다수를 대상으로 허용했다.
노예가 아닌 귀족남성에게 적용되던 억압받지 않은 성적자유가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남성들은 물론 기혼자들은 창녀와 노예들이 성적 파트너였다.
문화적으로 자신의 가문과 경제적인 수준이 맞는 이와 결혼을 했고, 지적으로나 성적으로 수준이 맞는 ‘애인’이 있었고, 그외에 당시의 ’매춘업소‘를 찾았다.
로마인들이 숭배하는 신들의 신전의 창녀들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행태가 나쁘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성 관념에 대해 선과 악의 기준이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성적으로 자유로운 문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있다.
그건 혼외정사에서 생겨나는 사생아이다.
키울 수 없는 아이, 상속권이 없는 아이, 명예를 실추시킬 아이, 가계를 어렵게 할 ‘먹을 입’ 정도로 취급되는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다면? 탄생한다면?
피임도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자유로운 성문화의 산물로 발생한 사생아 ‘영아’들은 살해되기 쉬웠고 꼭 사생아가 아니더라도 여아이기 때문에 숲 속에 버려진 아이들도 있었다. 추위나 배고픔 혹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생명을 잃거나 물에 버려져 익사하기도 한다. 일부는 노예들이 거두어 길러지지만 노예나 창녀로 팔려가기도 했다.
출처: https://pubmed.ncbi.nlm.nih.gov/26506086/
키케로(Cicero, 106-43 BC)는 ‘Twelve Tables of Roman Law’를 인용하며 기형아/장애아들은 죽여야 한다고 했고(De Ligibus 3.9), 세네카(Seneca,4 BC-AD39)는 “출생시 약해보이거나 비정상적인 아이들은 익사 시켰다”고 썼다. (De Ira 1.15)
플루타크(플루타르코스/Pluatarch) 역시 ‘모랄리아moralia’에서 자기 아이들을 신전에 제물로 바치거나 아이가 없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기를 사서 양이나 새를 죽이듯 목을 그었다. 울거나 신음하지 않는 엄마는 옆에 서있었을 뿐이다“라고 기록한다.
그런 로마 문화에 대해 초기 기독교인 저술가 터튤리안은 이렇게 묘사한다.
" 당신들(로마인)들은 (아기들을) 추위와 배고픔, 들짐승들에게 노출(버림)시키거나 물에 빠뜨려 천천히 죽여 없앱니다."
(원문: “you expose them to the cold and the hunger, and to wild beasts, or else you get rid of them by the slower death of drowing’ )
출처: (Tertulilian 1869, Ad Nationes Book 1. Ch.15)
지금 21세기의 문화와 도덕관념으로 보면 경악할 일이지만 영아살해(infanticide)는 로마 제국에 보편적이었다. 가장의 권리 중 자기 아이를 죽일 권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https://academic.oup.com/book/6954/chapter/151225098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죽일 수 있었는데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인권’은 더 열악했다.
당시에 낙태 역시 위법행위가 아니라 인구조절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역시 고대 현자로 알려진 두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Q. 낙태권은 현대적인 운동인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 후 다시 생각해보면 2세대 페미니즘 아래 여성인권운동의 주장하는 pro-choice가 다르게 보인다. ‘낙태권’은 인간 역사 속 1세기 무렵에도 존재했던 게 된다. 새로운 권리가 아니다. 다만 사회적 약자 중 가장 크기가 작은 태아와 신생아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문화적 혁명이 존재했기 때문에 새로운 흐름이 역사 속에서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혁명을 다시 뒤집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이었던 거다.
20세기의 낙태권 주장은 더 큰 역사적 흐름에서 바라보면 ‘로마시대처럼 낙태할 권리’와 다를 바 없다. 그저 여성이 권리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여성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게 정말 여성을 위한 거라고 오해한 건 아닐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루려 한다.
원래 고대문명은 늘 힘의 문화였다.
권력이 있는 자들이 곧 "정의"였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할 장치가 거의 없었다.
그런 역사 속 문화의 식민지에서 어느 시점에 '약함'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는 시점이 있었다.
식민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중 선지자, 기적자로 취급받던 유대인 하나가 처형 당하고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 이들이 생겨난다. 로마인들은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 크리스천들은 기존 유대인들의 종교의 연장선에서 다른 행태를 보였다.
예수 안에서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없다며 동일한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설파한다. 황제가 신이었고 여러 그리스로마의 신전이 있던 곳에서 그런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고, 아동의 인권개념이 없던 시절 부모가 아이들을 화내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기존엔 아이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만 이야기했다)
그렇게 귀족에게만 있던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런 크리스천들의 활동을 “1세기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가 확산되어갔다.
