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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Oct 02. 2023

낮잠의 결말은 배고픔

연휴 다섯째 날 새벽

  지난 글에서 언니와 부모님은 행동이, 나와 부모님은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밝혔다. 막내인 멍멍이까지 포함하여 우리 가족 네 구성원과 나의 큰 차이로는 '잠'이 있다. 멍멍이를 보고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잠에 취하는 게 귀엽고도 신기하다. 눈 떠 있는 시간과 눈 감고 있는 시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도 않다. 어쩔 때는 심심하다고 아침부터 날 깨워 재끼고, 어쩔 때는 체력이 남았는지 자정이 넘어서도 날 못살게 군다. 잠-기상 그다음으론 다시 잠이 오게 만들어야 한다. 재우기 위해선 놀아주는 수밖에 없다. 내게는 '뺏기'이고 멍멍이 입장에서는 '사수하기'인 놀이를 시작한다. 견주가 장난감을 휙 던지면 강아지가 물어오는 보편적인 놀이는… 하고 싶지만 해본 적 없다. 멍멍이는 한 번 물면 내어주는 법이 없다. 그런 멍멍이의 뒤꽁무니를 밟거나 앞을 막으면서 이리 내놓으라고 '연기'한다. 멍멍이는 포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으르르륵" 소리 내지만 꼬리는 마구 흔들린다. 뺏기지 않으려고 성깔 내는 '연기'를 하는 중이나 꼬리뼈밖에 없는 나와 달리 멍멍이에겐 기분 탐지기인 꼬리가 실존하지 않는가. '멍알못'인 가족들은 "화났다~" "싫대~" "하지 말래~" 같은 추측을 날리며 내게 뭐라 한다. 억울한 타박에 걸음을 멈추면 멍멍이는 장난감을 퉤 뱉고는 서러운 표정을 짓는다. "화난 거 아님" "싫은 거 아님" "하지 말라는 거 아님" 지겹게 변하, 최소 20분에서 최대 90분까지 이 짓을 반복하고 나서야 멍멍이는 잠에 든다. 더 자고 싶은데 졸음이 달아나서 날 이용해 먹는 게 아닌가 싶은 의혹도 든다.


  세 사람(아빠, 엄마, 언니)은 먹으면 잔다. 졸리면 잔다. 심심하면 잔다. 식곤증(食困症)이야 누구나 갖고 있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곤란(困難)해 하는 나와 달리, 가족들은 난처기색이라곤 일절 없다. 식후땡 말고 식후면(食後眠)의 개념으로 밥 먹고 나서의 잠을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하도 "밥 먹고 앉지 말랬지!" "밥 먹고 눕지 말랬지!" "밥 먹으면 걸으랬지!" 잔소리해 대는 통에, 귀막 차원에서 잠드는 건 아닌지……. 아빠에게 텔레비전을 뺏으면 어느새 코골이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언니지루한 책을 면 "악!" 투덜대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두 경우 다 잠들어서다. 엄마는 잠을 사랑하는 수준이라 굳이 전 단계가 필요 없다. 심심할 때건, 졸릴 때건, 아무렇지도 않을 때건 금방 잠든다. 엄마에게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머리 대면 잠들기' 스킬이다. 그 때문에 나와 언니는 "엄마, 자?"란 말을 어릴 때부터 날려댔다. 엄마는 그만큼 잘 일어나는 데다, 많이 자든 사정이 생겨서 적게 자든 동일한 컨디션을 유지한다. 고급 스킬 보유자셈이다. 엄마는 1시간 이내의 낮잠은 개운해진다며 좋아한다. 의도치 않은 아빠와 언니의 잠도 시간대를 따지면 낮잠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의 휴일은 부모님+나+멍멍이 조합으로 흘러간다. 이번처럼 연휴가 길거나, 방학이거나, 언니의 지갑이 궁핍해진 때는 언니도 더해진다. 이때 깨어 있는 사람이 나뿐인 기이한 현상한밤도 아닌 한낮에 발발한다. 강아지들은 잠이 많니 멍멍이야 그렇다 쳐도, '셋 다 어찌 저리 잘자지……?' 놀라기 일쑤다. 잠 잘 드는 넷과 달리 나는 (1) 잘 못 들고 (2) 어려워하고 (3) 좋아하지도 않는다.


