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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May 15. 2024

+ 딱 항아리가 들어갈 정도의 여유로움

- 라라 소소 30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아니, 그냥 산책 아니고 마음이 넉넉한 산책을 오랜만에 했다.     


 사당역에서 광역버스를 타면 수원집에서 가까운 정류장까지 40분 정도가 걸린다. 버스 정류장과 아파트 사이에는 커다란 공연장이 있고 그 공연장 주위는 공원으로 되어 있다. 나무와 꽃과 풀과 잔디가 다양한 의자와 함께 어우러져 있어 편안한 공간이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소나무 아래로 토끼풀이 한가득이다. 하얀색 토끼풀 꽃도 아름답게 피어 있다. 하얀색 사이에 분홍빛 토끼풀 꽃도 종종 보인다. 손이 닿지 않은 저 멀리에는 자주색으로 더 진해진 토끼풀 꽃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버스에서 내려 이 공원을 조금 걷고,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가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또 천천히 걸어갔다.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공원에서 책을 좀 읽을까 했는데 입이 궁금하기도 하고 무언가 마시고 싶어서 일단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단지가 시작되는 경계에 있는 상가에 카페가 하나 생겼다. 오래전에 생겼지만,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다. 습관처럼 건너편에 있는 대용량 커피를 파는 카페나 익숙한 브랜드 카페에 주로 가곤 했다. 대용량 커피를 들고 마시며 그 작은 카페를 지나가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기를 여러 번. 깔끔하게 생겼다. 마카롱도 파나 보다. 일주일에 두 번 수원집을 오가는 나인데 스스로에게 동네 카페를 방문하는 이런 소소한 호사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 둥이 조카들이 수영장에 가는 날이니 시간은 넉넉하다. 밤보다는 낮이 길어졌다. 해가 어제보다 오늘 더 오래 뜬다. 바람이 조금 불기는 하지만 햇살도 따스하다.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호사를 부려보고 싶어 진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고 흐리멍덩하기까지 한데 새로운 커피를 발견하면 마셔보고 싶은 욕구가 불쑥 솟아오른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든 집에서 마시는 인스턴트커피든 내려 먹는 원두커피든 상관없는 욕구다. 새로운 원두를 발견할 때마다 다 사서 마셔볼 수는 없으니 원두커피는 빼야 하나.


 Khao Shong 카오숑. 태국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커피인데 다섯 가지 종류가 있고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THE ESSENCE OF THAI COFFEE 태국 커피의 정수라고 쓰여있는 걸 보자면 태국의 대표 커피 브랜드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맥심 느낌이려나. 뻔한 맛의 인스턴트 믹스 커피일 수도 있지만 직접 마셔본 게 아니니 어떨지 궁금했다. Espresso 에스프레소, Cappuccino 카푸치노, Condensed Milk Flavour 연유, Super rich, Mocha 모카. 이름만으로도 각자 어떤 향과 맛일지 예상이 되는데 Super rich는 잘 모르겠다. 엄청나게 부유하다는 뜻이니까 아무래도 풍부한 맛과 향을 가진 진한 라테가 아니지 싶다. 하루에 하나씩 맛을 보았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달면서도 진한, 그런 커피. 큰 손주를 돌봐주기 위해 일 년의 대부분을 싱가포르에서 지내시는 엄마 친구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보통은)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는 커피를 선물로 사 오신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워낙 유명한 Bacha Coffee 바샤 커피를 선물해 주셔서 새로운 맛을 보기도 했다. 상큼하면서도 진한 오렌지 향이 좋았던 기억도 있다. 선물 받은 싱가포르 커피 중 딱 마음에 들어서 다음에도 사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껴 마셨던 인스턴트커피가 있는데 카오숑의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가 그와 맛이 비슷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연유 맛 커피도 전에 여럿 마셔본 인스턴트커피 연유 맛에 비해 많이 달지 않아 괜찮았고, 슈퍼 리치는 평소에도 먹는 믹스 커피처럼 달달하니 특이한 점은 없었다. 아침에는 마지막 다섯 번째 모카를 마셨다. 커피의 향이 초코의 향에 묻히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내 입이 진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카페 모카의 초콜릿 향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핫초코를 마시는 걸 더 좋아하는 나다. 하지만, 어라, 이 모카는 괜찮은데? 그렇게 기분 좋게 한잔을 거의 다 마실 즈음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요즘 몸이 안 좋은 건지, 아무래도 평소와 다르게 카페인에 반응이 오나 보다.


 아침에 심장이 쿵쾅거렸던 생각이 떠올라 그 작은 동네 카페 근처까지 갔다가 소소한 호사는 나중으로 미루고 옆에 있는 가보지 않았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이 산책길이 나에게는 더욱이 소중한 호사가 되었음을 혼자 남은 밤이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멀리 보라색 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이리스다. 아침에 눈 뜨면 기분 좋아지라고 읽는 책에서 얼마 전에 아이리스를 보았다. 꽃말과 꽃에 대한 이야기가 아름다운 꽃 그림들과 함께 담긴 책이다. 아이리스는 생긴 모양 덕에 붓꽃이라고 불리는 듯하다. 책에서는 노란색 아이리스에 담긴 옛이야기가 나왔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 봤을 때는 거의 가 다 보라색 아이리스였다. 화단에도 대부분이 보라색 아이리스다. 아름답다. 활짝 펴서 몇몇 꽃잎은 아래로 추욱 늘어져 붓 같은 모습이다. 당장이라도 아름다운 보라색 그림이 그려질 것만 같아 기대감이 생긴다. 보라색 사이사이에 간혹 가다 한 송이씩 하얀색 아이리스가 있다. 보라중의 하양은 왠지 처연하면서도 슬프다. 노랑은 없었다.



