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사소한 습관들

글을 쓰면 하루가 덜 흔들린다는 사실.

by 감정의 기록

어릴 때 나는 책을 참 좋아했다.

책을 펼치면 방 안의 시간은 잠시 멈추고,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마, 그 순간들이 글과 나를 천천히 이어주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는 일기 쓰기를 좋아했다.

'왕 일기' 도장이 찍힌 날이면,

이 작은 칭찬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이어져

나는 자연스레 문예부에 들었다.


글을 너무 잘 쓰고 싶은데 긴 글은 늘 어렵기만 했다.

대회를 나가면 산문을 신청했다가 긴 시간을 고민해도 몇 줄을 쓰지 못해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이 되선 결국 시 부분으로 바꿔 제출하곤 했다.

가끔 상을 받으면 '아, 그래도 나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글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버티듯 글을 썼다.

그 마음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모른다는 것도,

그저 좋아하는 마음이 의미가 된다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고3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계단에서 마주친 문예부 선생님께서 불쑥 말씀하셨다.

'너는 펜은 놓지 말아라.'

그냥 흘리듯 한마디 던지신 짧고 가벼운 말이었는데

나는 이 말이 이상하게 마음 깊숙이 내려앉아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졸업 후의 나는 오래 흔들렸다.

하고 싶은 일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도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잠시 멈춰 서 있었고,

그 시간 동안 펜도 자연스레 손에서 멀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글 앞에 앉아 보니 알겠다.

쓰는 순간 마음의 진동폭이 조금 줄어든다는 것을.


글은 거창한 시작도, 뚜렷한 목적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을 견디기 위해

내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괜찮다.'

'잘했다.'

'조금 흔들리면 어때, 잠시 쉬었다 가면 되지.'

그 말들을 글이 대신하고 있었다.


글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와 마주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싶지만 마음이 갈 곳을 잃은 날이 있다.

그런 날,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기분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해야 하는 말이 많지 않아도, 단 한 줄만 적어도, 하루가 조금은 덜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레 적어본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려도 괜찮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keyword
이전 10화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사소한 습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