   관한 기억들이 있다. 초등생 때 떠나왔던 집에서 네 사람이 한 방에 모여 생활한 적이 있. 나는 얼른 자고 싶은데, 아빠와 언니는 자꾸만 텔레비전을 봤다. 아빠는 내가 잠들 수 있게 광등을 꺼주었지만 소용없었다. (1)과 (2) 인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해서다. 텔레비전 끌 생각 안 하는 두 사람과, 도움 요청도 못하게 쿨쿨 자엄마를 원망하면서 이불속에서 괴로워했다. 외할머니는 청주 인근 증평에사셨다. 외할머니댁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도, 마지막까지 늑장 부리는 것도 우리 삼 모녀(엄마, 언니, 나)였다. 언니가 부모님을 닮아 잘 자듯, 외할머니도 엄마처럼 낮잠이 생활화되신 분이셨다. 분명 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외할머니, 엄마, 언니가 잠들어 있었다. 시간은 보통 낮 4시 정도 햇빛적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햇빛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나도 고 싶다'인지, '이러다간 저녁까지 먹고 집 가겠네'인지는 잘 모르겠다.


  (3)의 까닭은 잠이 시간 낭비처럼 여겨져서다. 이러한 견해가 문제라는 건 아는데 고쳐지않는다. 그렇다고 잠 잘 드는 우리 가족에게 간 버린다고 뭐라 할 순 없다. 성향 차이 아닌가. 가족들은 수면을 좋아하쉽게 잠들 뿐이고, 나는 잠드는 걸 어려워하는 데다 일부러 안 자려는 것도 있다. 수면 시간이 길어질수록 회의감 커져서 하품하면서도 깨어 있으려 한다. 자고 나면 개운하다는 엄마의 주장에도 동의 못하는 게 내게 잠은 피곤을 가중시킨다. 쪽잠이든 8시간 이상의 숙면이든 꿈 동반돼서다. 자고 일어났다기보단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맞춰지질 않으니 도대체 시간을 어찌 보낸 건지 손해 본 기분이. 지난 글에서 강조한 바 쪽수에서 밀리면 답도 없다. 분위기만큼 동화되기 쉬운 것도 없다. 잠 잘 자는 사람들과 연속으로 온종일을 보내니 나도 모르게 대낮에 잠 말았다.




  연휴 넷째 날 놀러 가기로 한 건 실현되지 않았다. 어중간한 시간에 기상하여 굼벵이처럼 움직이다가 다음 날 가기로 땅땅 결정 내렸다. 이에 약속이나 한 듯 멍멍이를 포함한 다섯 구성원이 잠에 취했다. 자주 조는 아빠, 낮잠을 즐기는 엄마, 슥 보면 잠들어 있는 언니에, 신기하리만치 잠자는 시간이 긴 멍멍이. 예정된 외출이 없는 이상 넷 휴일 비중이 크다. 난 아닌데, 아니었는데…! 물론 잘 의도는 없었다. 일어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라 끼니도 애매하게 처리했다. 셋째 날에 넷이 햄버거 라지 세트에 감튀만 추가한 데 이어, 이번엔 라면 두 봉지를 나눠 먹었다.