니체가 비웃었듯이 ‘여성과 고아’의 종교였다. 니체는 약자의 종교라고 이야기한 것이지만 로마시대를 살펴보면 왜 여성과 고아의 종교라고 불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당대문화와 달랐던 크리스천들이 로마인들이 숲과 들판에 버린 아기들을 거두어 기른 것이다.
그런 크리스천들의 초기기독교는 성에 대해서도 당대 성문화에도 획기적이었다.
당시 로마문화와 크리스천들의 문화를 팀 켈러 목사는 이렇게 대조했다.
로마인들은 ‘밥상을 나누는 것에는 인색했지만 ‘침상을 나누는 것’은 관대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인들은 “밥상을 나누는 것엔 관대했지만 침상은 나누지 않았다”.
초기기독교인들은 경제적으로는 관대하여 재산을 공유화해서 썼지만 성관계는 혼인관계 안에서만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섹스는 결혼 안에서만 허락됐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일부일처제가 디폴트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아내가 남편의 애인이자 친구여야 한다고 했다. (기존의 ‘외주’ 모델과 다르게)
당시 문화 속에선 획기적이었다.
로마에 기독교를 전한 ’바울/폴‘은 그렇게 일부일처제가 신이 인간에게 준 결혼제도의 모습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가 말하는 성에 대한 오해
소위 성경적인 성 가치관은 단순히 ‘보수적’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살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인 가치관’이 반영되어 성관념이 성경해석에 적용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기독교는 ‘성’이 더러운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을 즐기면 안되는 것으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결혼 안에서 권장할 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아래구절이 있다. 부끄러울 수 있으니 영어로 두겠다.
A loving doe, a graceful deer— may her breasts satisfy you always, may you ever be intoxicated with her love. (proverbs 5:19)
아가 (song of songs)은 사랑하는 연인들의 사랑하는 장면은 시적상상력이 있는 이들이 읽으면 얼굴이 붉어지기 쉬운 묘사이기도 하단다.
How beautiful you are and how pleasing, my love, with your delights! Your stature is like that of the palm, and your breasts like clusters of fruit, I said, “I will climb the palm tree; I will take hold of its fruit.” May your breasts be like clusters of grapes on the vine, the fragrance of your breath like apples, and your mouth like the best wine. May the wine go straight to my beloved, flowing gently over lips and teeth. I belong to my beloved, and his desire is for me. Come, my beloved, let us go to the countryside, let us spend the night in the villages. Let us go early to the vineyards to see if the vines have budded, if their blossoms have opened, and if the pomegranates are in bloom— there I will give you my love (song of songs 7:6-12)
2세기 로마황제 트라야누스(Trajan)의 ‘alimentaria’ 법과 3세기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의 법을 통해 신생아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기록된 바 있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 황제를 통해 서기 374년 영아살해는 공식적으로 불법이 된다.
법역사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여성인권이나 아동인권의 시작점을 기독교로 보는 이유는 이런 배경에 있다. 기독교가 로마에 퍼져나가면서 당대문화를 바꾸고 영아살해는 불법이 된거다.
이런 배경들이 당시 초기기독교가 로마사회에서 ‘성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저 기독교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학적인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 주장이다.
더 나아가 남녀평등의 시작, 신생아와 태아를 포함한 생명의 평등이 1세기에 시작된 이 “1차 성혁명”과 관련있다고 주장해볼 수 있겠다.
다른 나라를 살펴보자.
유교권 문화 아래 동아시아 국가들은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여아를 대상으로한 ‘영아살해’가 존재했다.
중국을 먼저 살펴보면, 청나라 시대에도 가난한 가정에서 가족수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알려진 관행이었다.
출처: Mungello, David E. Drowning Girls in China: Female Infanticide in China Since 1650. Rowman & Littlefield, 2008.)
현대 중국에서 ’영아살해‘는 줄어들었지만, ‘한 자녀 정책(计划生育/one child policy/)’ 하에 성별을 바탕으로한 낙태가 현재의 성비를 만들었다. (2023년 약 104.5명의 남성: 여성 100명/ 1953년에 107.56명이었다)
출처: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51102/sex-ratio-in-china/
일본 역시 ‘마비키(間引き) ’로 알려진 영아살해가 인구통제 수단으로 활용되어왔다.
출산 후, 무릎이나 이불로 젖은 종이로 얼굴을 가려 질식을 시키거나, 맷돌(石臼)을 사용하는 수단 등이 기록되어있다. ‘식구’,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대 종교철학적으로는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다른 세상(이세계異世界)에서 받은 것으로 여겨, ‘돌려보낸다’는 생각이 배경으로 있었다. 토쿠가와 시대 (1603-1868)에 까지 이어져오던 이런 관행이 현대사회가 되어 사라진다. 에도막부에 ‘노동력 감소’를 우려해 금지했던 시기가 있으나 처벌의 사례가 극히 적었고 성인살인과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예도 없다.
