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행과 열 : 삶의 위도와 경도

삶은 Excel 스럽게

by 케빈은마흔여덟

거의 마흔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내 나이를 진짜로 깜빡깜빡했다. 무료한 한 해가 지나면 작년 일이 올해 일 같고, 재작년도 작년 같아진다. 게다가 만 나이, 진짜 나이, 빠른 나이, 미국 나이까지 더해지면 어느 순간 나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진다. 최근에는 나이 계산법을 또 바꾸면서 “옛날 나이”라는 말까지 생겼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나이를 헷갈려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들이 왜 ‘무슨 띠’로 나이를 묻곤 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한 해 두 해 먹어가며 숫자보다 관계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엑셀의 ‘행과 열’은 단순하다. 가로줄은 행, 세로줄은 열. 왠지 수학에서 본 익숙함, 그 행과 열이 맞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수학을 잘하면 엑셀이 아주 조금 수월할 수 있지만, 수학을 몰라도 배우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관계’다. 각 셀은 좌표를 통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다른 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위도와 경도처럼 알파벳과 숫자가 교차하는 지점, 그 하나하나가 존재의 자리이자 관계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A1 셀에 입력된 값을 다른 셀에서 ‘=A1’이라고 입력하면 A1셀에 표시된 값을 그대로 보여준다. 입력하는 순간 관계가 시작된다. “나는 저 셀과 연결되어 있다.”


삶도 그렇다. 내가 없는 세상에 의미가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나’가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은 ‘내가 만난 사람’이 되고, 어떤 책을 읽는 순간 그 책은 ‘내가 읽은 책’이 된다. 관계는 그렇게 태어난다. 아무 상관없던 것도 내가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순간 나와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저 공허한 공간일 뿐이다. 세상은 내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의미가 생긴다. 사랑, 행복, 미움, 질투 등 거의 모든 감정은 결국 ‘나’를 중심으로 파생된 좌표들이다.


아이를 보면서 관계의 본질을 새삼 느낀다. 한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줘도 금세 숟가락을 내려놓던 아이가, 스스로 요리를 하게 되자 자기 손으로 만든 음식만큼은 끝까지 먹으려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것이기에 그 안에 자신이 들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관계란 결국 그렇게 생겨난다. 내가 시간을 담은 만큼, 애정을 쏟은 만큼 세상은 나와의 연결로 의미를 얻는다.


타인의 나이조차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기억이 쉽다. 내 나이를 중심에 두면 계산이 단순해진다. 2025년에 77년생은 48살, 72년생은 내 나이보다 다섯 살 위. 세상은 그렇게 나를 중심에 두고 해석할 때 훨씬 선명해진다. 세상 모든 관계는 결국 나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속한 나라의 역사에 더 공감하고, 내가 본 영화에 더 몰입하며, 내가 먹은 음식에 더 감정이 실린다. 모든 것은 나와의 연관을 통해 비로소 색을 갖는다.


엑셀의 행과 열은 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틀이다. 셀에 무언가 입력되는 순간 관계는 시작된다. 내가 E3 셀이라면, G6 셀은 우측으로 두 칸, 아래로 세 칸 내려간 위치다. 내 좌표를 알고 있으면 어떤 위치로든 연결할 수 있다. 삶에서 출생 연도로 타인과의 나이 차를 아는 것처럼 나의 좌표를 알 때,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세상 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에 연결되고, 가족과 나라에 속하며, 지구 어딘 가에 우리의 위치를 갖게 된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이미 나를 포함한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살아 있는 한, 모든 시간 속에서 내가 존재하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인식하는 순간 비로소 작은 관계가 싹튼다.


삶은 수많은 셀이 이어진 방대한 시트다. 우리는 그 위에서 저마다의 행과 열을 그리며 살아간다. 누구는 옆으로 확장하며 관계의 넓이를 더하고, 누구는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리며 자신만의 데이터를 쌓는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세상에 유일한 좌표이지만 어디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엑셀의 참조 수식이 그러하듯, 내 좌표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나는 시트 위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좌표를 연결하는 방법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누군가는 더하기(+)로 마음을 보태고, 누군가는 곱하기(X)로 기쁨을 증폭시키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연을 맺어간다. 지금 하는 소소한 말과 행동은 세상과 연결 짓는 다리가 된다.


나는 지금 어느 셀에 머물고 있는가. 그리고 그 귀한 자리에서, 나는 나만의 어떤 수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기를 꿈꾸고 있는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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