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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Mar 24. 2024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도서관 개관공사가 늦어져 여전히 대기상태다. 당연히 이곳에 내 자리는 없다. 자리는 셋인데 사람은 넷이다. 다들 뒤편에 도서 정리실에서 연체자 관리나 희망도서 선정, 수서, 청구기호 마크 작업 및 라벨링 등 개인 업무에 바쁘다. 포지션이 없는 나는  뒤로 빠질  없고 종일 통합데스크를 지켜야 한다. 자리를 비우고 마음놓고 화장실 갈 여유도 없다. 암묵적으로 데스크 붙박이지만, 내 자리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 뒤편에 서면 메뚜기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그때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지 않으면 으레 쿵사리를 다.

"어이구, 남의 자리에 장갑 벗어놓지 말고~."

"컵 좀 치우세요."

"남의 아이디 도용하지 말고 본인 걸로 로그인하세요."

무거운 책을 들고 있는 이용자들더러 이리 와라 저리 가라 할 수도 없고, 여기저기 울리는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옮기며 뛰어다니는데 매번 치우고 매번  로그인하는 건 여간 번잡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난 정리하는 뇌가 없는 인간이란 말이다.



동기쌤은 이곳이 발령지라 고정좌석이 있지만 그 자리는 접근이 용이하여 매우 바쁜 자리라 내가 주로 앉는 구석 자리로 곤 했다. 느긋이 개인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탁상 달력으로 창구를 막아놓곤 한다.  그날도 서류뭉치 잔뜩 들고 자리를 비켜달라 했고 내가 자리에  먹다 만 초코 과자를 발견하고 말했다.

"이거 뭐야 뭐야? 가져가야지~." 

"나중에 먹으려고요." 했더니

"얼른 치워." 하며 과자를 들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좀 기분이 상했다.

"자린데 좀 놓으면 안 돼요?" 그랬더니

"네 자리, 내 자리가 어딨어? 찜한 사람이 임자지."라고 얘기를 했다. 너무 맞는 말이어서 얼른 치웠다. 그리곤 화가 나서 속으로 계속 씩씩거렸다.


기존쌤들이 뒤로 사라지면 나는 얼른 그 자리로 가서 내 아이디로 다시 로그인을 해서 대출 반납 업무를 해야 된다. 굳이? 하지만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동기의 말에 화가 나는 것을 보며 내가 마음이 힘들었구나 . 실수가 잦은 내가 자기 아이디를 쓰면 자기 실수가 될까 봐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운했다. 그러나 동기도 시부터는 기존의 오후쌤이 오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불청객인 나 때문에 괜히 떠도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특히나 여긴 일반 메일이 열리는 컴퓨터와 행정망이 열리는 컴퓨터가 달라서 하나의 업무를 처리할 때조차 자리를 몇 번이고 옮겨야 한다. 그분도 오전만 고정석이고 오후엔 메뚜기 신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동기쌤이 주말근무 때의 일화를 얘기해 줬다. 나는 주말의 상황을 잘 모른다. 주말 쌤들은 내가 주로 앉는 이용자들이 잘 오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다툰단다. 나는 기회가 적어 일이 늘지 않아  그 자리가 싫고, 그분들은 일을 덜하기 위해 선호하는 것이. 옥신각신하다 결국 도서관 경력이 더 오래된 사람이 권력과 구석자리를 차지한다.


나도 그렇고 모두 을들의 웃픈 싸움이다. 당연히! 당당히! 책상이 있고, 책도 가끔 떠들어 보고 여유 있게 업무를 보고 입구에 들어서는 이용자를 반갑게 환대하며 웃음 띈 얼굴로 서가를 거닐 줄 알았다.


현실은  이리저리 뛰 당기는 메뚜기 신세고, 커피라도 마시면 허겁지겁 컵을 치워야 다. 두 시간이 넘도록 상호대차 가방을 풀고 분류하고 전산처리를 하며, 책을 반납했네 안 했네 옥신각신하고, 시끄럽다 지저분하다 매일 민원을 받, 이용자가 카트를 드르륵 드르륵 끌고 와 책을 꺼내면 겁이 덜컥 난다. 나뿐 아니라 다들 카트 소리만 들리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것 같다고 한다. 딸림 cd를 몇 십장씩 꺼내면 하나라도 빠뜨린 채 처리할까 봐 무섭다(cd는 수기로 처리해야 한다). 커다란 하드케이스 동물도감 책을 들다 손목을 삐끗했다. 카트를 끌고가다 문에 손가락을 찧고 무릎에 부딪혀 멍이 들었다. 배가를 할 때마다 폴폴 날리는 책먼지에 목감기는 떨어질 줄을 모르고, 아침마다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아도 곤죽이 된 몸과 정신은 나도 모르게 짜증을 부리고 있다.



류시화 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책을 읽었다. 제주도에서 우연히 만난 독자와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생각했던 제주도가 아니라서 실망했다며 한 달 살기를 포기하려는 독자에게 류시화는 말한다.

"왜 당신이 생각했던 제주도와 같아야 하죠? 당신은 당신 관념 속의 제주도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온 건가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럴 거면 집에서 계속 상상만 하는 게 낫지 않나요? 상상이 아니라 진짜 제주도를 경험하려고 온 것 아닌가요?"


도서관을 꿈으로 접근해서 실망과 혼란이 온 것 같다. 생각했던 일이 아니라고 당황하며 멍청이처럼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춰야 한다.  꿈속이 아니라 실제의 도서관, 일 접근해야 한다.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ㅡ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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