한국의 경우, 관련된 기록이 흔하지 않지만 역시 유교관행의 영향인 남아선호사상으로 여아를 대상으로 영아살해가 일어났다. 가난을 사유로 발생한 경우도 있다고 알려졌다. 조선시대에는 기형아를 괴물로 보고 암암리에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산 쟁탈과 관련된 이유나 젖이 부족하다는 사유로 엄마에 의해 살해당한 아이가 근대사회를 배경으로 기록된다. 일대강점기에도 1년에 약 50건 달했다는 신문기사도 확인된다.
아시아 근방의 대국, 러시아는 어떨까? 10세기 정교 (Orthodox Christianity)가 퍼지고 나서야 영아살해가 터부시 된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계속 된다. 20세기가 되어서야 소련이 아동보호법을 제정한 후 영아살해가 희소해진다.
중세시대의 영국에서도 혼외정사로 생긴 아이, 미혼모를 대상으로 존재한 사회적 낙인 등의 사유로 영아살해가 있었다. 가난한 가정이나 부자들도 이런 선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세기의 산업혁명의 시대가 되고 도시화에 의해 영아살해가 더 눈에 띄게 된다. 당시 영아를 살해한 엄마는 처벌을 받는다. 주목해야할 점이 있다면 산후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이 의심될 때 배심원들의 엄마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22년이 되어 여성이 마주해야하는 산후우울증 등 심리학적 압박을 고려하여 다른 살인사건과 영아살해를 구분해서 형량을 경감하는 쪽으로 다루게 한다.
미국의 진보주의의 대표 주 캘리포니아는 어떨까?
일단 24주차까지 낙태는 합법이다. 더 나아가 2022년에 통과된 Assembly BIll 2223 (AB 2223)은 태아나 신생아가 사망한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임산부를 보호한다. 낙태 등 생식(reproduction)과 관련된 여성의 권리의 연장선에서 시작된 이 법안 하에 만약에 산모가 출산 후 아이의 죽음을 신고하는 상황이 발생시, 경찰이 조사할 권리가 없다.
인간이 선하다는 가정하에서는 아무도 신생아를 죽이거나 임신 후기 만삭의 아이를 의도적으로 낙태나 사산을 시키지 않을 거다. 하지만 역사 속 범죄 관련 통계를 보자. 1999년부터 2014년 사이 매년 500-600 건의 영아 살해가 기록되었다. (National Vital Statistics System) CDC가 낸 2002년의 보고서( Mortality Report)를 보면 1970년부터 2000년 사이 1세 미만의 아이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된 경우는 10만명 당 8.3건이다. 캐나다 사례를 보자 1974년부터 10년 동안의 살인사건 5444건 중 약 300여건이 부모에 의한 자식 살해, 그 중 150명이 한살이하의 영아였다.
실제 원치 않는 임신이나 정신이상 혹은 충동적으로 신생아를 살해 후 사산으로 신고할 경우,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2021년 기준으로 매해 약 366만 건의 출산이 기록된다. (사산제외) 그리고 미국은 1.41% 정도가 가정에서 출산을 한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싶지만 이 1.4%는 신생아들의 생명의 사각지대라고 볼 수 있겠다.
출산 수치 참고 출처: https://www.statista.com/topics/4452/births-in-the-us/#:~:text=In%202021%2C%20there%20were%20around,births%20in%20the%20United%20States.
인간의 일생 중 가장 연약한 시기는 생후 1-2년 사이이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없이 방치된다면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시 정서적으로 방치되는 학대를 경험한다면, 그 아이의 ‘마음이 죽은 채로’ 오랜 기간 살아가게 되기 쉽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유의 페미니즘’ (Feminism of Freedom)은 권리보호의 대상을 영아에서 산모로 돌렸다. 생식에 관련한 권리라며 심장박동수가 있고 영아와 동일한 신체기관을 발달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아이들의 생사여부를 ‘엄마’가 아닌 ‘여성의 선택’에 맡기도록 했다.
여성단체가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태아나 영유아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이 보수단체이고, 미국의 경우 그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낸 것이 기독교 단체이다. 영국에는 미국처럼 기독교와 보수정당이 동일시 되는 경우가 없어서 이런 주장이 대립할 때 종교적인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드물다고 한다.
세계역사를 살펴보자.
성혁명의 관점, 혼인제도의 관점에서 문명을 훑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포착할 수 있었다.
