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음 May 01. 2024

기억하고 싶은 마음

직업선택의 이유

 나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할지 모르는 말을 해주는 사람. 나는 직업상담사이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사실 남들 눈에 멀쩡하게 잘 다니고 있었을 뿐, 별로 그렇지 않았기에 치열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나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부여잡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질문했다. 그렇게 처음 글을 꺼내 놓고 필명을 마음으로 썼을 만큼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자고, 결국 마음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내린 결정이다. 마음으로 쓰고, 마음으로 지내고, 마음으로 대하자고.

 하지만, 마음은 아무래도 연약하고 말랑한 성질을 가진 것인지 내어놓고 살수록 자주 생채기가나 따가웠다. 마음에만 집중하자니, 본능에 치우친 듯이 느껴져 종종 어리숙하게 느껴졌고, 마음을 따라가는 일이 바보 같은 일인가 까지 생각이 들었다. 각박한 현실에 철없고 허황된 것인가 선택해 놓고도 여러 번을 곱씹었다. 


 과학이나 심리학 서적들을 보면, 이 마음이란 것은 얼마나 간사하고 어리석은지. 애초에 뇌는 인간이 '잘 사는 것'엔 관심이 없고 '생존'하기 위해 발달되었다고 한다. 불안과 의심, 편향 등 다양한 방어기제와 핑계로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설계되었다. 편한 것을 궁리하고 머물러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하고 싶은 일은 발가벗겨 보면, 이기적인 나와 마주해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마음이란 것을 마냥 믿어도 되는 걸까. 마음을 쓴다는 것이,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이 과연 나를 잘 살게 하는 길일까. 지금껏 가둬온 녀석이 제멋대로 날뛰게 두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인 걸까. 오히려 반동으로 튕겨져 나가거나 질질 끌려 다니다가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건 아닐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잘 해내야 좀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다가 결국 오은영 박사님을 만났다. 그녀에게 솔루션을 구한 것이 아니고, 직접 만났다는 말도 아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마음, 생각, 행동은 각각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마음은 맞고 틀리고 가 없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대신 그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다고. 어떤 마음이 든 것은 수긍하면 될 영역이고 그에 따른 생각은 또 저마다 달라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말.

 내 발가벗은 마음은 그럴 수 있는데 이 애를 입히고 씻기고 잘 돌보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구나라고 조금 배웠다. 그 길로 가고 싶니? 조금 험한 길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운동화를 신자. 헤엄이 치고 싶어? 수영복을 입을까? 잠시 쉬어가겠어? 그러면 담요를 깔아줄게, 하는 것. 내 마음을 돌보는 일. 마음이 섣부르게 길을 나서기 전에 생각의 옷을 입고 행동의 신발을 신는 것. 결국 마음이 나아가기 위해, 마음이 잘 걷고 뛰고 여행할 수 있도록.


 이렇듯 주춤주춤 흔들리지만, 일에 만족과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갈 길이 멀고 계속해서 배우고, 스스로도 되물어 나름의 답을 쌓아가야만 누군가에게 나는 그랬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스럽게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비추는 일. 그 한 치의 앞을 비추기 위해 계속해 나를 넓혀야 하는 일.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전 반차를 내고 피부과에 갔다. 최근 두드러기가 생겨 점점 몸 전체로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도 사람이 많은 곳이라 기다릴 걸 알고 병원을 찾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 찾으시는 오래된 동네 피부과였다. 넉넉히 대기 시간을 예상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50분이나 기다렸는데도 영 호명될 기색이 없었다. 참지 못한 사람들이 한둘씩 자기 차례를 확인하며 1시간을 기다렸다, 언제까지 기다리냐 물었다. 아직도 9번째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아저씨는 그럼 12시 전에는 불러주냐, 잠시 밥을 먹고 와도 되느냐, 전화를 좀 줄 수 있느냐 물었다.

 간호사는 무엇하나 명쾌하게 답해주는 것 없이 딱 잘라 말했다. 언제 호명될지 모른다, 전화는 못 드린다, 전화를 걸지 못한다. 한 사람에게만 편의를 제공하면 안 될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일인가 싶었다. 어플로 간단히 접수도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는 여간 현대 문명과 타협하지 않는 병원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와서 불쾌하진 않았으나 대기 순번이 아직도 5번째라는 얘길 듣곤 출근시간까지는 진료받지 못하겠구나 싶어 접수를 취소하고 나왔다. 병원을 뒤돌아 나오니 왜 아니었을까, 허탈한 시간에 금세 호흡이 기파지고 입모양이 뒤틀렸다.

 출근 후에 잠시 짬을 내어 회사 근처 피부과를 찾았다. 요즘은 미용을 위한 진료만 보는 곳들도 많으니 먼저 전화해 확인을 했다. 와도 된다기에 바로 찾아갔고 대기 없이 진료실에 들어갔다. 원래 피부병이라는 것이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워 의사는 갑자기 증상이 생긴 것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이것저것 물었다. 최근 달라진 환경, 제품, 식사, 반려견, 날씨나 스트레스까지도 무엇이든 원인이 될 수 있어 곰곰이 내 일상의 변화를 살폈다. 그중 의심 가는 것은 있었으나 역시 명확하진 않아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아 나왔다.

 그날 평소와 같은 퇴근길, 아침부터 기다림에 초조함을 겪고 업무로 지쳤어도 평소보다 썩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럴까 들여다보니 의사 선생님이 떠올랐다. 아, 누군가가 일상을 세심하게 바라봐주는 것만으로 우린 치유될 수 있구나. 

 사소해 보이는 일상을 살피는 일은 과연 치유의 시작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나를 찾은 이들의 안녕에 관심가지며 연약한 근거더라도 분명 괜찮을 것이라 말해주는 사람. 어딘가에서, 혹은 스스로 작아졌어도 함께하는 시간으로 그들의 몸의 어딘가에 편안함이 깃들기를 바라는 사람. 기억하길 바란다. 어떤 마음으로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이 마음을. 

작가의 이전글 축사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