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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Nov 05. 2020

어느 가을 저녁

가을은 억새의 계절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어디서 볼까?

글쎄...

나도 친구도 참석해야 할 예식이 있어서 일요일 오후로 약속을 잡긴 했는데

마땅히 어디로 가야 이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뜻 생각나지도 않는데, 갑자기 10여 년쯤 전에 삼청동 노란 은행잎 거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 동네가 정말 갑갑하다. 강도 없고 산도 없다. 덕수궁 돌담길이라도 걷고 싶은 생각이 든다.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나 내 눈이 호강함을 느낀다. 바람부터 스산하게 가을 저녁을 누비며 달려든다. 가끔 빗발도 뿌려대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젓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있을 단풍은 이 서울 안에 다 있다.


천호동에서 길동으로 넘어가는 길은 <서울은 노란색이다>가 어울리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어서 노란 잎으로 불 밝히는 거리, 송파구 둔촌동을 지날 때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어  나무숲이 눈을 가린다. 쭉쭉 뻗은 메타스콰이어, 미루나무, 느티나무, 플라타너스의 풍성한 가지들이 제 각각 물들어 조화를 이루니 눈이 즐거운 것이다.


 올림픽 공원 앞 길엔 대로 중앙에 은행나무가 열 지어 서 있어서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 마치 노랑나비들이 날갯짓을 하며 군무를 추는 듯 아름답다. 나무 밑 잔디엔 수천수만 마리들의 노란 나비가 꿈을 꾸듯 황홀하게 앉아 있다. 아! 나오길 정말 잘했다. 며칠 전에 해 놓은 약속이라 날씨가 안 좋아 거절도 못하고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으려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대모산 쪽으로 버스가 들어 가자 그 거리의 가로수들은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눈을 환하게 만든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친구는 


"어디가 좋을까? 한강 고수부지로 갈까?" 

"오다 보니가 석촌 호수도 아름답더라."

" 올림픽공원은 어때? "

"아, 거기도 좋겠다."

"그럼 출발...."


차창 밖으로 양재대로 길은 오래된 벚나무들의  불긋한 나뭇잎들이 새까만 나무 기둥으로 인해 고색창연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요즘 신문만 펼치면 만산홍엽이라며 온갖 색색의 단풍으로 물드는 산들을 소개하는데 멀리 가지 않아도 서울 시내에서도 가을 정취를 마음껏 누릴 수 있어서 좋다.

                                                                                                                                                           

올림픽 공원에 들어서니 비가 흩뿌린다.


숲길을 걸으며 저녁 어스름에 딱 어울리는 윌리엄 애커맨의 "행렬"을 들으며 걷는다. 기타와 팬플룻의 연주는 이 풍경과 잘 어울려 듣기 좋다. 호수 위의 바람개비들과 그 바람개비들을 바라보며 뽀송한 새들의 깃털처럼 날리는 억새의 무리. 흙길을 찾아 걸으며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아 본다. 느낌이 푹신하며 부드럽다. 


                                                                                                                                             


         

                                                                                                                                               

                                                                                                                                                            

 2시간쯤 걸으며 터키와 그리스 다녀온 얘기를 듣는다.


 터키는 도시가 깨끗하고 먹을 음식도 풍부하고 정말 좋아. 끝없이 펼쳐진 밀밭이 인상적이었어. 식당에서 바로 도정한 밀로 반죽을 하여 화덕에서 구운 빵을 식탁으로 가져오는데 부드럽고 바삭바삭한 느낌이 아주 좋더라 맛도 있고. 이슬람 권이지만 그네들은 어려운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도 서슴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주더라. 모르고 자판기에 유로화를 넣고 물을 사려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데 터키 청년이 오더니 물 한 병을 사서 건네주더란다. 폐소로 바꿔서 주겠다고 했더니. "No Thank!" 하며 미소만 짓고 자기 갈길 가던 터키의 청년. 그곳에 오래 살은 가이드한테 얘기하니 터키 국민의 모토는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는 거래. 참 괜찮지? 나라가 조용해. 온화하고 평화로워 안정적이고.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은 침략한 나라에서 온갖 유물들을 약탈해 간 역사인데, 소피아 성당에도, 박물관에도 텅 비어 있더라. 기독교를 폄하하고 이슬람을 두둔하는 것은 아닌데, 이번에 터키 여행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고대 교회 에베소 교회도 다녀왔어. 사실 구약을 읽으면서 전쟁으로 이어진 피의 역사가 조금은 부담 스러.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백성들이 반역을 하고 혼내 주고 이방인에 대한 응징 같은 것은 섬뜩하리만치 무섭기도 해. 그러나 온전한 세계를 이루려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시겠지. 요즘 다시 천천히 통독하면서 깨닫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 난 아직도 멀고 힘들다는 생각을 해." 


 둘 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다음 주에 있을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함께 듣기로 한다. 

"성지 순례는 아니었는데 이 곳 저곳 초대 교회를 둘러보고 그리스에 가서는 그 게으른 사람들을 보고서 나라가 망하겠구나. 공무원들이 그렇게 일찍 근무를 마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러니 나라가 위기에 빠지지."

 " 맞아. 막내가 있을 때 우체국이 하도 일찍 문을 닫아서 곤란할 때가 많았다고 하더라. 데모하던 그리스 사람들 생각 나."


이런저런 얘기로 산책길을 2km 넘게 걸은 듯하다. 우산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하면서 하나둘씩 네온사인이 들어오며 도시가 화려 해지는 것을 높은 곳에서 바라다본다.

슬슬 시장기가 돌아 무엇을 먹을까로 우리는 또 고민을 한다.

"집에서 흔히 만들어 먹지 못하는 것을 메뉴로 정하자."

"오케이. 그럼 뭐가?"

"파스타!"

"파스타 집으로 고고씽."


그동안 갑갑했던 마음을 오랜만에 비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을 한 우리들은 파스타 집에서 하우스 와인을 시켜 나눠 먹으며, 친구는 운전 때문에 많이 못 마시고 맛있는 파스타로 행복한 저녁을 보냈다. 


                                                                                                                                            

                새의 깃털 같은 풍성한 억새.(2012.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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