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고도 다정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그림책에게 기대어 봅니다
그림책 속에 할머니들은 다정하다. 뜨끈하고 구수하고 정겹다. 엄마나 아빠가 해줄 수 없는 더 크고 우직한 사랑을 마구마구 뿌려주며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준다. 그런 장면을 펼치며 눈물을 글썽이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조금 어렵다. 아는 척하기에는 전혀 모르는 사랑이고 모르는 척하기에는 공감대가 없는 메마른 활동가 같아서 할머니라는 존재는 내게 너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 아무런 색깔도 띠지 않은 어떤 형태도 없는 그런 존재다.
K장녀로 태어난 우리 엄마의 둘째 딸인 나는 친척어른들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흔하디 흔한 할머니의 사랑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안타깝게도 친할머니는 아빠를 낳으며 돌아가셨고, 친할아버지는 아빠의 중학교 시절 돌아가셨으며, 외할아버지 역시 엄마의 중학교 시절 돌아가셨다. 다만, 외할머니 한 분은 아직까지 정정하시지만, 남아선호사상이 뼛속까지 깊어 큰 딸의 둘째 딸인 나를 특별히 아껴주시지는 않았다. 나쁜 마음이 있거나 내가 싫거나 미워서가 아니라, 단지 나는 출가외인인 딸이 결혼한 사위의 자식일 뿐이고, 달고 나와야 하는 무엇 하나도 달고 나오지 않은 한낱 계집아이였기에 할머니의 삶 속에서 나는 당연히 없어도 그만 있었도 모르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할머니 네에 가는 게 싫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어 한 시간 남짓 밟으면 금방 도착하는 곳이 외갓집이지만, 당시에는 외갓집에 한 번 가려면 몇 시간 동안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했고, 차 안에서 억지로 참은 멀미는 소똥 냄새를 맡으면 다시 목까지 차올랐고, 그렇게 힘겹고 힘든 여정을 견뎌 도착하여도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유령처럼 앉아 있다 오는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떤 할머니가 좋은 할머니인지 가늠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롤모델로 삼을 만한 대상이 딱히 있지 않으니 막막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내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바로 그림책이다. 많고 많은 그림책 속 할머니들을 보며 내 모습을 그려본다. 어색한 손녀에게 다정한 귤을 건네고, 친구가 되는 <감귤 기차> 속 할머니, 자신이 쓴 일기를 들려주며 지혜를 물려주는 <리시의 다이어리>의 할머니, 몸은 힘겹지만 손녀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할머니와 걷는 길>의 할머니, 그리고 거친 손으로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얼굴을 쓸어주는 <겨울 이불> 속 할머니.
내 아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핏줄로 연결이 된 할머니로 나를 만들어 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조금 더 오랫동안 살며 조금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한 어른으로서 따스한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두 발 자전거를 타는 어린이에게는 눈을 찡긋 할 수 있는 할머니, 실수하는 바람에 얼굴이 홍당무가 된 학생에게는 토닥토닥 괜찮다는 눈인사를 건넬 수 있는 할머니, 어디로 가서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청년에게는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줄 수 있는 할머니, 어쩌다 어른이 되어 이리저리 쫓기고 있는 이들에게는 잠시 엘리베이터의 열림버튼을 누르고 기다려 줄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런 귀엽고도 다정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또 그림책에게 기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