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여름,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하굣길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교문 근처에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보이는 개(말라뮤트일 수도 있다)가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지나가려다가 더위에 지쳐 보이는 모습이 눈에 밟혀 발걸음을 돌려 보온병 뚜껑에 물을 담아 건네주었다. 목이 많이 말랐던지 개는 순식간에 물을 비웠고, 나는 흐뭇한 마음에 뚜껑을 집어 들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뒤에서 왈, 하고 짖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허스키는 순식간에 뒷발로 서서 앞발을 내 어깨에 대고 산처럼 우뚝 섰다. 털북숭이 얼굴 속 새까만 눈동자는 아마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겠지만 신장 120cm 초등학생은 이대로 잡아먹히나 하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개는 나를 잡아먹는 대신 큰 혀로 내 얼굴을 턱부터 이마까지 핥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축축하고 미끈한 침 때문에 나는 실눈을 뜨고 집으로 총총 달려가 서둘러 세수를 했다. 이때부터 강아지든 개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2.
열한 살 때 동그랗고 새초롬한 눈이 고양이를 닮은 친구가 있었다. 이제 이름을 잊은 그 친구 집은 1층이었는데 베란다 한편에 항상 고양이 사료를 부어 두었다. 길고양이들은 담을 넘어 밥을 먹고 햇볕을 쬐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중 한 마리가 새끼 네 마리를 낳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네 가족은 새끼 고양이들을 집 안으로 들여 키웠다.
나는 종종 그 집에 놀러 가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했다.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 다리로 장애물을 만들어 고양이들이 오면 가면 돌아다니게 하고, 복슬복슬한 솜털을 쓰다듬으면 시간이 흐물흐물 녹아 사라졌다. 손바닥을 핥는 까슬까슬한 혀와 보송보송한 털 위에 앉다가 흩어지는 오후 햇살을 모두 사랑했다. 이사와 전학이 아니었다면 고양이들이 성묘가 될 때까지 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꼬물거리는 솜뭉치들이 두어 달이 지나 훌쩍 사춘기 즈음으로 크는 것까지 밖에 보지 못했다.
그 친구는 아직도 고양이를 키울까, 가끔씩 궁금하다.
3.
그즈음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얼굴을 침범벅으로 만드는 강아지보다는 담장을 소리 없이 사뿐사뿐 지나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다 이내 달려와서 손에 이마를 비비는 고양이는 어찌나 매력적인지. 아니면 각 동물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이 대척점을 이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염원은 한동안 묵혀놨어야 했는데, 전직 경찰인 아빠가 겁이 많아 치과와 네 발과 털 달린 짐승과 까치를 무서워하는 탓이다. 어릴 때는 아빠가 동물을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커 보니 아빠는 겁이 많아서 무서워서 싫었던 거였다. 아빠가 매년 두어 번은 주말에 우리를 동물원에 데리고 다닌 건 부성애가 공포를 이겨낸 사례였다고 보면 된달까.
그나마 타협안으로 네 발과 털의 조합을 비껴간, 물고기나 과학실험키트에 딸려온 누에, 그리고 병아리를 키우기는 했다. 아빠는 그 타협안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빠가 야근이 적고 주말 출근이 없는 직장에 다녔더라면, 틈새시장을 공략한 그 타협안마저 결렬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가을 마포로 이사를 준비하면서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주변에 선언을 하고 다녔다. 정작 첫 독립을 개시하니 내가 나를 키울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비겁하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고양이를 욕망 리스트에서 후순위로 미뤄 두었다.
4.
어느 날, 팔로우하던 작가의 SNS에서 유기묘 입양 요청글을 읽게 되었다. 욕망의 차트 밖 어딘가에 있던 고양이가 한달음에 풀쩍 선순위로 뛰어들었다. 자취 경력이 두어 달 차니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고, 짝꿍이 마침 근처에 살아 설령 내가 야근으로 고양이를 못 챙기는 날이 생기더라도 훌륭한 백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의 이런저런 핑계가 파쇄되니 실행만 남았다.
SNS에서 본 고양이는 청주에 있어서 포기하고 포인핸드를 통해 강서구 어느 성당에서 구조된, 등에는 갈색 까만색 줄무늬가 있고 배가 하얗고 오른쪽 입가에 연갈색 무늬가 있는 고양이를 한 마리 데려왔다.
5.
고양이 이름은 무늬다. 너무 직관적인 나머지 대충 지은 것 같고 나조차도 부를 때 가끔 나문희 씨가 생각나지만 사실 고민이 많이 들어간 이름이다.