 아이리스를 지나쳐 또 천천히 걸어간다. 불어오는 바람에 갑자기 거대하고 깊은 향이 나를 덮쳐 잠시 아찔해진다. 이건 무슨 향이지? 이렇게 깊을 수가. 향을 따라 조급하게 시선을 두리번거린다. 저 앞에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꽃들이 눈에 보인다. 길쭉하고 아담한 아이리스와는 다르게 소담하고 풍성하다. 활짝 핀 꽃들이 저기에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 꽃 이름이 뭐였더라. 잠시 고민하다가 활짝 핀 녀석 옆에 약간 앙다물어져 양손으로 공을 만든 모양으로 둥글게 모여있는 꽃잎을 보니 이름이 생각났다. 수줍은 모양의 꽃, 작약. 맞다 작약이다. 누군가 이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부케를 작약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활짝 핀 작약은 당당해 보였다. 그래서 이런 향이 퍼지나 보다. 익숙한 작약의 탐스러움에 반해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꽃이 활짝 피고 조금씩 지고 있는 계절이다. 초록빛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오빠네 아파트 단지는 잘 꾸며져 있다. 둥이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사를 왔으니 적어도 팔 년 이상은 된 아파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워낙 오래되어 단지 조성이라는 게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에 지어지는 아파트는 단지가 잘 조성되어 있다. 조경이 아파트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 단지는 지상으로는 차가 다니지 않아서 아이들이 마음 편히 뛰어놀 수 있고 어른들에게도 안전하다. 길을 건너지 않는 혹은 하나만 건너면 되는 생활반경 안에 모든 게 다 있다. 어린이집, 주민 생활 편의 시설, 마트, 놀이터, 스포츠 시설, 공원, 학교 등등. 동네 주민들은 아파트 안에만 있어도 불편함을 모르고 살 수 있다. 우리 둥이 조카들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수영장에 다니고,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길을 한 번만 건너면 바로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편리하고 안전한 테두리에서만 생활하다가 그 테두리 밖으로 나오면 혼란스럽지는 않을지 잠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길을 걷는다. 오솔길처럼 아파트 사이에는 나무가 많이 있다. 이쪽으로 가는 길과 저쪽으로 가는 길의 분위기는 다르다. 우뚝 솟은 아파트만 보이지 않는다면 공원이나 낮은 산을 산책하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걸어서인지 따스한 햇살 탓인지 그간 소홀했던 공간들에 눈이 머무르게 된다. 얇고 기다란 소나무 사이에는 커다란 항아리 같은 조형물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재질은 얇은 철. 녹슨 듯한 색의 철로 만들어져 주위를 흡수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커다란 항아리 안에 자연이 담겨 있다. 둥그런 항아리도 있고 기다란 항아리도 있는데, 아이는 물론 성인까지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다. 평소에 별거 아닌 듯 스쳐 지나가던 항아리가 오늘은 마음에 남아 있다. 딱 항아리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마음에 생겼나 보다. 여유로움.


 소나무 숲 맞은편에서 와글와글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축구장이 있다. 종종걸음으로 서두르는 작은 아이들도 있고, 소리치며 공을 열심히 차는 초등학생들도 있다. 몇 무리가 있었는데 어느 무리에도 그저 다가가기만 하면 함께 어울려서 놀 수 있을 것만 같다. 주 양육자인 둥이들의 할머니(우리 엄마)가 오랜 시간 고생이 많다. 아무리 에너지가 넘치는 할머니라도 양육은, 게다가 남아 쌍둥이의 양육은 더욱이 쉬운 게 아니다. 엄마는 괜찮다고 하지만 너무 힘드니까 이제는 둥이들 부모(오빠와 새언니)의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인데 서울에서도 이렇게 편안하게 아이들이 뛰놀 수 있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수원이, 둥이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있는 익숙한 이곳이, 아직은 어린 조카들이 자라기에는 조금 더 좋은 환경이라는 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을 하며 축구장을 지나치니 분수대도 보이고 물이 흐르는 인공 개울이 나온다. 아직은 한여름처럼 물이 철철 넘치는 게 아니지만 물의 흔적들 안으로 섬처럼 아늑한 휴식 공간이 존재한다. 공원의 피크닉 테이블처럼 의자도 있고 테이블도 있다. 여유로운 산책의 마무리는 독서가 최고다. 잠시 걷고 잠시 생각했으니 잠시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고요히 머무르기. 그 고요한 마음을 타인의 삶 속에 넣어 본다. 사실 추리소설을 읽는 중이었다. 피가 많이 튀거나 잔인하고 무서운 건 잘 보지도 잘 읽지도 못하는 편인데 심리를 다루거나 추리하는 건 좋아해서 종종 시도를 해본다. 지난밤에는 너무 무서워서 읽기를 멈추었다가 환한 낮에 산책의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을 읽는다. 앞의 사건은 무서웠는데 지금 읽는 사건은 어떻게 추리가 진행될지 흥미진진하다. 셜록 함즈(조영주 작가님의 <마지막 방화>의 주인공이자 강력 1팀 팀장인 함민의 별명)와 함께 이 사건만 해결하고 둥이 조카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아직은 밝지만 작은 미소를 띤 상현달이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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