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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Feb 13. 2024

내 손에도 스토리가 있다

그림책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를 읽고

모름지기 여자라면 발이 작아야 미인이고, 손이 섬섬옥수처럼 고와야 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러한 잣대가 더욱 성행하곤 했다. 작은 키 덕분에 발은 235에서 멈춰 섰기에 그럭저럭 만족했는데, 손이 늘 탐탁지 않았다. 손은 큰 편이었고, 손가락도 길었다. 손가락이 길면 다들 가느다랗고 기다란 그래서 여리여리 어여쁜 손을 떠올리기 쉽지만 내 손은 마디마디가 굵고 피부도 건조한 그야말로 투박한 손이었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피아노 치기에 최적화된 손이라고 할 정도로 마디가 두드러졌다. 초등학생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구나 하고 기뻐했었는데, 이제와 보니 재능은 없고 손가락만 굵었던 거였다.



그런 손이 조금 부끄럽고 조금 자신 없었지만 별생각 없이 살던 내게, 마디가 굵은 손을 가진 걸 정말 싫어하게 된 건, 커플링을 맞추면서부터였다. 보통 여자 반지의 평균 사이즈는 10호 정도라고들 하는데, 정말 가늘고 예쁜 손은 9호도 맞는다며 가녀린 손을 가진 친구들은 은근한 자랑을 하곤 했다. 나는 반지를 착용하는 손가락 둘레는 얇았지만 마디 때문에 반지가 들어가지 않아 11호로 맞추었다. 그것도 겨우. 손가락 둘레보다 큰 사이즈를 선택했기에 반지가 늘 빙글빙글 겉돌았고, 어떤 반지를 껴도 예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 손이 미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다 보니, 투박하고 마디가 굵은 내 손은 더욱 투박하고 마디가 굵은 손이 되었다. 그리고 차가운 물과 더운물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이곳저곳에 많이 담갔더니 주름까지 가세했다. 쭈글쭈글해진 피부는 나이답지 않게 손을 더 거칠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손을 보이기가 어색했고, 부끄러워 감추곤 했다.



그림책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등장한다.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주름은 어떻게 생겨난 거냐고 묻는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 생기기도 하고, 행복한 일과 슬픈 일 때문에 주름이 생긴다고 일러준다.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에 묻어난 주름을 보며 손자는 마치 작은 생물들이 뛰어노는 듯 보인다고 표현한다.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주름진 내 손 사이사이로 헐떡이는 작은 핏줄들이 보였다. 투박하고 주름진 내 손이 부끄럽기보다는 다정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오른손을 주름진 왼손이 감싸주고 싶었다.



주름 사이사이에서 내 손의 스토리가 들려온다. 세상을 알아가고 싶어서 조몰락조몰락 만져보던 어린 시절의 호기심이 묻어나는 주름,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싶어 공기놀이하고 말뚝박이 하며 생겨난 웃음의 주름,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종이를 접고 실을 짜며 생겨난 애틋함의 주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책상 위 종이를 왔다 갔다 하며 쓸려내려 간 열정의 주름,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고 뛰어든 용감한 세월의 주름까지.



내 손에 담긴 주름의 이야기에 기울이고 보니 주름 하나하나 귀엽고 어여쁘고 대견하게 보였다. 그 속에 담긴 실패와 쓰라린 고통, 상처의 주름까지도 나를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 이제는 투박하기보다는 대담하고 믿음직스러운 손이 되어 있다. 그림책 속 아이의 손과 할아버지의 손이 함께 나온 장면이 오래 눈길이 간다. 나도 손자의 손처럼 포동포동하고 보들보들 한 때가 있었으리라. 이제는 무뎌지고 무뎌져 거친 표면을, 주름지고 주름져 있지만, 그래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고, 누군가의 손을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투박하지만 대담하고 대견한 내 손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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