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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Apr 15. 2024

알고리즘

퇴근 후 여느 날처럼 멍한 눈으로 유튜브 숏폼 영상을 보다 뼈를 맞았다. 가장 위험하고 반드시 피해야 할 사람, 근처에 있다면 당장 도망가야 할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데 야망이 큰 사람’, 완전 내 얘기였다. 정확히 나를 향한 일침에 리모컨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손목을 핑계로 글도 쓰지 않으면서 은근 힘이 필요한 리모컨 버튼 누르기를 하루 몇 백, 몇 천 회씩 반복했다. 그래도 나름 성과는 있다. 일깨우고, 위로가 되는 영상 등 건강한 영상들이 알고리즘에 많이 뜬다. 한낱 인터넷 프로그램도 자신이 클릭한 종류의 것으로 채워지는 데, 인생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과거의 내가 나를 일깨울 때가 있다. 예전에 쓴 브런치 글을 볼 때인데, 마치 미래의 내가 이걸 보고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듯한 문장들이 있다. 나르시시즘 예찬에서 “나는 걱정 안 해. 뭐든 잘할 자신 있거든.” 젊은 날의 내가 눈을 반짝 빛내며 그렇게 말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에 시키면 다음날 새벽에 총알처럼 온다는 물류센터에 취업한 남편이 말했다.

“내가 한 직장에 18년 다니다 보니 진짜 뭘 하나도 몰랐었어. 거기가 온실 속이었다는 걸 말이야. 지금 1초도 쉬지 않고 포장하고 냉장창고에 들어가야 하고  새파랗게 어린 매니저가 계속 달려와서 닦달하고, 빨리하라고 방송이 계속 나와. 조금도 쉴 수가 없어. 나보다 나이 든 오십, 육십 대 분들도 웃으면서 나름 편한 일이라고 하는데, 나는 정말 너무 힘들어서 뒤질 거 같거든. 계속 다리 힘이 풀리고 새벽엔 다리가 퉁퉁 부어. 이렇게 빡센 데가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 구내식당 밥도 진짜 맛없고, 새벽에 퇴근해서 자고 일어나 밥 먹고 회사 가는 게 인생의 전부야. 입술은 항상 터지고 포진이 일어나. 전에 하던 일과는 비교도 안되게 힘든데, 월급은 또 최저임금이야.”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온갖 직업을 다해 봐서 잔뼈가 굵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온실 속에 있었다. 우리 부부 모두 온실 속에 살다가 내 쫓겨졌다. 이미 닫힌 문에 매달려봐도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긴 세월 한 직장에 다니며 꼬박꼬박 적립했던 불만과 불평들이 풍선 터지듯 쑥 빠져나가고 이 열리기 시작했다. 출근초반, 매일 욕했던 매니저를 두고 어제는 이렇게 말했다.

“걔들은 그냥 지 할 일 하는 거더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이제는 남편에게 그 어떤 잔소리도 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부딪치며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동안 체력 관리를 안 했기 때문에 벅찼손목통증도 아대를  계속 차다 보니 조금씩 나아진다. 목과 어깨의 긴장도 내가 내 포지션을 잡고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던 노력을 내려두고 에만 집중하니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최근에 또 다른 도서관에 파견근무를 나갔다. 적응할만하니 바뀌어버린 환경 속에서 스트레스가 심했다. 서로 배려했던 전과 달리 이곳은 어떻게든  일을 안 하려고 뺀질댔다. 공평하지 않다, 나만 고생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류시화 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한 여자가 버스에서 창밖을 보면서 경치도 감상하고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어떤 덩치 큰 여자가 버스에 오르더니 비집고 들어와 앉고 짐을 그 여자 무릎 위에 올려놓더란다. 가만히 있는 여자가 답답하고 안쓰러웠던 옆 좌석 남자가 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 두고 보고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까?” 여자가 답했다

“어차피 저는 다음 정거장에 내리거든요.”      


말 그대로 우리는 다음 정거장에 내린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영원할 순 없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기다리며, 이곳에, 이 사람과 영원히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현상이 집착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갈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답을 찾았다. 은퇴까지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거운 돌이 가슴을 누르는 듯 답답하고 두려웠다. 남편은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위해 자기만의 속도로 다리를 건너는 중이다. 다리가 심하게 출렁대지 않도록, 계속 일하겠다. 딱 5년만, 후엔 승리의 깃발을 꽂고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겠다. 내 발걸음이 남길 알고리즘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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