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랑바쌈 Dec 30. 2021

지옥 가겠지

사랑만으로도 충분해

자기소개 릴레이에서 내 순서가 왔다. 추천받은 직원이 자기소개 메일을 써서 전 직원들에게 보내고 다음 사람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올 1월부터 시작해서 매달 한 명씩 지목당하는데 12월에 내 차례가 온 것이다. 여러 문답으로 구성된 소개글에서 나는 '가장 추천하고픈 책'으로 Bible을 꼽았다. 이유를 이렇게 덧붙였다.


"남녀 간의 불타는 사랑을 에로스, 타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랑(자식을 위해 몸을 던지는 엄마의 사랑)을 필레오라고 합니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 자기 자식을 죽여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인데요. 사랑 이야기는 허다하지만 아가페의 사랑은 성경에서 말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소개할 때 즐겨 사용하는 표현방식이다. 구원, 영생, 천국 이런 것은 너무 멀리 느껴진다. 다가가기 어렵다. 사랑으로 접근하면 쉽게 와닿는다. 누구나 사랑을 하니까. 미혼자들도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필레오를 경험하게 되면 아가페의 위대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으~악"

원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괴성을 질렀다.

열이 받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이다.

등에 맨 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바닥에 철퍼덕 드러누워 핸드폰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원아 왜? 무슨 일 있어?"

"잠시만. 검색 좀 해보고"

원이가 짜증 충만한 목소리로 구글 검색창에 쓴 것은..

<예수님 안 믿어도 천국 갈 수 있나요?>


절친 지호와의 말다툼이 있었고 그 내막은 이랬다.

- 원이: 지호야, 예수님 믿어야 천국가

- 지호: 아냐 예수님 안 믿어도 천국 갈 수 있어

- 원이: 아냐 못 가

- 지호: 그럼 예수님 안 믿으면 어디 가는데?

- 원이: 지옥 가겠지..

이 말을 들은 지호는 몹시 화를 내며 집으로 가버렸단다.

친구 말을 반박하려고 씩씩거리며 검색창을 두드리는 원이의 순수함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우리집에서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래 너다 너.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았다. 제목 그대로 '지옥'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소재로 다룬 내용이다.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지옥 간다는 협박에 순종을 강요당하고 사이비에 빠진다. 성경에 지옥에 대한 묘사가 몇 차례 나오긴 하지만 지옥이 성경의 핵심은 아니다. 성경은 생명, 빛, 사랑으로 오신 메시아의 이야기이며, 사망, 어둠, 저주 같은 것은 그림자일 뿐이다.


서울역 앞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팻말을 들고 선 사람을 지나칠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빚진 자의 마음이다. 미안함이다. 생업을 제쳐두고 전도에 인생을 바치는 그들의 열정에 숙연해진다. 다른 하나의 감정은 아쉬움이다. 복음이 꼭 저렇게 무서워야 하는지. 협박 같은 메시지 속에서 사람들이 아가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정도로 바꾸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지나친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보다는 미안함이 더 크다. 나는 신념을 행동으로 승화시킬 용기가 없으니까. 말과 생각은 행동 앞에 패자다. 패자는 말이 없다.


억울해하는 원이를 향해

빚진 자의 마음으로

필레오의 사랑을 가득 담아 얘기해주었다.

"원아,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가는 건 맞아.

근데 지옥 얘기까진 굳이 안 해도 괜찮아.

예수님은 사랑이니까 그걸로 충분해."

작가의 이전글 늙어가는 게 좋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