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닮녀 Feb 19. 2024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진짜가 되면 진짜 좋을 지어낸 이야기

"야. 궁상맞게 왜 울고 지랄이야. 그만 울어."

H는 슬픔을 억누르려고 S에게 괜한 윽박을 질렀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이건 누가 봐도 호상이었다. 아파서 병원에 다니지도 않던 이가 밤사이 잠자다가 하늘나라로 가다니, 70대 독거노인에게 이는 호상 중에 호상임이 틀림없었다.

"누가 보면 칼이라도 맞은 줄 알겠어. 이보다 더 호상이 어디 있냐? 정이는 잘 갔어. 딸, 아들 시집 장가 다 갔지. 손주도 안아봤지. 남편 먼저 보내고 혼자서 인생도 즐겼지. 거기다 병원 문턱은 밟지도 않고, 그 나이에 저승으로 갔으니. 울기는커녕 파티라도 해야 할 판이 고만!"

H는 정이가 왜 호상인지 읊조리면서 애써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파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웃음이 번지는 H를 보며 S는 눈을 흘겼다.

"쳇, 울지 말라더니. 언니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달렸어. 울다가 웃으면 어찌 되는지 알지? 눈물이 나 닦아. 호상은 호상인데, 언니가 이제 없잖아. 이제는 못 보잖아. 같이 차 마시러도 못 가고, 같이 놀러도 못 가고."

한 살 어린 S는 유독 정이를 따랐다. 정이를 좋아하고, 정이처럼 되고 싶어 했고, 정이와 많은 걸 하고 싶어 했다. S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산 지 15년이나 되었다. 외로움에 익숙해질 즈음, 도서관 시 쓰기 강좌에서 만난 정이와 H와 친해져 마음을 주고받았다. 2년 전, 정이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부터 거의 매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시를 쓰며 보냈다. 그런 S에게 정이의 죽음은, 그것도 어제까지 함께 수다를 떨던 정이의 죽음은 크나큰 상실이었다.


"정이는 없지만 같이했던 시간들은 있잖아.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어. 정이 남편 보내고 정동진 갔던 거 기억나? 그때 정이가 술에 취해가지고 바닷가에서 큰소리로 노래하고 춤추고 그랬잖아.  그때 부른 노래가 뭐였지? 맨날 부르던 노래였는데. 그 뭐냐 그."

H는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이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허밍으로 흥얼거렸다. S는 빨개진 눈과 코를 휴지로 닦으며 허밍에 가사를 얹었다.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말, 나에게 다 맡겨 봐.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 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H는 눈을 번뜩이며 박수를 쳤다.

"그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그 노래지? 정이가 그 노래 참 좋아했는데. 그때 정이가 어떻게 춤을 췄더라. 이렇게인가?"

S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슬픔을 누른 채 몸짓을 하고, 추억을 꺼내어 나누어주는 H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장례식장에서 춤을 추면 어떻게 해? 누가 보면 원수라도 죽어서 신난 사람인 줄 알겠네."

S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웃음을 터뜨렸고, H도 따라 웃었다. H가 말했다.

"그래, 웃어. 정이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나눌 줄 아는 아이였잖아. 자기 것을 나누어 줄줄 알고, 마음을 돌볼 줄 아는,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정이가 있어서 외로운 내 인생도 꽤 유쾌했어."

S의 눈이 다시 뻘게졌다. H는 말을 덧붙였다.

"정이가 이렇게 울고 있는 너를 보면 마음이 안 좋을 거야. 우리 정이 잘 보내주자. 미리 가서 우리 자리 좀 맡아놓으라고 하지 뭐. 저승 횟집 좀 알아두라고. 또 소주 한잔 걸치고는 노래하고 춤추고 놀만한  좀 알아보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울고 뭐 좀 먹어. 그러다 너마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사니?"

S는 무덤덤한 척 해도 마음은 여린 H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뻗어 숟가락을 들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정이의 영은 흐뭇했다. 갑자기 떠나게 된 저승길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온 H와 S가 자식들보다 마음에 더 걸렸다. 남편이 떠나고 자식들이 함께 살자고 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생활하며 학창 시절 꿈꾸었던 문학소녀가 되고파 시니어 시 쓰기 클럽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흥 많은 H와 웃음 많은 S를 만났다. 혼자라서 두렵고 적적한 시간들을 채워 준 건 그들이었다. 젊었을 적 묘비명에 무엇이라고 쓰겠냐는 질문에 정이는 늘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다지 나누어 줄 것이 없던 자신의 삶이 가끔 초라하게 여겨지곤 했다. 느지막이 만난 벗들은 늘 정이에게 많이 나누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야기를 진득이 들어주며 소중한 시간을 나누어주어서, 따스한 손의 온기를 나누어 주어서, 살아오며 겪은 굴곡진 에피소드를 나누어주어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담긴 그림책의 위로를 나누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누며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해 주는 두 사람이 있어서 오랜 달리기 끝에 도착한 생의 마지막이 보람찼다. 두 사람 덕분에 정이는 촘촘하게 채워진 인생의 한 페이지를 다시 넘겨볼 수 있었다. 정이의 영은 눈물과 미소가 함께 번져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길을 떠났다. 저승에 있는 좋은 횟집에 자리를 잡으러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때 그 두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시 그림책 한 권을 고이 가슴에 품고.  


백 살이 되면 -황인찬

백 살이 되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

(중략)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좋겠다
물방울이 풀잎을 구르는 소리
젖은 참새가 몸을 터는 소리
이불속에서 듣다가 나무가 된다면 좋겠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 나무 밑에서 조용히 쉬고 계시면 좋겠다
빛을 받고 뿌리를 뻗으며
오래 평화롭게 잡들 수 있다면 좋겠다

(중략)

백 년 동안 쉬어서 아주
기분이 좋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그림책으로 글쓰기 6기/ 그림책 <오래달리기>(이하진/킨더랜드)를 보다가 인생의 오래달리기 끝에 나는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상상하는 글쓰기를 해보았습니다. 이 글을 쓰며 사랑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나를 기억해주고 그리워해주는 그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마지막 한 페이지를 채우고 싶은 소망을 담아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