큰 틀 속에서 로마제국 이후의 세계역사를 바라보면 기독교 체제의 일부일처제의 국가가 경제발전이 더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유교권의 아시아, 힌두교권의 인도,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된 동남아, 그리고 이슬람의 중동. 유독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사회전반에 깔린 국가들 위주인 영미,유럽권이 소위 ‘선진국’이 되었다. 그 기술적 기반이 되는 이론 과학의 발전 역시 그 국가들에서 일어났다는것도 반종교적인 시선을 걷어내고 보면 과학사 속의 사실이기도 하다. 과학혁명은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인 과학자가 주축을 이뤘다. 영미법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그 근원을 기독교 성경의 가치관으로 연결하는 주장도 근거가 미흡하다고 하기엔 들어맞는 구석이 너무 많다.
종교계에선 ‘기독교’가 사회발전을 이뤄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한 종교를 옹호하는 듯한 데이터가 일반인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올리가 없다.
그럼 좀 더 대중적인 사회과학, 아동발달심리학,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보자.
일부일처제 vs 일부다처제: 어느 사회가 더 발전했는가?
안정적인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가 된다.
일부다처제는 역사 속의 대부분의 국가의 사회규범 안에 있는 ‘정상적인 것’이었다. 일부일처제가 적용된 국가와 시간대를 고려하면 극히 소수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힘이 있으면 모든 여성을 자기 ‘아내’/’첩’으로 삼을 수 있는 사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일부다처제는 권력있는 남성에게 유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전래동화 ‘우렁각시’ 이야기에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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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를 아내로 맞은 주인공 총각은 누가 아내를 “뺐어갈까봐 두려워서” 아내 보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고 새참을 배달하러 가던 중에 ‘원님/사또’의 눈에 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관아로 끌려가고 총각은 항의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는다는 전개가 있다.
전래동화는 역사 속 사회를 바탕으로 그린다.
여러 나라의 역사 속 왕들의 후궁이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익숙한 의자왕의 3000 궁녀라는 표현이 그렇다. (실제 3000명은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는 한다.)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3000명이다.
중국으로 가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중국 고대황제의 비빈妃嫔(정실과 소실의 통칭)에 대한 설명을 하는 표현 중 “3궁, 6원, 72비빈(三宫六院七十二嫔妃)이 있다. 군대에서 쓰기에 적합한 것 같은 ‘편제’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비빈의 편제는 진시황시절 8급으로 시작되어 한무제 시절에는 14개로 늘어난다.
그 중 1위인 당나라의 ‘당현종李隆基’이다. 당나라 시절에는 4명의 정부인, 후궁은 6국(局OFFICE),24사(司), 총 190명이 정규 편제였다. 그는 4만명이 넘는 후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인구를 5000만 명 정도로 보면 1000명 중의 한 명은 당현종의 여자였다는 거다.
2위는 한무제이다. 기록에 따르면 1만 8천명이다.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미녀 2000명, 30세가 넘으면 ‘출궁’하여 ‘출가’시켰다.
3위 진무제(사마염) 역시 즉위 후, 2년차에만 5000명의 궁녀를 들이고 후궁에 있는 미녀가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4위 수나라 황제 역시 5000명의 미녀 이상을 후궁으로 거느렸다.
2003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소개되었던 DNA분석으로 이야기한 징키스칸의 ‘러브 라이프(love life)’도 유명한 사례이다. 구 몽골제국 지역의 약 8%의 남성(1600백만)이 거의 동일한 y염색체를 가지고 있었다.
징기스칸의 장남 투시는 40명의 아들이 있었다. 전쟁과 침략 중의 미녀들은 칸이 먼저 골랐다고 한다. (물론 징기스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아 DNA샘플대조가 없는 연구이다.)
출처: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culture/article/mongolia-genghis-khan-dna
이런 문화는 비단 아시아대륙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국가의 나라를 살펴보자.
힌두권 국가에서는 전설 속의 크리슈나가 16108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데 상징적인 숫자라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시크 제국에는 적어도 20명의 아내가 있었던 Raja Ranjit Singh(1780-1839)가 있었다.
이슬람의 시초 모하메드/무하마드는 11(혹은 13)명의 아내가 있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가장 아내가 많았던 사람은 제5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이다. ‘정실’과 ‘후궁’ 구분이 유연해서 정확한 수치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가 여러명의 아내와 수백명의 후궁을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근동지역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이 기록한 성서 속 아브라함이 아내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했던 것, 다윗왕이 부하의 아내를 빼앗은 것도 그렇고, 솔로몬에게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이 있었단다.
지구의 다른 편을 살펴보자.
하지만 1세기 로마제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혁명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럽의 문화를 다듬었다.
