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네 인생을 살아라
비교할 수 없는 오직 너만의 인생
J에게,
얼마 전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어 이제 그 세 모녀가 언제 적 세 모녀를 말하는지도 헷갈린다. OECD 자살률 1위.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란다. 자살만이 아니다. 결혼을 안 하는 것도 돈이 없어서라지. 세계 10위권 경제, 국민소득 3만 5천 불의 선진국이 돈이 없어 자살하고, 돈이 없어 결혼을 안 하고, 돈이 없어 애를 안 낳는다. 대체 돈은 얼마나 있어야 되니? '남 부끄럽지 않게'라는 네 대답이 참 서글프구나. 백만 원에 대학 강당 빌려 식 올리고 월세 30만 원 원룸에서 소꿉장난처럼 신혼을 시작했지만 난 한 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한 대학생이 커뮤니티 게시판에 쓴 결혼에 대한 글이 화제가 되었다. 궁금해서 나도 찾아보았어. 한국 청년들이 결혼을 안 하는 이유가 평균을 너무 올려놨기 때문이란다. 배우자의 직업, 재산, 나이, 외모, 집안까지.. 이 정도는 돼야 성공까진 아니라도 평균적 혼인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그 평균적 조건 말이다. 거기에 못 미치는 결혼은 모자란 결혼, 실패한 결혼이 되는 것이기에 실패하느니 그냥 차라리 미혼으로 남는 걸 선택한다지.
꽤 그럴싸한 분석 같지만 그 역시 유물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진 못하는구나 싶었다. 눈을 낮춰서 자족하라는 것인데, 그러면 청년들은 세상 바뀌었는데 왜 우리더러 기준을 낮추라는 것이냐, 물가도 오르고 소비 수준이 올라갔는데 왜 우리만 하향평준화?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교전은 끝이 없구나.
출세와 성공의 기준이 참 구체적이더라. 특정 학교, 특정 직업, 특정 아파트, 특정 조건을 충족한 배우자.. 마치 게임머니처럼 이런 성공포인트를 획득하는 것으로 계층과 서열이 매겨진다니.
본디 서열이란 것은 같은 직장 또는 같은 직업군 내에서 형성되는 것이란다. 우 to he 영 to the 우처럼 유능한 변호사와 법도 잘 모르는 변호사 간에는 서열이 있지. 불 잘 끄고 사람도 잘 구하는 용맹한 소방관과 몸 사리는 무능한 소방관 사이에는 우열이 있고. 병 잘 고치는 의사와 돌팔이 의사는 같은 의사가 아니지. 같은 분야에 속한 이들이 서로 경쟁하며 탁월함(excellence)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차이가 바로 서열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땅에선 서열이 cross-sectional 하게 형성된다. 직업과 직업 간 서열을 매긴다. 소방관과 의사를 비교하여 서열화시킨다지. 결혼정보회사에는 직업을 비교해서 서열화시키는 매트릭스가 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아무리 탁월한 소방관도 실력 없고 돈만 밝히는 의사보다 아랫 서열로 인식하는 사회는 얼마나 병든 사회인가 말이다.
이러니, 의사라는 직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향의 학생들이 단지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의대에 줄을 선다. 그게 서열이 높은 직업이라고 하니. 훌륭한 의사가 될 자질을 타고났는지보다 그런 좋은 성적으로 의대 안 가면 손해라는 얘기에 솔깃해 불행의 수렁으로 자신을 던진다. 내 말이 아니라 의사 안철수의 말이란다.
"의사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야 하는 직업이에요. 문진하고 처방하고 설득하고 위로하는 상담가입니다. 굉장히 외향적이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 어울리는 직업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학교 다닐 때 말 한마디 쉽게 못 꺼내는 내향적인 아이도 성적이 잘 나오면 무조건 의대를 가죠. 그렇게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없고 자신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요. 혼자서 연구하는 걸 좋아할 만한 사람이 하루 수십 명의 환자고객을 말로 상대해야 하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
성경에 달란트 비유가 있단다.
주인이 먼길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에게 재능대로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1 달란트를 나눠준다. 주인이 돌아와서 각자 받은 돈으로 뭘 했느냐고 묻는다. 5 달란트 받은 자 왈, "장사를 해서 추가로 5달러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칭찬했다. 2 달란트 받은 종 왈 "2 달란트에 더해 2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첫 번째 종과 동일하게 칭찬했다. 1 달란트 받은 종, "받은 것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남긴 것은 없었지. 주인은 심히 꾸짖었다.
달란트는 집안의 재력일 수도, 타고난 지능 외모 신체적인 능력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얼마나 받았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겼냐이다. 남긴 것의 크기보다 받은 만큼에 비례하여 남겼는지가 더 핵심이지. 오해하지 말아라. 너 자신에게 남기는 게 아니다. 자신의 관속에 담아 갈 것을 더 끌어모으지 못해 후회하며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은 없다. 내 말이 아니라 백세를 넘기신 김형석 교수님의 말이다.
"내가 나를 위해 한 일은 남는 게 없어요. 남을 위해 한 일은 남습니다. 백 년을 살아보니 사랑 있는 고생이 행복이더라.."
받은 달란트를 남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달란트는 신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쟤는 5 달란트고 나는 1 달란트냐로 불평하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지. 굳이 따지자면 아프리카가 아닌 한국땅에 태어난 것만으로 상위 1%의 축복을 받은 건데 말이지.
우리 모두가 받은 달란트는 저마다의 크기와 색깔과 형상을 갖고 있어. 저 하늘의 별들을 두고 더 밝고 더 큰 것을 비교하며 서열을 매기지 않듯 그저 자신의 모습으로 빛나면 된다. 그러면 밤하늘은 아름다워 지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달란트를 받았는가? 그 달란트로 내가 남겨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게 별들의 고민이 되어야지.
나는 인생을 그림 그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단다. 저마다 그려야 할 그림이 있어. 소명이라고도 하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물감이 필요해. 모두가 날 때부터 받은 물감이 있어. 조금 모자란 물감은 노력을 통해 채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늦지 않게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림 그리기엔 관심이 없고 물감 모으는데만 혈안이다. 죽을 때까지. 평생 갖가지 형형색색의 물감만 잔뜩 모아서 그림 한점 못 그리고 모아둔 물감을 고스란히 두고 간다. 1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과 다를 바 없지.
고 이태석 신부는 의사가 된 후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치료하고 가르쳤다. 왜 그 어려운 의사 돼서 고생을 사서 하냐고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그는 자신의 소명에 집중했다. 그는 이 세상에 짧게 머물다 갔고 나는 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가 그려낸 아름다운 인생 그림을 통해 나는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J야,
너의 인생을 살아라.
물감만 모으는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고상한 직업이나 알량한 사회적 지위에 기대어 누리기에 급급한 인생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림 한점 남기는 인생을 살아라. 너는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