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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Oct 05. 2020

엄지발가락의 자유

 잿빛 하늘이 내려와 내 곁으로 다가오면,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바깥을 기웃거려 외출을 서두른다.

나의 가지런한 두 발을 쓰다듬어 양말을 신기면서. 나의 발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이 달려 있다. 제일 큰 엄지발가락이 첫째이고 네 개의 발가락이 올망졸망 엄지의 눈치를 보며 나란히 붙어 있다.

부엌일을 할 때나 빨래를 할 때에도 쉼 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기도 한, 내 발은 가끔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율에 까딱이며 흥겨워하기도 한다. 나의 엄지발가락은 남편의 가끔 터지는 고함과 한숨 소리에 움찔움찔 멈칫대는 정직한 표현의 욕구를 나타내는데 쓰인다.

얼굴로는 `좋다, 싫다'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내 몸의 중간쯤에 있는 손가락조차도 감정을 반은 가리고 반쯤만 서둘러 흔들어 대지만, 내 발만은 양말 속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면서도 가장 정직하게 `아! 그것은 아니야.' `나는 그게 정말 싫어.' 하면서 마음의 불편함을 나타내며 까딱거린다. 남편의 과보호와 가족이라는 신발에 맞춰 생활을 하여, 이미 어디론 가로 없어져 버린 나의 실체를 끌어안고 갑갑해도 답답함을 호소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잠깐만 자리를 비워도 어긋난 톱니바퀴의 삐걱거리는 소리처럼, 무질서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공간 속에서 숨통을 조여 오는 매 순간 들을 잘 참고 견뎌 냈다. 기회만 주어지면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리라 마음을 다지면서 탁 치면 튕겨 나갈 공처럼 웅크린 자세로 기회만 열심히 엿보며 살아왔다. 드디어 움츠렸던 나의 엄지발가락이 양말을 뚫고 자유로운 날개 짓을 할 때가 다가왔다.


새봄의 향기처럼 문예 창작으로 유혹하는 문화 센터의 팸플릿은 곱게 접어 둔 꿈의 나래를 펼 수 있는 행복의 길이었다. 엄마의 외출이 잦아지는데서 오는 당혹함을 아이들은 낯설어서 힘들어했다. 어디 아이들 뿐이었으랴. 아이들의 낯섦을 이해시키며, 엄마를 공부하고 자신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막내가 유독 적응을 못하며

“엄마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는 행복해요.”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릴 때면 자신에게 다짐하듯

“사람이 한 번 시작한 일은 끝맺을 때까지 하는 거야.”

하면서 달래 주었다.


언제나 다소곳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자신들만을 기다려주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으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라고 소리 없는 애원을 간절하게 보낸 1년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해였다. 조용히 바닷가를 찾아서 상념에 젖어 보기도 하며, 해묵은 낭만을 가슴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어 햇살 좋은 볕에 그을려 보기도 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짓누르는 일상의 틀을 털어 내지 못했던 세월을 되돌아보며, 내 정신의 완벽한 자유와,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산다는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이제는 나의 생활을 빛깔 좋은 일들로 채워지는 삶이 되기를 조용히 희구해 본다.


지난 한 해는 내 생애 가장 소중한 만남을 주기도 했다. 지도 교수님 앞에서 밤을 새워 써간 작품이 혹평을 받을 때면 절망으로 몸을 떨기도 했으며, 칭찬 한마디에 자존감이 차 오르는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의 유대, 공감이 따사롭기만 하다. 나이의 많고 적음도 문제 되지 않는 창작열에 색다른 감동을 받기도 했다.

소중한 만남의 시간들을 정녕 잊을 수 없으리라. 자아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작업을 위하여 부지런히 나의 엄지발가락을 움직여야겠다. 편안하게 숨을 쉬게 해주는 따뜻한 배려와 어느 순간에서도 굽힘 없이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나의 발, 궂은 일속에서도 본분을 다하는 발, 나 자신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주고 싶다. 

자신의 일을 위하여 가족을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한 사고의 인간이 아닌 더욱 소중한 그들을 위하여 몇 배 더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본다. 

양말 속에서 나의 처분을 기다리는 엄지발가락을 위하여 잠깐 바람을 쐬어야겠다. 재래시장에 들러 맛있게 만들 찬거리를 들고 와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탁을 꾸며야겠다.

<1994. 문화일보 신춘 사계 봄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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