그 이후 출현한 유럽 왕실의 ‘비빈’수를 비교해보자. 유럽의 왕들은 동양의 왕들과 대조해서 어땠을까?
유럽의 역사 속, 아내가 제일 많았던 왕은 영국의 헨리8세이다.
아내의 수는 6명이다. 심지어 한꺼번에 여섯명의 아내를 가진 게 아니라 ‘연쇄적 일부일처제(Serial Monogamy)’의 결과로 나온 아내의 수가 여섯이다.
물론 그게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이 되고 혼외정사가 없었다는 게 아니었겠지만 사회규범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없이 시대의 문화의 흐름에 따라 산다. 한 시대가 소위 ‘혼전순결’을 지키는 게 ‘보통’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와 ‘혼전섹스’가 당연한 것일 때 사람들의 보편적인 행태는 다를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소위 선진국의 성문화를 이야기하면 서구사회의 개방적인 모습을 이야기하기 쉽지만 그 렌즈를 줌아웃해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렇게 다른 그림이 보였다. 왕이 절대권력으로서의 기준을 가지고 있던 동양사회의 성은 한 사람이 여러 아내를 두고 첩을 두는 걸 허용해왔던 것이다.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를 비교해보면 보편적으로 일부다처제의 쪽이 문제가 많다.
유명한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보자면 여러 왕조, 여러 왕실에서 있어온 후궁의 자식들이 피 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동양사, 서양사는 물론 그 이전 시대인 구약성서에 기록된 고대 이스라엘, 로마제국, 조선시대까지 아주 일관성 있게 관찰된다.
일부일처제 속에서도 장남, 차남 간의 경쟁이 있는데, 정실부인과 첩의 자식까지 구분을 하면 가족관계의 다이나믹이 더 복잡하고 유해한 상태로 되기 쉬울 것으로 예상된다. 어머니가 하나라도 형제 간의 다툼을 볼 수 있는데 어머니가 여럿이고 정실, 외실, 정부인, 첩 등의 신분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더 복잡해지겠는가?
그 지역에 지금까지 잘 보존된 문헌의 대표적인 사례는 구약 성서이다. 그 속에 기록된 일부다처제가 낳은 비극 두 개를 살펴보자. (일단 아래 인물이 역사적 인물인지는 차치하고 기록 속 내러티브를 보겠다)
첫번째는 그 유명한 아브라함이다. 노년까지 자식이 없어 아내의 조언에 따라 ‘첩’(여종)을 들여 아이를 낳는다. 나중에는 자기가 시켜서 아이를 낳게 한 ‘첩’을 학대하고 아이와 함께 쫓아낸다. 두 번이나. (유목민족이나 농경민족이나 첩의 아들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다. 유산분할을 고려한 게 아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 보다 더하다. 사막에서 죽을 뻔하다 살아난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중동평화 문제의 가장 시초를 ‘정부인의 자식 이삭의 후손’과 ‘첩의 자식 이스마엘 후손’ 간의 대립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두번째는 요셉의 이야기이다. 눈치없는 언행으로 형들에게 죽임 당할 뻔하다가 이집트로 팔려갔다는 요셉의 이야기도 잘 살펴보니 이복형제간에 일어 난 일이었다.
(아빠 야곱이 더 좋아하던 예쁜 엄마의 아들이었다. 요셉을 팔아넘기는 걸 공모한 형들은 아빠가 ‘속아서’ 혼인하게 된 ‘덜 예쁜’ 엄마의 언니이다. )
만약 어디서 ‘하지만 성경에서는 일부다처제 허용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그런 일부다처제 가정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아브라함부터 다비드/다윗왕의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문해력을 사용해서 유추해보는 걸 추천한다. 일부다처제가 행복한 가정상을 그려낸 이야기는 없다.
동양적인 단어를 사용하자면 그게 ’순리‘가 아니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폴리아모리는 행복할까?
성혁명을 지지하는 이들 중에는 ‘‘폴리아모리”(polyamory)라 불리는 ‘다자연애’, 여려 명의 성애대상을 허용하는 연애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사회가 규정한 1인 1연애’에 반기를 드는 거다.
절대적 선, 도덕적 기준, 종교적 금지 등을 배제하면 남는 건 ’동의/합의 여부’이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쌍방합의가 있다면 문제 될 것 없냐는 반론을 던진다.
하지만 폴리아모리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게되는 사례를 보면 역시 ‘순리’가 어느 쪽인지 알게 해주는데 도움이 된다. 주로 질투를 겪는 게 힘들다는 것에 대한 고충을 토로한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파트너/배우자가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에 거부반응으로 구토를 하기도 한다. ‘역겨움’이라는 반응은 굉장히 본능적이라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 “이렇게 구차하게 굴면 안되는데….” 이성적으로 알아도 몸이 거부하는 거다.
