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의 융프라우요흐

유럽여행기 19

by 윤음


SNS에서 스위스에 가면 찍어야 할 영상 중 하나로 산악열차 풍경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기차를 타고 평화롭게 즐기는 등반이라니 어찌나 안성맞춤인지! 고민 없이 단연 가봐야 할 장소가 되어 융프라우요흐에서 스위스 깃발과 함께 찍는 인증샷이란 어쩐지 꼭 찍어야 할 것만 같은 챌린지처럼 느껴졌다. 관광객의 가벼운 마음가짐과 사진으로 채워지고 있는 나의 비뚠 욕심은 나에게 두 가지를 간과하게 했다. 바로,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으로 이루어진 빙하지대라는 것이고, 융프라우요흐는 Top of Europe의 수식어가 붙는 해발 3,454m의 높이의 산이라는 것.

8월의 지독했던 더위 속에서 감행한 여행이어서 그런지 유독 선선함에 목말라있었다. 아무리 고도가 높아 춥더라도 한여름이 아니던가. 추워봤자 견딜만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등산을 해본 기억은 희미하며, 따라서 고도에 대한 이해는 예전 지리 시간에 배웠던 기억만 어렴풋하다. 자연스레 고산병에 대해서도 듣기만 들었지 건강한 편인 나에게 먼 이야기라고 여겼다. 이 두 가지는 내가 얼마나 낙관적이고 대비에 철저하지 못한 사람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역시 여행은 나 자신을 알게 되는 최고의 방법인 것이다.


이른 아침 산악열차 티켓을 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초콜릿을 사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역 앞 슈퍼에서 초콜릿을 두어 개 사서 열차에 올랐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던 터라 큼직한 크기가 조금 낯설었지만 다들 챙기라고 하니 가볍게 집었는데, 정말이지 이 초콜릿이 없었다면... 나는 들것에 실려서 산을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스위스 물가 무섭긴 정말 무서웠는데 열차 티켓값만 25만원 정도였다.




열차의 창문도 열 수 있어서 시원한 공기와 풍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햇살과 파아란 하늘과 푸르른 나무들. 그림 같은 풍경을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에 맞춰 지나갔다. 스위스는 사진을 찍으면 유독 선명하게 나온다. 화질에 맞춰 눈도 세척되는 느낌이랄까. 열차를 갈아타고 뮈렌이란 마을에 갔다. 산 중턱의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스위스의 한적한 동네란 이런 것이구나. 딱히 들어가서 볼 상점이나 카페가 없는데도 단지 마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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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렌의 풍경


다시 열차에 올라 융프라우요흐를 향해 갔다. 창밖의 풍경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싶으면서도 이때부터 살짝 멀미가 나는지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드디어 도착한 융프라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다른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이.. 건... 틀림없는 한기였다. 길을 찾기 위해 계단을 한층 올랐을 뿐인데 숨이 가쁘고 어지러웠다. 갑자기 슬로모션처럼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허겁지겁 초콜릿을 뜯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초콜릿을 씹다 보면 괜찮아지는 것도 신기했다. 어지러움도 이겨냈으니 한기도 돌파할 수 있을 거라 여기고 깃발을 찾아 나섰는데.. 뷰포인트가 여기저기 구불구불 있어 덜덜 떨며 길을 헤맸다. 올라와보니 사람들은 너도나도 패딩을 입고 있었다. 눈 덮인 산과 얼음 동굴로 이루어진 곳! 그곳이 바로 융프라우요흐였건만 어떤 자만과 방심으로 여름 옷가지들을 입고 온 거지! 드디어 깃발을 찾았는데 사진을 위해 줄이 길게 늘어졌다. 일행들과 발을 동동 구르며 펭귄들처럼 팔을 붙이고 머리를 모았다. 덜덜 떨고 머리가 찌릿한 추위에도 사진을 찍기 위해 참고 견디는 우리를 보며 웃음이 났다. 발의 감각을 지우며 고도 3000m의 공기를 뼈저리게 느꼈다. 내리쬐는 태양과는 별개로 눈 덮여있는 험준한 산이 나를 째려보는 듯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보니 인증샷의 폐해를 느끼는 동시에 바보 같기도 하고 우스우면서도 등골이 오싹했던 추위가 감각으로 남았다. 고생한 것도 바보 같았던 것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도 결국 웃어넘기고 돌아보게 하는 것이 여행의 힘인가 보다. 언제나 여행 온 듯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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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먹는 신라면 / 생명 초콜릿



사진을 찍고 내려와 신라면 컵라면을 먹었다. (산악열차 VIP 이용권 제공내역) 이 이질적인 세계에 신라면이 포함되는 티켓이라니. 추위에 떨다가 마신 라면 국물은... 마치 생명수.. 아니 생명면..? 추위에서 탈출하기 위해 빠르게 먹고 곧장 열차를 탔다. 열차에 오른 것만으로 몸이 녹았다. 그리고는 하산하는 열차에서 더욱 고산병이 위험함을 느꼈는데,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욱 어지럽고 혼미했다. 점점 따듯해지지만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계속 초콜릿을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조금씩 안정이 되면서 결국 양손바닥만큼의 초콜릿을 다 먹고서야 말 그대로 열차에 '실려'올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역에 내리고 나서야 어지러움증이 멈췄다. 저녁때 숙소 앞 전망대에 오르자는 약속에도 질려버려서 이후 일정은 뒤로하고 잠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술을 잔뜩 먹고 누운 듯 세상이 뱅글뱅글 돌았다. 그전에 감각이 없던 것들에 대한 감각을 진하게 새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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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 클리어!


아직까지도 융프라우요흐를 떠올리면 머리가 쭈뼛서는 추위와 살살 어지러운 감각과 가쁜 숨과 선명한 풍경, 입에서는 단 초콜릿의 맛이 느껴진다. 고생은 좀 했지만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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