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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May 08. 2024

인연, old & new

- 라라 소소 29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디 불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인데 불교의 업설과 인과응보설에 의한 것으로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녀 불문하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2024년 세계 인구 81억 명!!) 한국이든 어디든 어느 한 나라에서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 함께 있었기에 만남이 가능했을 테니까 말이다. 만나기만 하면 인연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한 번의 만남 뒤에는 이어지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로서든 아니든 계속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든가 상대가 맘에 들어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속을 정하거나 연락을 취해서 또 다른 만남이 진행되는 것. 그런 건 굉장한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머리로도 단순하지만은 않다. 복잡한 생각이 얽히고설켜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때는 조금 더 복잡하다. 눈치 싸움의 일종이라고 생각된다. 나에게 다가오는 친구가 있고 내가 다가가고 싶은 친구가 있을 텐데 이 둘이 반드시 일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까지도 계속 연락을 하고, 대화를 하고, 만나고 마음을 쓰는 일. 바로 인연을 만드는 일이다. 인연은 만드는 게 아니고 어떤 보이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고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성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연결이 된다고 하더라도 노력하고 알아보아야 인연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겠다. 친구를 만날 때도 이런 과정을 거치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더 섬세하고 복잡하지 않겠는가?     





친구 S가 남자친구와 양가에 인사를 드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얘기했다. 수많은 소개팅과 선을 보며 – 선을 본다고 해서, 책이나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양가 부모가 있고,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으며, 남녀가 정장을 입고 그렇게 만나는 건가 했는데, 요즘에는 조건을 공유하고 부모가 연결되어 있으면서 소개를 받으면 선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정작 남녀 본인들은 소개팅처럼 연락처를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며 약속을 잡는다고 했다. 부모나 가족이 속해 있다니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역시 인연을 만드는 일이란 멀고도 어려운 길이구나. - 정말로 많은 남자가 스쳐 지나갔는데 이제야 이렇게 미래를 함께 생각하게 되는 자기 남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만남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리라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축하할 일 일고 축복해야 할 일이다. 만남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데 결혼 이야기까지 나눌 남자를 만나는 건 더더욱 어려울 테니까.      


S는 남친(남자친구)이라는 말이 어색하다고 했다. 애인이라는 단어가 더 나은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사실 남친은 편견과 차별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맞을 거다. S와의 대화뿐 아니라 <돈이 아닌 것들을 파는 가게>라는 책의 한 이야기를 읽고서도 남친과 애인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성이 사랑하는 상대가 모두 남성이지는 않을 수도 있는 거다. 여성(동성) 일 수도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 사람들이 떳떳하게 애인을 애인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도 사회적인 편견,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남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친이라는 호칭이 붙는 게 당연하다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단어 사용은 중요하다. 당연하게, 혹은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한 거지만 상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은 다르다. 내 기준이 당연하고, 내 기준만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조심하고 주의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인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기적적으로 이어진 소중한 인연이고 나와의 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 간에 드린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계속 생각하고 인식 상태에 있으면 좋겠다. 조심과 주의에는 존중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존중하고 배려하고 무엇이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기. 그렇다고 너무 멀찍이 떨어져서 방관하듯이 대화하거나 지켜보기만 하지도 말기. 어느 정도의 거리와 정도를 유지하되 사랑으로 애정을 담아 대하기. 이게 관계의 핵심이자 인연을 이어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특히 상대가 아프거나 약해져 있을 때, 따뜻한 한마디나 말 한마디는 없더라도 옆에 있어 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거다. 얼마나 고맙고 눈물 나는 일인지 나는 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친절한 거라는 걸 알고 나서 혼자 상처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나 자신만이 상대에게 특별하길 원하는 게 우정에서도 사랑에서도 끝이 없는 욕심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상대를 끊어낼 이유는 없다. 나와 상대가 서로를 대하는, 혹은 인간을 대하는 온도에 차이가 있는 거라고 인정하면 된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질투와 상심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감정이다. 감정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 이 감정도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해주고 토닥여 주며 어느 정도는 다스릴 줄도 알아야 된다. 다스린다는 말의 어감에 약간은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느낀 감정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얘기하고 싶다. 거부하거나 싫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감정도 나의 일부이고 좋고 나쁜 게 아니라 그게 나를 이루는 수많은 부분 중의 하나이다. 싫다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따로 떼어 버릴 수 없는 그런 거.     



내향적인 성격은 차치하고 친구가 많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이를 나는 친구라고 일컬었다(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니든 동생이든 오빠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든 적게 나든 동갑이든 크게 상관없이 나는 모두를 친구라고 칭했다. 호칭이나 차별을 두는 거리감도 나에게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사라지기도 했다. 인연이기는 하지만 깊은 인연과 이어지는 인연이 있듯이 얕은 인연과 멀어지는 인연이 있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다. 내가 스스로 멀어지기를 자청하기도 한다. 나는 소중한데, 내가 상대에게 그리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더 깊이 상처받기를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 초기에 코로나에 걸리면 의무적으로 자가격리에 들어가야만 했다. 서서히 자가격리는 의무에서 권고로 바뀌었다. 나는 인연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확신도 줄어들고 있다.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나에게 상대가 기적에 가까운 인연이고 소중한 사람이듯이 나 자체로도 소중하고 살아있음이 기적에 가깝다는 걸 잊고 지냈다.      


나를 사랑하자. 상처를 인정하자. 그리고 맺어진 인연은 (맺어졌다 사그라진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소중하다는 걸 생각하며,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인식하고 하나씩 하나씩 쓰다듬도록 하자.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하자.      


나도 상대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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