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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Sep 28. 2021

신호등이 싫은 이유

일단정지하고 생각합시다.

여러 선진국과 개도국을 살아도보고 다녀도 봤지만 제일 살기 좋은 곳은 한국이란 생각엔 흔들림이 없다. 말이 잘 통한다는 것 외에도 수많은 장점들이 있다. 안방에서 골라먹는 배달앱, 신속하고 투명한 교환환불 시스템, 편리한 대중교통, 친절한 식당서비스..(프랑스 레스토랑에선 손님이 왕이라고 착각하면 마상입기 십상, 미국에선 좋은 서비스에 묵직한 팁이 국룰이다.)

백이면 백 다 한국이 좋을 수는 없는 법. 서방 선진국에서 부러운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내겐 '일단정지(stop sign)' 신호다. 길과 길이 만나는 교차로나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 주로 서있는 이 빨간표지판은 우리가 아는 디지털 신호등과는 다르다. 그냥 빨간색 바탕에 Stop이라고 쓰인 볼품없는 막대기다. '일단정지' 앞에선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 반대편 차선에 차가 있든 없든,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는 든 일단 서고 본다. 정차 후 주위를 살펴 차나 보행자가 없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신호등 색깔이 바뀌어 지나가는 게 아니라, 운전자의 주관적 인식과 판단으로 통행을 재개하는 것이다. 모든 도로가 이런 것은 아니다. 시내 중심부 큰 도로나 타운을 잇는 간선도로는 디지털 신호등이 작동한다. 주택가, 타운 내에서만 '일단정지' 체계를 따른다.


내가 사는 세종시엔 신호등이 참 많다. 빼곡한 아파트, 사이사이 들어선 학교, 영유아 아동들이 많아 신호등을 촘촘히 박아놨다. 보행자 수나 차량 통행량과는 상관없이 삼거리엔 무조건 신호등이 서있다. 정부청사를 빠져나와 메인도로로 나가려면 한 50미터 단위로 신호등을 총 열개쯤 만나는데, 차량도 보행자도 없는 텅 빈 거리에서 매 신호등마다 2~3분을 기다리다 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그나마 요즘은 신호체계가 스마트해져 실시간 교통량을 반영해 신호가 바뀌기도 하고, 어떤 구간은 회전교차로로 교체되어 불필요한 기다림이 많이 줄긴 했다.


오해 마시라. 난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참아야 할 때 참는 것과 기계에 의해 강요받는 인내는 다르다. 내가 신호등을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사고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그간 안타까운 사고가 참 많았다. 동네, 학교 주변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적잖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가 나면 의례 신호등과 과속카메라가 설치된다. 신호등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사고처럼 되어버린다. 그런 사고들이 이슈화되면서 동네 곳곳에 신호등과 과속카메라가 참 많이도 설치됐다. 신호등을 설치하면 당장 사고가 줄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디지털 신호에 익숙해지면 운전습관은 개선되지 않는다.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 시야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이 디지털 장치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기계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신호등의 색깔 변화에 집중하며 순응하는 운전자는 착한 운전자, 그렇지 않으면 나쁜 운전자가 된다.


신호등을 어기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다. 왜 그런 억지 같은 신호등을 만들어서 "어기면 나쁜 놈"이라는 딱지를 붙여야만 할까.. '일단정지'가 있는 나라에선 민식이의 죽음처럼 참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거의 없다. 무조건 정지하고 눈을 좌우로 살피고 다시 출발이다. 이런 식으로 조심하면 큰 사고 날 일이 없다. 교통흐름도 몇 초만 끊길 뿐 신호등이 가라고 할 때까지 몇 분씩 브레이크를 밟고 있을 이유가 없다.


요즘 날씨가 참 좋다. 출퇴근 시 집에 차를 두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는 유효기간이 짧기 때문에 가능한 야외 시간을 많이 누리는 것이 현명하다.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충분히 만끽하진 못한다. 높고 푸른 하늘을 눈에 담을 수 있지만, 청량한 가을 공기를 입과 코로 들이마시는 것은 입구를 틀어막은 마스크 때문에 힘들다. 자전거를 탈 때도 약속이나 한 듯이 마스크를 착용한다. 인기척이 드문 새벽 운동 때도 마스크는 찰싹 달라붙어있다. 힘들고 숨차면 코를 꺼내놓을 때도 있다. 코를 꺼내놓은 마스크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걸치고 있는 건 주변 시선이 따가워서다. 이 시국에 어디에서고 마스크를 벗으면 '나쁜 놈'이 되기 때문이다. 감염사고를 예방하는 목적보다는 야외 곳곳에 세워진 "마스크 신호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안쓰럽다. 식당이나 카페에선 마스크를 벗고 맘껏 담소를 나눈다. 음식을 입에 넣을 때 잠깐 벗으라고 허용해 준 것일 텐데, 서슴지 않고 떠든다. '마스크 신호등'이 녹색이기 때문이다. 녹색만 보고 생각 없이 쌩쌩 달리는 것이다. 신호등만 지키면 되니까. 마스크를 쓰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방역에 느슨해지자는 것도 아니다. 신호등 그만 쳐다보고 우리의 오감과 판단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고 가야 할 때 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사고는 줄고 통행은 더 빨라진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가능하다. 일단정지 신호의 도움으로 충분하다. 길거리 외진 곳에서도 예외 없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우리 모습을 우수한 국민성으로 포장하는 건 좀 어폐가 있다. 집단적 결정에 순응하는 것, 나쁜 놈으로 손가락질받기 싫어 억지로 참는 것, "나는 참는데 넌 왜 못 참아"를 강요하는 문화를 우수성으로 이해한다면 체제를 뒤집어엎은 프랑스 대혁명은 아주 열등한 행동이었다고 해야 할까.


자전거를 타고 금강대교를 지날 때 탁 트인 다리 위에서 나는 과감히 신호를 어기고 마스크를 벗는다. 이 순간이 아니면 또 언제 마셔보나 하며 진공청소기처럼 공기를 빨아들인다. 그러다 저 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 한대가 보이면 냉큼 마스크를 끌어올린다. 그게 감염을 막기 위한 본능적 행위인지, 아님 그저 신호등을 지키는 행위인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맞이하게 될 위드코로나는 '신호등'이 아닌 '일단정지'로 작동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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