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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ug 17. 2021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속에서 한국어 강사는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그 해 초여름, 나는 다음 학기 대학원 수업에서 곧 있을 실습수업을 앞두고 한국어 교육 기관의 한국어 강사 구직에 열중이었다. 처음 나의 계획은 논문까지 모두 마치고 대학원 졸업 후에 구직을 하려고 했으나 실습과 논문을 하기 전에 한국어 수업 현장의 경험이 더해진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뀌었다. 나의 경우에는 대학원 입학 전에 이미 한국어 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후여서 한국어 강사 자격 조건에 대학원 졸업 이상만 아니라면 지원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대답하신 대로 다른 강사들하고 잘 지낼 거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믿어요?

한국어 교육 기관 면접에서 '다른 강사들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냐'는 질문에 내가 대답한 후에 면접관으로 참석한 코디 선생님한테서 들은 말이다.


아주 단정한 모습이신데 저는 그런 분들이 속과 겉이 다른 경우를 많이 봐서요.
선생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떤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 끝나고 들은 아직도 잊지 못한 말이다. 나의 예상 질문에는 없는 너무나도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어서 순간 나는 지금 내가 혹시 '스트레스 면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정신을 가다듬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면접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억을 되살려 돌이켜보면서 이 면접은 면접자가 의도적으로 당황하게 해서 피면접자의 감정 조절 능력을 확인하는 스트레스 면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단정한 모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내 학부 전공을 보고 겨냥한 인신공격 그 자제였다. 스스로 '갑'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다른 강사들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저는 이렇게 대처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나의 대답을 믿을지 안 믿을지에 대한 것은 면접자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말과 모습이 단정하다고 그것을 의심해서 속과 겉이 같은지 모르겠다는 말 역시 판단하는 것은 면접자의 몫이다. 보통 속마음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말을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직무를 핑계 삼아 직무에서 벗어난 행위를 함부로 하여 공무의 공정성을 잃은 '갑'의 직권 남용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관에서 결국 나를 합격시켰고 나는 같은 시기에 다른 한국어 교육 기관에도 합격을 했지만 거리를 감안해서 이 기관에서 한국어 수업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미심쩍은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거리가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집, 대학원, 한국어 수업을 하는 기관과의 거리.

당연히, 모든 한국어 교육 기관에서 면접을 볼 때 모두 '갑'의 위치에서 한국어 강사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 다른 기관에서의 면접은 정말 존중받는 시범강의, 면접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 기관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으나 중요한 실습 수업과 논문이 남아있는 시기에 거리를 생각하면 쉽게 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면접을 봤고 거기에서 나를 합격시켰으니 이후에는 나를 믿고 존중해줄 거란 의심스러운 자기 합리화로 나는 그 기관의 한국어 강사가 되었다.


여기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기가 첫 직장이고 20대가 많아요.
다른 곳에서 경력이 많다고 선생님 생각을 주장하는 일은 하지 마세요.

합격 통보를 받고 내부 교육을 받는 첫날 들은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의 미심쩍은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모두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회의 시간에 나의 의견은 다양한 의견 중 하나가 아니라 기존의 조직 체계에 맞서는 분위기가 되기 십상이었고 20대가 아닌 내 나이는 마치 언제 어디서 선생님들을 선동할지 모르는 관리 대상이 된 듯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스스로 혼자 있는 것이 편해졌고 선생님들의 수다 무리에는 아예 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기 수업을 그만두고 싶은 선생님들은 혼자 조용히 나가세요.
다른 선생님들 선동하지 말고. 그렇게 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코디 선생님과의 불화로 학교 수업을 그만둔 선생님이 있은 후, 전체 강사 회의 때 들은 이야기다.

더이상 구체적인 유치한 이야기들은 더 쓰고 싶지도 않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나는 건강상에 문제가 생겼고 이 기관에서의 수업을 마치게 되었다. 물론 나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혼자 조용히 나왔고 다른 선생님들을 선동하는 일도 없었다.


내가 알고 지내는 한국어 선생님 중 한 분은 대학원 졸업 후, 인천에서 다시 강원도로 또다시 대구로 이사를 가며 1년도 보장이 안 되는 수업을 위해 옮겨 다니셨다. 학력도 경력도 많은 한국어 강사들은 정말 많다. 면접을 기다리는 대기실이 아니더라도 많은 한국어 강사들이 늘 대기하고 있다. 고수익도 아닌 이 일을 하는 선생님들은 왜 이렇게 많아졌을까? 하지만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것이 현실임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어 강사가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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