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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Nov 27. 2021

그냥 비 좀 맞게 해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물건

가장 필요 없는 물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우산'이라고 답한다.

살면서 이 질문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 대답을 하는 경우는 꽤 많다. 옆 사람이 내게 우산을 씌워줄 때가 그렇다. 처음엔 내가 깜박하고 우산을 안 가져왔나 보다 생각들 한다.

"전 우산을 안 써요."

한 번에 수긍하는 사람은 없다. 왜 비를 맞는다는 건지. 산성비가 몸에 얼마나 안 좋은데. 별난 사람이군.

내미는 우산을 거절하려면 설명이 길어진다. 나는 비를 맞는 것을 즐기진 않지만 비라는 게 우산으로 막아야 할 정도로 성가시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비 한 방울 떨어지면 대단한 기후재앙을 만난 것처럼 야단법석 우산을 찾는 모습이 참 별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햇볕에 몸을 데우고 바람에 식히며, 촉촉한 비에는 적셔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은 일부러라도 조금 적시고 와야지 하는 의무감도 든다. 퍼붓는 비는? 그건 피하라는 신호이지 우산으로 막으라고 내리는 건 아닐 게다. 폭우엔 안 나가는 게 상책이다.


나와 같은 시기에 싱가포르에서 살았던 P군은 생각이 다르다. 싱가포르로 여행 간다는 J와 셋이서 식사하는 자리였다. P는 J에게 우산을 꼭 챙기라고 조언했다. 싱가포르는 하루 한번 꼭 비가 쏟아지니까 우산이 필수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싱가포르에서 우산만큼 소용없는 물건을 떠올리기 어렵다. 실제로 싱가포르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우산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싱가포르의 비는 하루 한두 번 내리는 열대성 스콜인데, 대개 삼사십 분 내 그친다. 이 비는 하늘을 쩍쩍 가르는 뇌우와 함께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우산이 소용없다. 똑같은 공간에 살았는데, 어떻게 '우산'에 대해 이렇게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 어쩌면 P의 충고가 단기 여행객에겐 더 맞춤형 인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한국인에게 우산이란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니까.


비가 내리는 데 우산을 쓰지 않으면 불편한 점이 많다. 맞는 빗방울이 불편한 게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특히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 다 같이 몰려나와 식당으로 향할 때 그리고 퇴근시간이 그렇다. 눈을 게슴츠레 떠보아도 빗줄기를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비에도,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일본인 '비사이로막가'씨가 아니어도 충분히 피해 다닐 수 있을 만큼 가늘고 성기게 오는 실비에도 모두가 예외 없이 우산을 쓰고 있다. 그 대열에서 우산을 쓰지 않으면 눈에 확 띈다. 옆 동료가 도와준다고 우산을 씌워준다. 괜찮다고 말해도, 괜찮으니 함께 쓰잖다. 나의 우산철학을 또 설명하기란 너무 장황하고 귀찮은 일이어서, 언젠가부턴 동료들과 같이 외출할 땐 나도 우산을 쓴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산을 든다. 이런 쓸모없는 벌서기에 나의 악력과 이두박근을 사용해가며 촉촉한 비와 단절하는 것이 몹시 자괴감에 빠지게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요즘 마스크가 그러하다. 물론 우산과 마스크는 다르다. 우산을 안 쓴다고 주변에 피해를 주진 않지만 마스크는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으니 같이 놓고 볼 것은 아니다. 그래도 좀 유난스럽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새벽 운동 나와 반경 50m 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아저씨, 차 안 홀로 운전하면서도 이젠 습관이 되어 마스크를 벗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자꾸 우산이 떠올랐다. 써야 할 때와 벗어야 할 때를 가리는 게 애매하고, 귀찮고, 보는 눈이 따가워 그냥 쓰는 쪽을 택한다. 성숙한 시민(?)으로서 욕을 먹을 순 없으니까. 나는 TV에서든 어느 누가 마스크 잘 쓰는 걸로 대한민국의 국민성을 자랑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다. 우리 문화, 역사와 전통에서 자랑할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이런 감시와 통제의 관성을 자랑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적이 없는 곳에 신호등 설치하고 그 앞에서 신호 잘 지키는 게 자랑할 일인지 모르겠다. 애당초 그런 기계장치에 우리의 자율성을 내맡긴 것이 문제라는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2년간 맑은 날이 없었다. 비에 조금도 젖지 않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우산을 쓰고 다녔다. 맑은 날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맞을 만한 비는 맞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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