어쩌면 인간과 인간의 연애관계에 대한 ‘디폴트’는 1대다(多)가 아니라 1대1인 거다. 감히 ‘정상적’인 거라고 주장해볼 수도 있겠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것. 그런 가정이 사회를 이루는 게 더 ‘정상적인’ 사회를 이뤄내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부일처제 사회의 이점은 뭐가 있을까?
어떤 사회학자들은 일부일처제가 가정폭력의 발생율이 더 낮다는 것을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한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많은 국가가 정서적으로/정신적으로 좀 더 건강한 성인들이 많은 국가가 된다. 엄마 아빠 사랑 잘 받고 자란 아이가 잘 크는 게 상식이겠지만 그런 개인사례들을 모아 국가단위로 보면 그 영향력이 어떨까?
해방이후 대한민국은 헌법에 혼인의 양성평등을 규정한다. 그 이후에서야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독점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미국의 경우, 1879년 연방정부가 일부다처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일부다처제가 신앙교리라고 주장하는 몰몬교인들의 주장을 불법시했다. 그리고 1995-1996년의 결혼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이 오바마 정부에서 폐지되며 결혼존중법(Respect for Marriage Act)이 들어온다. 그 전의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이루는 결혼에 대한 정의를 걷어올리며 동성 부부를 포함시키는 것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한 이들은 이런 법적 움직임이 ‘일대다, 즉 일부다처제’의 합법화로 이어질 여지를 준 것이라고 비평했다.
좀 더 비전문적이고 주관적인 사고실험을 해보자.
일부다처제는 힘의 사회이다.
이론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이 모든 (매력적인) 여성을 갖을 수 있었다. 남의 아내도 뺏어 갈 수 있었다. 왕이 곧 법이었다.
또 인구단위로 “불공평”함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아름다운 여성들은 권력자들이 다 가져간다.
기록되지 않은 그런 사회 속의 남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불공평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에 비해 일부일처제는 가히 ‘성적’ 공산주의이다.
한 사람당 한 명의 아내로 제한되어 있는 사회규범이다.
왕도 아내 한 명, 나도 아내 한 명.
(개념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탈선하는 이들은 역사 속이나 현재에도 존재하니.)
공평하다.
세상의 모든 미녀를 한 남자가 다 차지하고 나머지를 분배한다?
인간사회에서, 특히 남성들의 세계에서 동기부여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마 꽤 높을 거다.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누구의 말이었나.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권력과 명예와 돈이 남성에게 의미가 없을 거라고. 그런 본능적인 동기부여에 불평등을 깔고 시작하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왕’이 아닌 남자들은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기 쉽겠다.
루이스 페리와 같은 작가들은 현대문화 속 온라인 데이팅 앱이 미치는 영향이 과거로 회귀하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잘 생기고 능력있는 남자가 더 많은 여자를 만날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여성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특출나게 매력적인 여성이 더 많은 남자들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손해인 게임이 된다고.
'자유로운 이혼'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앞서 말했듯 미국이나 영국은 많은 청소년들이 아버지가 없이 자란다고 한다. 이혼가정이 많아서이다. 미국 통계청 자료를 살펴보면 4명 중 1명인 1780만명의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란다고 한다. (생물학적 아빠나 양부 혹은 입양부)
미국의 작가 매리 에버스태드(Mary Eberstadt)는 1990년대 문화계에서 힙합씬을 대표사례로 삼는다. 에미넴(Eminem), 제이지(Jayz), 투팍(Tupac), P.Diddy(퍼프대디), Kanye West(카녜 웨스트), LL COOL J, Lil Wayne, Drake, Notorious Big, Big Sean 알만한 이름들이 모두 아빠 없이 자란 랩퍼들이다. 그녀는 그들의 노래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미국 대중들의 정서적 공감이 그들을 차트 위에 올려놨다고 주장한다.
농구를 좋아하는 나는 NBA를 살펴봤다. 샤킬오닐, 데릭 로즈, 르브론 제임스, 케빈듀란트, 앨런 아이버슨, 지미 버틀러가 아빠 없이 자랐다.
그리고 그런 가정배경에서 자라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아이들이 점점 늘었다.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아빠 엄마로 구성된 안정적인 가정이 없었다. 이걸 발달심리학적 데이터로 사용하여 문제점을 분석하기도 하다.
(그 외 직접적으로 연구결과가 없는 영역, 음식, 영양과 교육문화 속 자리잡은 심리학적 접근법의 보편화가 부차적/잠재적 이유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X세대가 ‘broken family’에서 자라났다. MZ세대 역시 그런 가정에서 자란 부모 아래서 자란다.
