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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Mar 31. 2024

꼼꼼 에너지

고등학교 때 복날 즈음에 보신탕 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 널찍한 홀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작은 방도 몇개가 있었다. 반찬갯수는 또 아홉가지가 넘었다. 마흔 개가 넘는 테이블에서 일제히

 "김치 떨어졌어요. 이거 더 주세요. 휴지 떨어졌어요. 주세요! 저기요!"를 외쳐댄다. 테이블 번호와 위치도 모르고 반찬의 종류와 가지 수조차 외우지 못하고 있는데 지나갈 때마다 붙잡고 달라고 한다. "네~네~."만 하면서 멘붕 그 자체 그들의 말을 쳐내고 뿌리치며 간신히 반찬을 엉망진창으로 바꿔 갖다 주거나 대답만 하고 갖다 주지 않아 계속 혼이 났다. 땀을 질질 흘리며 볼 빨간 사춘기처럼 뛰 당기다가 잘렸다. 며칠 지켜봤는데 진짜 여기랑 안 맞는다고 사장이 말했다. 너무 다행이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홀서빙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25년이 흘렀고 그동안 14개 직장과 7가지 직업군 경험했다. 남들이 빡세다던 반도체  회사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고, 콜센터 상담원도 아주 잘 맞는 일이었다. 비누공장 단순 생산직도 굉장히 재밌었다. 상자를 착착 접어 비누를 집어넣고 테이핑을 하고 박스에 테이프를 붙여서 힘껏 미는 일은 적성에 딱 맞았다. 이후 십 년 이상 했던 상담은 더 잘 맞았다. 퍼포먼스를 요하는 이미지메이킹만 제외하면 강의가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재밌기만 했고 할수록 에너지가 올라왔다.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결국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아가게 되어있다. 겨우 한두 직장으로 나를 판단하며 '아 나는 똥멍청이구나~.'하고 낙인찍는 것만큼 미련스러운 일은 세상에 없다.


지금껏 했던 수많은 일 중에 홀서빙 다음으로 도서관이 제일 힘들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란다. 이 일은 엄청난 노가다와 엄청난 대면 서비스 그리고 전산을 함께 는 일이다. 물론 감이 오지 않겠지만, 한 권만 두고도 책상태가  대출 반납이라는 두 가지 상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약 선반,  승인, 신청, 선반 대기, 선반 해제, 상호대차신청,발송, 자관수취, 회송, 타관반납선반, 도착 등등 수십 가지 처리를 해야 한다. 매일 수백권을 가방에 담아 싸고 풀고 정확히 꽂고, 신간을 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오래된책을 처리하고 보존서가로 내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꼼꼼 에너지가 높은 것이다. 꼼꼼 에너지의 총합을 대략 백으로 보고 일반적인 사람의 레벨을 50으로 본다면 나는 마이너스 90 정도인 것 같다. 그러니 다들 할 말 한데? 하고 생각하는 정도도 나는 세네 배 그 이상의 에너지를 들여야지만 겨우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그들더러 상담을 하거나 강의를 하라 면 못할 것이다. 그치만 나는 늘 그것을 해왔고 매우 잘해왔다. 모두 잘할 수는 없다.


또 다 변수는 내가 늙었다는 것이다. 나이와 체력은 항상 반비례한다.  결국 가장 늙은 내가, 가장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잘 맞는 일만 하고 살 것인가. 맞지 않은 일도 적응하면서 우물 안을 벗어나야 지 않겠는가. 


지금껏 주둥이 하나로 충분히 먹고 살았다. 고시원 같이 좁은 내 세상에서 아무 불편함 모르고 살아왔다.


류시화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에는 랍스터 에피소드가 나온다. 랍스터는 평생 스물 일곱번 껍데기를 갈아입는다고 한다. 신축성이라곤 없는 딱딱한 껍데기가 답답해지거나 불편해지면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작아진 옷을 깨고 다시 껍데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하지만 답답함이나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참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조그마한 랍스터에서 성장은 멈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크게 불편함을 못 느끼거나 느끼면서도 안주한다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요즘 뜨는 MBTI 를 보면 특히 사회화된 T가 많다고 한다. T는 기본적으로 냉정하고 논리적, 이성적이라 뼈 때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공감을 잘 못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직에서 사랑받고 공감하기 위해 사회성을 개발한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대충에너지 레벨이 최상위지만, 꼼꼼에너지를 정착시키기 위해 사회화된 인간이다. 남들의 몇십 분의 일 밖에 안 되는 꼼꼼 에너지를 어떻게든 팽창시키고 확장시키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요즘 가장 자주 쓰는 부사도 '정확히'이다.


주둥이만 털며 그동안 고시원같이 작은 세상에서 살았다면 이제 나의 세상을 넓힐 때가 되었. 이 꼼꼼 에너지라는 말은 '도대체' 작가의 <일단 나부터 챙깁시다>에서 나오는 말이다.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작가가 나와 정말 유사한 인간형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었다. 내가 쓴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이 나의 상황과 심정을 소름 돋도록 정확하게 묘사해 줘서 감사하재밌고 왠지 울컥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었군요. 좀비에  쫓기듯 살면서도 우울빠지지 않고 이렇게 예술승화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었군요. 대체 작가님,  사랑합니다.'


아무튼 도서관 업무는 지금껏 내가 해왔던 그 어떤 일보다 힘든 건 사실이. 오직 나에게만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기질과 정반대되는 곳에서 적응 한번 해볼까. 적응만 하면 다 죽었어. 우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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