파열음이 없고 된소리가 없고, 세 글자 미만에 마지막 음절에는 받침이 없어야 했다. 받침이 있으면 단어에 종결성이 생겨서 발음이 상대적으로 어렵다. 외국어 또는 한자도 썩 취향은 아니었다. 브랜드도 아닌데 이름에 많은 의미가 담길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여러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며 고민하다 무늬가 문득 떠올랐다. 마침 무늬는 내 조건에 부합하는 이름이었다. 무늬가 유일한 후보인 상태에서 구글에 “무늬”를 검색했다. 맨 처음 링크는 나무위키였는데, 나는 “물결의 표면에 어룽져 나타난 모양”, “무늬를 가진 실존하는 것”이라는 문구에 문맥과 상관없이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https://namu.wiki/w/무늬
그렇게 고양이 이름은 무늬가 되었다.
사람들이 왜 무늬냐고 물어보면, 파열음이니 된소리니 하는 구구절절한 설명은 모두 생략하고 줄무늬 고양이여서 무늬라고 대답한다.
6.
길에서 4개월을 보내다 구조된 무늬는 겁이 많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과 큰 소리를 싫어한다. 장난감에 구슬이 달리면 구슬을 떼어내야 가지고 놀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은 위잉거리는 소리 때문에 건드릴 엄두도 못 낸다.
아마 길에서 지낼 때 사람들 큰소리나 길가의 차 경적소리 때문에 더 예민한 게 아닐까, 짝꿍의 추측이다. 이 생각에 괜히 무늬가 짠했다. 사실 모든 것에 무늬가 짠했다. 밥을 허겁지겁 먹는 것도 굶은 적이 많아서였을 것이고, 귀에 링웜이 생겨서 털이 빠진 것도 길가 어딘가에서 옮아온 곰팡이 탓인지도 모른다. 무늬는 꾹꾹이를 하지 않는데, 너무 어릴 때 가족을 잃은 탓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린 고양이라 양 조절을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곰팡이는 우리 집에 와서 옮은 걸수도 있고, 꾹꾹이는 성격 탓에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알면서도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그래서 괜히 한번 더 쓰다듬는다.
최근 아울렛을 지나가다 강아지 분양 코너를 지나칠 뻔했다. 그냥 지나치려다 걸음을 뒤로 돌렸다. 9개 칸으로 만들어진 진열장의 맨 위 왼쪽 칸과 맨 아래 왼쪽 칸에 기껏해야 주먹 두 개 정도 크기 되는 아기강아지 두 마리가 힘없이 누워있었다. 진열장의 다른 칸이 비어 있어서인지 안 그래도 푸른 조명 아래 추워 보이는 칸이 더 추워 보였다. 각 칸에 홀로 남겨진 강아지들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강아지 뒤에는 각 품종명과 분양가 150만 원이 적혀 있었다.
무늬를 데려오기 전에도 속상해했을 풍경인데 그 날은 집에 있는 무늬가 생각나서 유난히 슬펐다. 집에 가는 길을 재촉해 무늬의 이마와 등과 턱을 쓰다듬었다. 무늬는 조금 골골거리다 폴짝 뛰어 공을 굴리러 갔지만.
7.
무늬가 온 첫 주는 재택근무여서 무늬를 계속 볼 수 있었다. 그다음 주, 처음 무늬를 집에 두고 출근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눈 뒤에 무늬가 어른거렸다. 그 날은 여섯 시가 되자마자 노트북을 닫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나를 대구 할머니 댁에 맡겼던 시절, 엄마는 토요일에 퇴근하자마자 아빠와 대구행 기차를 타고 할머니 댁을 향했다. 아무리 피곤하고 아픈 날이어도 토요일 밤에 대구역에 내리기만 하면 말짱했다고 한다. 조바심을 내며 집을 가는 동안 엄마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둘러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도착하니무늬는 자고 있었다. 자는 무늬는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 잠도 많고 더위도 잘 타는 곽 여사 얼굴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난다. 평온한 무늬의 얼굴을 보며 안도했다.
8.
자다가 등허리가 뜨뜻하면 무늬가 밤새 뛰어놀다 지쳐 내 옆에서 잠이 든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무늬 안고 잔다. 새벽 즈음 무늬는 애옹, 소리를 내며 아침을 요구한다. 나는 주섬주섬 밥을 챙겨주고 다시 눈을 감는다. 무늬가 다시 머리맡에서 애옹, 할 때쯤이면 출근할 시간이다. 씻고 머리를 말리면 무늬는 잽싸게 이불 사이를 파고들어 침대 위 작은 봉우리를 만든다. 작은 봉우리가 규칙적으로 들썩이고 내려앉는 모습을 고요히 바라본다.