아빠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남자아이들은 롤모델이 없는 가정에서 자란다. 여자아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남자’의 첫 대상인 아빠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다.
그렇게 청소년, 성인이 된다.
확률적으로 여성이 ’좋은 남성상‘에 대한 롤모델 없이 자란 남성들을 만나며 연애관을 확립하게 된다. 나쁜 남자들만 만나봐서 '남자는 나쁘다'라는 결론을 내는 이들도 있을 거다. 그렇게 결혼에 대한 인식을 구축하게 되기 쉽다. 평생 좋은 남성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결혼적령기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니 결혼도 싫고 아이들도 싫다. '나같은' 아이들을 기르는 가정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다.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싫어할 거라 믿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누리고 있는 현재의 편안함'을 '누려본 적 없는 미래의 미지의 행복'과 맞바꾸려는 도전을 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성에 대한 인식은 결혼과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통계적으로 성혁명 이후 이혼률과 동거율이 급증했다.
미국의 경우, 1960년부터 1980년대 이혼률은 2배가 되었다. 1950년대 결혼한 커플은 20% (1000명 당 9.2건)미만이 이혼했지만, 1970년대에는 약 50%가 (1000명 당, 22.6건) 이혼을 했다. 물론 ‘무과실no-fault 이혼’을 지지하는 법적요인이 배경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양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안정적으로 자라는 아이에게 이점이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편부모 가정의 아이가 꼭 잘못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배로 힘들다는 게 사실이다.
출처: https://time.com/6317692/u-s-economy-two-parent-families/
사회의 대다수가 안정적인 가정들로 이루어져 있을 때와 그 비율이 전도되었을 때, 사회 안정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가정에 속해있지 않은 이들은 결국 정부의 관리대상이 된다.
사회문제가 되는 비행청소년부터 독고사를 걱정해야 하는 가족이 없는 노인들까지. 반가정적(anti-family)이고 반아동(anti-children)적인 진보주의가 궁극적으로 정부에 의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을 돌볼 가족이 있는 게 아니라 정부 정책에 노후를 맡길 수 밖에 없다.
과연 ‘성문화’를 생각하며 이런 문제까지 고려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눈 앞의 자유와 선택권은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근시안적인‘ 선택은 늘 미래에서 뒷통수를 치기 마련이다.
성이란 주제는 참 어렵기도 하고 오해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하나 하나 살펴본 게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고 생각된다.
크리스 윌리엄슨 팟캐스트에 출연한 루이스 페리는 해결책이 뭐냐는 질문에 아주 단순한 답변을 제시한다. 반은 농담이다.
‘비욘세’가 하면 사람들이 따라 간다고.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은 문화를 선도한다.
‘그들과 닮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트렌드를 쫓아가며 트렌드가 된다.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스타들의 결혼생활은 어떤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가? 많이 낳는가? 이혼을 쉽게 하는가? 이런 것들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이 역시 가볍지만 의미 있는 분석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걸 강요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변화추세
크리스 윌리엄슨도 루이스 페리도 현대 사회의 성문화, 성에 대한 인식, 결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건 어려울 거라는 전망에 동의한다.하지만 그런 흐름을 역행하는 추세가 포착되었다고 한다.
성혁명이 퍼뜨린 거짓말을 살아본 MZ세대들 중에서도 현실 속에서 그런 가치관대로 살아갔을 때 겪게 되는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고 있다. '혼전섹스'나 '캐쥬얼섹스'가 당연한 것인지 질문하는 젊은 세대가 늘어가고 있다. 행복을 찾는 여정에서 '책임없는 자유' 대신 '의미있는 의무'라는 선택지를 바라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거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한 단계이다.
영국 Oxford Union 토론 링크: https://youtu.be/otS7VLEredY
미국 The Free Press 토론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69TWgWi0JMI )
20세기 전반 미국에서 보편화되던 담배 흡연.
의사들이 광고에 나오고 병원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흡연이 아무렇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비지니스와 마케팅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문화도 뒤따랐다. 대중이 여기에 따라갔다. 그렇게 마주한 흡연율의 최고점은 마침 성혁명의 역사와 시간대를 같이 한다.
1964년 최고점을 찍은 후 감소추세가 이어졌다. 뒤늦게 과학적 연구결과가 유해성을 입증하며 시민의식이 달라진 것이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894634/
'2차 성혁명*'이라는 실험도 이제 70여년이 경과되었다.
사회과학적으로는 그 실험이 미친 영향과 결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복습: 1차 성혁명은 1세기에 로마에서 발생했다.
그 중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인구감소'이다.
