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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n 08. 2022

그때 쓰지 못한 편지를 썼습니다

(백지 편지를 만회할 날이 왔습니다)

오래전 나는 아버지께 백지 편지를 드린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나누어 준 선생님은 봉투에는 집 주소를, 편지지에는 아버지께 드릴 편지를 쓰라고 했다. 아마도 어버이날이었을 것이다.


 봉투에 집 주소를 적은 나는 편지지를 눈앞에 두고는 좀처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당시 일기란 것도 쓰지 않던 때라 문자로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색하고 힘든 일이었다. 연필을 쥔 손에 힘만 들어갔지 정작 ‘아버지께’라는 통상적인 첫 문장도 쓸 수가 없었다.  

   

사각거리는 친구들의 편지 쓰는 소리를 들으며 정작 그 풍경 속에 끼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편지 쓰기가 처음인 나에게 한 반에 80명이 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조언은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흘러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빈 편지를 제출한 나는 며칠간 가슴이 콩닥거렸다. 빈 편지를 받으셨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구순을 앞두고 오래전 그 일이 떠올랐다. 마음에 걸렸던 그때 쓰지 못했던 글을 지금은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여전히 글쓰기를 두려워하지만 아버지의 구순을 맞아 더 이상 편지를 늦출 수는 없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내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정리하셨는데 “지나온 일을 생각해 보니 잘못한 것이 많더구나. 그것을 자세히 떠올려보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된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잠도 포기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인데 몸 약한 네가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글쓰기를 만류하셨다.      


아버지 말씀으로 오래전 쓰지 못한 편지에 대한 부담은 덜었지만 아버지께 드릴 마음의 골든타임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글쓰기를 시작하며 글이 갖는 치유의 힘과 관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경험할 수 있었다. 17명의 가족들에게 구순기념 가족문집을 제안한 것도 ‘각자가 쓰는 아버지에 대한 글이 90년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였다. 더불어 그때는 놓쳤지만 바로 지금이 아버지께 편지를 드릴 수 있는 골든타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가족문집이 나오고 신기한 듯이 책을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소박한 출판기념을 제안했다. 아버지 구순에 모이게 될 2세대 5명을 제외한 나머지 3세대 가족들은 책에 아버지의 사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출판기념의 의미를 살리자고 했다.     


책의 주인공 아버지에게는 가족들 각자에게 줄 책에 아버지 사인을 해주시라고 했다. 간단한 말씀 한마디에 아버지 이름을 적어 놓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와 달리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줄 책 한 권 한 권마다 편지글을 써 놓으셨다.     


이번 문집을 기획한 나에게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실망하지 말고 큰 희망, 영원한 희망을 간직하라”라고 격려해주셨다.     


할아버지가 보내오는 문자에 늘 정성껏 답 글을 달아주는 손자에게는 “너는 늘 내 곁에 있는 것 같구나. 기억하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지혜가 되려면 늘 훈련을 해야 한단다”라는 덕담을 써 주셨다.   

  

나는 책의 첫 장 한 페이지에 빽빽하게 써 놓은 아버지의 편지글과 사인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가족문집으로 오래전 아버지께 드리지 못한 편지를 쓰고 거기에 답장을 받은 셈이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글을 보니 가족들에게 편지글을 쓰시기 위해 고개를 숙이셨을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버지는 사인을 하고 글을 쓰기 위해 문집을 펼치고 각자의 축하 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펜에 꾹꾹 힘을 주어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씨를 쓰셨을 것이다. 손 글씨가 보기 힘든 요즘에 아버지의 필체가 정답게 와닿았다. 직접 쓴 손 글씨만큼 확실한 감정 전달이 또 있겠는가?      


아버지 세대는 부모 자식 간에 표현이 많지 않았다. 그냥 덤덤하게 세월을 살아내셨다. 그때그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아버지도 글로 전해 주셨다. 2세대, 3세대 14명이 받은 손 편지와 사인이 든 책은 각자의 가보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14명의 가족에게 주는 편지의 격려는 다르지만 모두에게 주는 공통된 말씀이 있다.

‘기억과 훈련’이다. 


각자가 적용할 부분에서 꽤나 의미가 넓은 말이지만 ‘삶의 좋은 것들을 잘 기억하고 습관이 되도록 훈련하라’는 말씀이다. 당신이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오셨기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아버지가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기억과 훈련’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느끼며 아버지의 90년 삶이 마음에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 삶의 무기였던 ‘기억과 훈련’이 우리들 삶의 중심이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손 편지의 격려말씀을 펼칠 때마다 우리의 삶을 다시금 풍성하게 회복시키고 잘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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