7시나 8시 즈음 퇴근하면 무늬는 아직 자고 있다. 9시쯤 퇴근하면 무늬는 문 앞에서 식빵을 구우며 나를 기다린다. 11시 이후에 집에 오면 무늬는 애옹, 을 멈추지 않고 나를 쫓아다니다밥을 먹고는 나를 마저 쫓아다니며 놀아달라고 성질을 낸다. 그런 날은 새벽에도 놀아달라고 찡얼대며 얼굴을 핥아댄다.
평소 비지 시즌에는 저녁을 먹고 10시, 11시에 퇴근했지만 올해는 무늬 때문에 저녁을 거르고 9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다가 집에 늦어도 10시까지는 갔다. 필요하면 집에서 일을 더 했는데, 그럴 때면 무늬가 삐져서 꽁하니 있다가 노트북 키보드 위로 달려들곤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업무 집중도가 높은 비지 시즌을 보내야 했다.
9.
1월부터 3월 중순까지는 감사에서 비지 시즌으로 야근과 주말출근을 숨 쉬듯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이제 당기가 2020년에서 2021로 바뀌었다고 농담을 치기도 하고, 3월이 되어서야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뒤늦은 인사를 던지고 받는다.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는 일이 거의 없어 재택을 하거나, 일이 아예 없으면 대체휴무와 연차를 소진한다. 재작년만 해도 어디든 해외로 기를 쓰고 나갔는데, 올해는 그럴 기운마저 빠져 코로나를 핑계로 집에서 빈둥거리기로 했다. 책과 넷플릭스와 낮잠과 요가와 함께.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 허지웅 작가의 살고 싶다는 농담, 정혁용 작가의 침입자들, 구병모 작가의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심너울 작가의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김지은 씨의 김지은입니다, 누마타 마호카루의 유리고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라면 국물 마시듯 후루룩 읽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무늬를 쓰다듬고, 페이지를 넘기다 낚싯대를 흔들며.
넷플릭스에서는 첨밀밀, 미쓰백, 오직 사랑뿐, 원더우먼, 음양사:청아집,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시신령:음양사, 국가부도의 날, 작전명 바시티 블루스를 봤다. 책을 고를 때보다 넷플릭스를 고를 때는 고민을 현저히 덜 하므로 책에 비해 선택한 결과물의 품질이 들쭉날쭉했다. 작전명 바시티 블루스는 꽤 괜찮은 다큐멘터리였고 첨밀밀의 정서는 좋았지만 원더우먼이나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는 졸음을 참아가며 의리로 끝까지 봤다.
등록해야겠다고 마음만 6개월 간 먹은 집 앞 요가원에 가서 주 3회 이용권을 등록했다. 오래간만에 근육을 쓰고 늘려내니, 집에 올 때마다 젤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몸을 쓰고 나면, 마음의 긴장과 더불어 몸의 긴장까지 풀려 잠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꺼풀을 덮는다. 씻고 침대에 누워 무늬를 끌어당기면 무늬는 제 등을 내 품에 기대고 팔과 다리(앞발과 뒷발이지만 사람같이 자기 때문에 팔과 다리라고 부르도록 하겠다)를 쭉 편다. 고양이가 목울대에서 울리는 고롱고롱 소리를 듣다 보면 나도 까무룩 잠이 든다. 중간에 잠이 깨면 넷플릭스를 틀거나 책을 읽는다. 그러다 무늬가 다시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스르르 잠이 든다. 이불속에 고양이 발바닥과 날숨에서 나오는 고소하고 큼큼한 냄새가 퍼진다.
꼬순내를 맡으며 영화 “꿈의 제인”에서 제인의 대사를 떠올린다.
“나는 인생이란 게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한 번도 안 끊기고 계속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요만큼, 드문드문, 각 쉼표마다 제인은 해변에 모래를 조금씩 던진다. 나는 제인을 보며 모래알 같은, 소금 같은 한 꼬집의 행복이 시시한 인생을 달라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 요만큼의 행복이면 인생은 더 이상 시시하지 않다.
딱히 뭘 하지도, 멀리 나가지도 않는 시시한 휴식기에 고양이 발바닥을 보며 이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고 입 속의 단내가 빠질 때까지 잠에 든다.
10.
무늬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요즘 들어 20년 후에 이 순간을 너무 그리워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때 아마 무늬는 없을 텐데. 무늬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도 없고, 그 외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없어질 것이다.
행복에 겨워 있다가 이 생각만 드는 순간 나는 그 순간으로부터 유리된다.
후회 없이 주고 후회 없이 사랑하는 것이 시간 앞에서 무력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답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슬픔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시시콜콜한 행복으로 돌아가거나 절대자에게 기대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