만약 인구감소 위기가 문제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 저변에 있는 '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 서구사회에서의 '2차 성혁명'이 미친 영향을 '선진국 문화'라고 보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걸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깊은 고민없이 "유럽 선진국에선 혼전 동거문화가 당연하니깐- "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회과학은 혼전동거를 한 커플들의 이혼율이 더 높다는 결론*을 내놓은지 오래다.
꼭 살아봐야 아는 거 아니다. 결혼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 부부, 부모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의견 교환이 더 도움이 될 거다.
*출처: (1) https://www.pewresearch.org/social-trends/2019/11/06/marriage-and-cohabitation-in-the-u-s/ (2) https://ifstudies.org/blog/is-cohabitation-still-linked-to-greater-odds-of-divorce
'혼전동거'는 결혼을 테스트 해보는 게 아니라 결혼을 중고차 구매하는 '소비자 마인드'로 접근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종종 듣게 되는 아래의 주장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자만 야동/포르노를 볼 수 있나요? 여성도 즐길 수 있습니다."
▶ 야동시청은 '야동중독/성중독'으로 이어지기 쉽다. 정신건강에 안 좋다. 남성의 발기부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자만 감정없는 섹스를 즐길 수 있나요? 여성도 즐길 수 있습니다"??
▶ 감정없는 섹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되는 게 행복과 이어지지 않는다. 주로 그 반대로 이어진다. 안 좋은 거 똑같이 할 수 있게 되는 걸 목표로 정상적인 신체와 정서반응의 고리를 끊는 건, 사이코패스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맥락에 있다.
"남자만 밤 늦게 까지 술마시고 돌아다닐 수 있나요? 여성도 그래도 됩니다."
▶ 밤늦게까지 술 마시다가 길바닥에 꼬꾸라져서 잠드는 게 과연 자유인지 그게 안전할지 의문을 갖는 게 우선이다. 생물학적 특성상 마주하게 되는 위험은 사후피임약이라는 것으로 예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류에게 '성sex'가 물이라면 '(2차)성혁명'이 주장하는 '성적자유(sexual liberation)'는 '술' 내지는 '탄산음료'이다.
물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다른 여러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술은 인간의 쾌락에 일부 기여한다. 하지만 술이 물을 대체한 삶은? 인간관계 파탄으로 이어지는 알콜중독이나, 더 슬픈 비극인 알콜성 치매에 기여한다.
인간에게 탄산음료의 자극을 즐길 자유는 있다. 하지만 탄산음료가 물을 대체한 인간의 삶은 혈당, 인슐린 문제로 당뇨를 마주하게 되거나 경우에 따라 췌장암이라는 치료가 어려운 암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성욕과 식욕은 엄연히 다르다.
여러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성욕을 비유하는 문장을 만난다면 그 의도를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성적으로 더 자유로운 사람'이 더 '진보한' 사람이 아니다. 진보라는 단어가 꼭 옳은 가치관을 대체할 필요가 없다.
성행위는 가장 개인적이며 개인의 삶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이다.
성범죄가 더 죄질이 나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위 주장에 동의를 하는 게 일관성 있는 선택이다.
특히 아동성범죄가 특히 더 가혹한 처벌을 마주해야 된다는 것에 동조한다면, 위 주장에 동의하는 게 맞다.
법적으로 미성년은 만18세이지만, 그런 성년의 두뇌발달을 25세까지도 계속된다*.
성년이 되어, 대학생이 되어 '즐기는' 성인물은 시청자의 두뇌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이성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혼 후에도 영향을 미칠 '중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혼이 '연애'의 무덤인 거 아니다. 결혼한다고 '섹스리스'되는 거 아닌다.
"가족끼리 왜 이래"는 흘려듣자. 그런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과 결혼해서 즐기면 된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621648/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
1차 성혁명이 제시했던 모델의 유효성과 장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참고 미디어자료:
참고(추천)서적:
1. The Case Against the Sexual Revolution | Louis Perry (링크)
2. Feminism Against the Progress | Mary Harrington (링크)
3. This is your brain on birth control: The Surprising science of Women, Hormones, and the Law of Unintended Consequences | Dr. Sarah Hill (링크)
독자선물: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이번에도 2011년도에 만들었던 곡입니다. (가사없는 고아에요)
당시 제목은 Last Dream 입니다.
영상은 놀이터에서 만난 비누방울입니다.
비누방울 하나로 어디까지 표현될까 실험해봤어요
P.S=..전 연재북으로 발행한 것 같은데 소속 없이 올라가 버렸나봐요; 라이킷 눌러주신 독자님 13분께 죄송합니다;; 다시 수정발행하여 댓글을 옮겨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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