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희 Jan 02. 2018

당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소중하다


'진짜 우울증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단순하고 명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지를 의사들에게 묻고 싶었다.

진료를 받으러 가면 표준화된 검사와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몇가지 질문들끝에

우울증이라는 진단과 함께 약이 주어지고 나면 병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서 또다른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에 몸까지 아프게 되면 의사와 상담사는 쉽게 '신체화증상'이라고 단정 짓는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병이 있어도 말이다.

우린 너무 많은 방송과 매체들에서 듣지 않아도 될 얘기를 듣고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듣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병에 과민해지는 역효과를 주고 있다. 

 오래 산다고 건강하고 그 삶이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삶을 사는냐'가 그 사람의 매일의 순간들을 지배하고 있다.


심리적인 이유로 몸이 아픈 것을 "신체화 증상"이라고 심리학자들과 의사들, 상담사들은 정의를 내린다. 한 개인의 난처한 상황이나 절박한 환경, 살아온 과정 모두가 그 앞에서는 무시되어 버리고 단지 그의 현재 상황만이 팩트가 되어 진단이 내려지고 처방약이 주어진다. 실제로 그 환자의 지병으로 인한 통증조차도 심리적인 이유라고, 신체화 증상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짓는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최소 진료시간 10분에서 30분 사이 밖에 걸리지 않는다.(이것은 표준화 되어 있는 검사지를 작성하는 짧은 시간을 배제한 것이다) 

우리가 정신과 의사를, 상담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상담사에게 가고 의사에게 가는 것을 하지 않을까? 

우리는 우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작아진 가족과 개인화를 지나서 폐쇄적으로만 달려가는 우리의 사회 구조는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 걸고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쉽게 공황장애가 되고 알 수 없는 마음의 무거움은 쉽게 우울증이라고 진단 내려지고, 초등학교에 진학할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산만함이 지나치면 병원과 상담사에게 가보기를 권유받는다. 병웡에서는 그아이에게 ADHD꼬리표를 붙여 약을 처방하고 약을 먹여 그 아이를 조절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우울증이라는 증상이, ADHD가, 다중인격장애, 경계성 인격장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동안 우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데 그 모든 순간에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병으로 진단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극한의 절망을 느낄 때, 미래가 보이지 않아 삶을 멈추고 싶은 순간에 어떤 사람은 바로 회복하고 일어나지만 우리 모두가 그럴수는 없다. 우리 모두 각자의 짊어진 짐도,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온 궤적이 모두 다르고 상처의 수도, 그 상처의 깊이도 모두 다르지 않는가? 그것을 잘 극복해야지만 존귀한 영혼이라고,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과거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정의내린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을 찾지 못할 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어디로 갈지 알고 싶다면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이 말이 내게는 힘이었다. 어디로 갈지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내 모습은 심리학적 측면에서 과거에 매달려 사는 것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진실이 아니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선택할 때 나에겐 필요한 순간들이었다.


에릭 메이젤의 "가짜 우울"이라는 책의 시작은 이러하다. 우리 모두가 정신과 의사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우울증 환자로 분류되어진다고 말이다. 의사와 상담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아파서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어려운 상황에 상의할 사람이 없어서, 믿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 우울증일까봐 걱정이 되서, 잠을 자지 못해도 우리는 병원에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병원에 들어서는 그 순간,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몇마디를 나누고 나면 우린 '합법적'으로 '우울증 환자'가 되버린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우울하다는 감정을, 슬픈 감정을, 소극적인 성격을 바람직하지 못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진단을 받고 약을 받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 병원을 찾았든 환자가 되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매일 밝을 수 있다면, 어떤 순간에라도 씩씩할 수 있다면,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도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기준으로 삼고 스스로를 자학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우리는 '캔디'가 아니다. 우리는 '외로워도 슬퍼도 괜찮지 않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아야 하는 감정을 '강요'받는 건 아닐까 의심해봐야 한다. 또 힘든 상황을 제공한 책임자들에 의해 합리화를 위해 괜찮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때로는 그들이 우리 가족일 수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났다. 

우리 자신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며,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들이 불합리해도, 서툴더라도, 사랑하는 가족들조차 인정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소중한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유일한 존재인 당신이 느끼는 어떤 감정이든, 설사 그 순간 모두가 손가락질 하더라도

당신이 느끼는 모든 순간의 감정은 소중한 것이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힘든 상황이 한번에 없어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우린 매일매일 그 순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 갈 수 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만큼 힘들어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저 견딜 수만 있다면 우린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격려해 줘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는 니체의 말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아는 것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살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눈앞을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린"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많이 아프더라도 말이다.







어려운 시간을 지나올 때 휴대폰의 잠김화면의 이 말들은 내가 살아남게 해줬습니다.

나와 같은 누군가를 위해 남깁니다. 

어려운 시간을 지나올 때 휴대폰의 잠김화면의 이 말들은 내가 살아남게 해줬습니다.나와 같은 누군가를 위해 남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담자와 상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