  뒤죽박죽 수면 시간은 계획형인 내게 치명적이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이 휴일엔 하염없이 자게끔 놔둔다. 일찍 일어나고 싶어 일부러 맞춰놓은 알람이 엄마 터치에 목적을 상실하는 걸  적도 있다. 알람 소리에 비몽사몽 실눈을 뜨면 엄마가 내 폰을 스윽 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알람이 한 번 더 울려야 정신 차릴 수 있는데 단숨에 꺼졌으니 내 눈도 이내 감겨버린다. 연휴 첫째 날에서 넷째 날 기상 시간이 가관이었다. 두 딸내미가 정오가 다 돼서야 일어나 자연점심은 늦게 먹거나 알아서 겼다. 연휴 셋째 날(0930)엔 외식했는데 조차 3시경에 한 술 떴다. 연휴 넷째 날(1001)은 부모님만 아침을 드신 후, 점심은 언니까지 셋이 먹었다. 나는 깨어 있긴 했으나 미루어진 계획부터 처리하고 싶어서 주방에 가질 않았다. 서로 한 집에서 산 세월이 적다 보니 우리 가족은 혼자 먹든 다섯이 먹든 신경 안 쓴다. 배고픈 사람만 식탁에 앉으면 된다. 나는 3시가 돼서야 혼밥으로 배를 채웠다. 저녁은 다 같이 먹었는데 앞서 말한 바, 라면 두 개를 넷이서 먹은 탓에 끼니보다는 간식 개념으로 지나갔다고 본다.


  이후 다섯 구성원 다 함께 산책을 다녀왔다. 남자축구 8강전이 끝나곤 아빠를 안방에 밀어 넣었다. 연휴 동안 미뤄 왔던 실내 사이클을 이제는 타야 해서다. 1시간 정도 탔는데 90분의 산책과 어우러져  껌딱지 버렸다. 언니도 나와 동일한 시간에 방에서 운동하였으니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다. 열아홉에 독립하며 일찌감치 엄마 품을 벗어난 언니는 야식에 거리낌 없지만 23년을 엄마 밑에서 산 나는 식습관에 여러 제재가 있다. 야식 금지도 그중 하나다 보니 배고픔을 달랠 길은 애당초 없다. 배고프면 그저 괴로워한다. 다만 이번 허기는 강도가 셌다. 팔자에도 없는 낮잠까지 잤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 '아 왜 이렇게 배고프지?' 이유를 알면서도 굳이 물음을 던져가며 유튜브에 들어갔다. 연휴 첫째 날~셋째 날의 나는 평온에 목이 말라 asmr 쇼츠를 줄기차게 보았다. 넷째 날 저물고도 배고픔은 이어져 새벽 동안 '연매출 n억!' '기발한 아이디어!' '20년 장인!' '하루에 1000개 팔린다는!' 등으로 시작하는 맛집 쇼츠에, '남편 도시락' '딸 도시락'으로 끝나는 요리 쇼츠를 줄기차게 상하였다. 그렇다 하여 배고픔이 달래졌나 하면 결단코 아니다. 졸음가까워졌냐 하면 그 또한 아니다. 어라리요, 시간 낭비를 이중으로 한 거 같다.


  8월부터 자취나 다름없는 반나절을 보낸다. 알아서 일어나고, 알아서 밥 차려먹으며, 알아서 집안일한다. 약속이 생기더라도 친구들은 대개 계획파여서 사전에 식당, 카페, 들를 곳 다 정한다. 다른 이와 있을 때는 12시에서 1시 사이, 혼자 해치울 때는 1시에서 2시경에 점심 먹는다. 기상과 취침 시간 엇비슷하다. 이처럼 매일을 일관된 루틴으로 보내려다가 나흘 연속 뒤죽박죽 얼렁뚱땅 흐름에 몸을 맡기려니 골치가 아팠다. 결국 넷째 날 동화되어 이마를 짚으면서도 낮잠에 스르륵 빠진 걸 테다. 내가 파워 J일 수 있는 건 극 P인 아빠, 언니와 살지 않는 영향도 커 보인다. (엄마는 바깥에서만 선택적 J로 군다) 삼부녀 여행이 힘들었던 건 둘의 감정 소모보다도 계획의 부재였던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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