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날이 춥습니다. 이맘때 독감이 걸린다고 하죠. 아직 멀쩡하지만 걸어다니면 힘이 빠지는 것이 확실히 건강을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맑은 국물보다는 적당히 걸쭉한 감이 있는, 뭐가 많이 고아지고 첨가된 국물이 먹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어제처럼 다소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어탕 국물을 먹고 싶지도, 밀가루를 먹고 싶지도 않습니다. 스프처럼 무난하게 호록호록 떠먹을 수 있을 만한 걸 생각하다 속에서 '구루룩' 소리가 들려옵니다. 미역국이 생각 난 거죠.
영양 가득, 미역국
미역국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무조건 먹은 음식일겁니다. 흔히 생일날에 미역국을 먹죠. 특히 미역국은 산모들이 많이 먹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미역은 피를 맑게 해주고 혈액순환과 붓기를 가라앉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출산 후 자궁수축과 지혈작용에 효능이 있으며 미역의 요오드 성분이 젖분비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미역국을 먹은 모체의 젖을 아이가 먹으니 아이도 미역국을 먹는 셈이죠.
미역국 하니 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대사가 생각납니다. 드라마 속 이름 등은 전부 허구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기에, 드라마 속 왕은 '광해'라고 보면 됩니다. 왕은 약에 취해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결국 궁 밖 동굴로 옮겨집니다. 자신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신하가 조촐한 상을 마련합니다. 상 위의 미역국을 보고 왕은 '자신은 어미의 젖을 먹지 못해 이 해조탕(미역국)을 마시고 컸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 김씨는 출산 2년 후 숨을 거뒀습니다.
갑자기 드라마<산후조리원>도 생각납니다. 아이에게 좋은 젖을 주기 위해 슴슴한 미역국만 먹는 조리원 산모들. 젖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애만 건강하면 되었지. 젖 준다고 다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아니고, 요즘 좋은 분유도 많습니다. 저도 젖 양껏 먹지는 못해도 건강하고 나름 똑똑하게 잘만 자랐는걸요. 저보다 젖을 더 못 먹은 제 동생은 우리 집에서 최강체입니다. 적토마입니다. 적토마가 뭐야, 불곰을 능가하는 걸요.
무조건 크게 낳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는 게 제일이다.
이상 뱃속에서 너무 커서 고생을 심하게 한 엄마의 말이었습니다.
육지와 바다의 만남
원래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맛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거든요. 그냥 먹을만하니까 먹는거지, 생각했었죠. 미역국이 갑자기 맛있어진 것은 김치찌개가 맛있어 진 것과 비슷한 시기일겁니다. 사실 돌도 삭힐 나이 중학교 즈음 뭐가 안 맛있겠냐만은, 그 역사적인 날은 뭔가 좀 달랐습니다. 미역이 먹기 싫어 줄기부터 천천히 씹었었는데, 그 날은 부드럽게 넘어가는 겁니다. 씹는 식감도 챡챡, 적당히 씹혔고요. 국물은 구수했습니다. 비법은 육지와 바다의 만남에 있었죠.
우선 참기름 조금 넣어 소고기를 볶습니다. 간장도 넣고, 말린 북어도 넣고, 불린 미역을 가위로 잘라 넣습니다. 조각이 너무 크면 입에 넣기 귀찮아집니다. 미역은 너무 많이 불리면 안됩니다. 당신의 가족이 대식구가 아닌 이상 항금(많이) 집어 불리면 안됩니다. 당신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여기다 밥 비벼먹고 싶다, 생각이 들면 다 볶인 겁니다. 거기에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냉동실에서 들깨가루를 꺼냅니다. 한 두스푼 넣어주고 뚜껑을 살짝 열어둔 채로 계속 끊입니다. 이때 뚜껑을 완전히 닫으면 안됩니다. 들깨를 넣으면 부글부글 끓어 쉽게 넘치거든요. 적당히 열어둬야 합니다. 그리고 넘치지 않게 앞에 지키고 있으면 됩니다. 미역국 끓이는 게 뭐 이리 귀찮냐고요? 한 입 먹어보고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그 말은 입 안에서 사라질겁니다.
북어에서 우러난 맛이 국물의 깊은 맛을 더해줍니다. 한참 푹 끓여진 탓에 미역 줄기부분도 흐물흐물해지고, 들깨때문에 고소하고 구수하고 적당한 농도의 국물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소고기. 소고기를 넣었는데 맛이 없을리가 있나요? 육지와 바다의 만남은 미역국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해치우게 만듭니다. 미역국의 미역이 좋아서 막 퍼먹는 사람이 된다니까요.
다양한 기출문제 변형
미역국을 밥이랑만 먹지는 않습니다. 국수를 넣어먹기도 하죠. 올해 여름 강원도로 지인들과 놀러갔을 때 폭우를 만났습니다. 카누를 타고 놀 때는 재밌었지만 점점 식어가는 몸에 다들 덜덜 떨었죠. 급하게 이마트에 가서 비비고 미역국과 칼국수 면을 샀습니다. 미역국을 끓여 칼국수 밀가루를 털어내고 투하. 곧이어 걸쭉한 미역국국수가 완성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짭고 너무 걸쭉해 실패작이라 생각했으나 지인들은 모두 맛있게 먹어줬습니다. 시장이 반찬이었겠죠.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었습니다.
국수 말고 수제비를 넣어 먹어도 맛있습니다. 손으로 뜯어 얇게 먹는 수제비도 맛있지만, 저는 미역국에 새알심을 넣어먹는 것이 익숙합니다. 외갓집에서 얻어온 찹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섞어 익반죽을 합니다. 반죽이 되면 적당한 크기로 뜯어 손으로 동글동글 굴려줍니다.엄마는 두개를 한꺼번에 굴려도 동그랗게 잘 굴려지는데 내가 하면 어딘가 뾰족한, 코코넛 모양이 됩니다. 열심히 하다 곧 단념합니다. 내 손이 야물딱지지 못해서 그러겠거니, 어차피 삶으면 누구건지 모를테다. 그렇게 위로하며 식탁에 지저분하게떨어진 쌀가루를 쓸어 버립니다.
편식을 하던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미역국에 밥을 말아주면 잘 먹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일요일 아침 '딩동댕 유치원'과 '번개맨'을 봐야하는데 엄마가 못 보게 한 것을요. 안 먹는다고 투정을 부렸거든요. 다 먹기 전에는 볼 생각하지마! 하고 엄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좀 약아빠졌으면 몇 입 먹는 시늉하다가 몰래 거실에 가서 봐도 되었을텐데(티비가 거실에 켜져있었거든요) 그때는 순진해서 울면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서 울죠.
미역국은 생일자가 자기 생일을 기념하며 먹지만 임신과 출산, 양육으로 고생한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않으며 경의과 감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위키백과는 서술해놨군요. 내가 태어난 날 나도 세상에 나오려고 용 쓰느라 고생했지만 엄마도 고생했죠. 머리가 커서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 겨우겨우 낳았으니, 고생 많이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