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에서 홍차오 공항 노선의 부활
코로나가 터진 그 해, 신랑이랑 싱가포르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했던 우리의 예약 스케줄을 보며 비행기가 무사히 잘 뜨기를 매일매일 확인했다. TV에서는 계속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고, 봉쇄하는 국가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비행기도 운행을 멈추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싱가포르 여행을 준비했었지만, 신랑 회사일로 결국 같이 가지 못하고 혼자 가야 했던 적이 있다. 이번엔 부디 함께 무사히 싱가포르 여행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싱가포르에 가더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힘들 거 같은 불안함..
하루하루 심각해지는 상황에 우리는 결국 이번 싱가포르 여행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항공사에 전화를 했다. 역시나 항공사에 전화해서 상황을 확인하고 수수료 없이 취소하는데 진땀을 빼며 성공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은 코로나로 어긋난 생각치 못한 첫 번째 변수였다.
코로나로 크게 달라진 건 그다음이었다. 갑자기 신랑 회사에서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한 위험한 지역으로 발령이라니! 설마설마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국 상해에 있는 주재원은 들어오고 신랑은 나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위험한 곳으로 발령을 내면 위험수당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나는 흥분하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미 결정난 회사의 의견은 힘없는 직원은 거절할 수 없었다. 회사의 결정을 따르고 싶지 않다면 회사를 나가는 수밖에. 제주에서 서울로 와서 다시 재입사 한 회사였다. 나름 신랑의 첫 번째 회사였고 애정이 있는 곳이었다. 신랑은 묵묵히 상하이로 갈 준비를 했다. 전염병이 너무 심각한 상황이어서 나는 덥석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신랑이 자기가 먼저 가서 상황을 보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신랑은 예정된 곳, 상하이로 떠났다.
다행히 상하이에는 신랑의 입사 동기였던 법인장이 있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하이 지사에는 한국인 직원과 한국어를 하는 중국 직원들이 있어서 중국어를 못하는 신랑이 적응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신랑이 중국으로 들어간 뒤, 나도 주재원 가족 비자를 받으려고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중국에서 초청장을 받으려고 하는데 계속 시간이 지연되었다. 당시에는 코로나로 특수상황이라 중국 정부의 도장이 찍힌 초청장이 없으면 한국에서 중국 가는 비자를 신청하기 어려웠기에 나의 중국행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다.
코로나로 여행 가이드 일도 줄고 나 또한 일이 없는 무직의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계속 중국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너무 아까웠다. 그때 마침 모교로 강의를 몇 번 하고 교수님으로부터 대학원 입학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에 입학을 했고,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연구원 조교로 근무를 하며 2년을 보냈고, 석사를 졸업하면서 드디어 중국에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대학원에 있는 2년동안 다행히 코로나는 조금씩 줄어들고 봉쇄하는 나라들도 점차 풀려서 이제는 위드코로나로 중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상하이 집에서 가까운 홍차오공항이 뒤늦게 오픈을 했고, 김포공항에서 상하이로 출발했다. 드디어 2년반만에 코로나로 이산가족이 되버린 우리 부부는 만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